우리 사회를 맴도는 공동체적 폭력의 근원
새롭게 보는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이 영화는 1930년대 미국 남부의 작은 기찻길 옆 간이역 마을을 배경으로, 두 여성의 우정을 그린 작품이다. 폭력적 남편에게 억눌린 루스, 그리고 오빠의 사고로 인한 죽음으로 상처를 가진 자유분방한 잇지는 휘슬스톱(간이역) 카페를 함께 운영하며 새로운 삶을 일군다.
겉으로 보기에 이 영화는 가부장제에 맞서 트완다로 상징되는 여전사의 신화를 주술 하는 로컬 여성 해방의 서사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늘 나는 이 영화를 "죽음과 죄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시선으로 다시 되돌아본다.
기차선로에 발이 끼어 죽게 되는 오빠로 인해 앉아서 기도만 하는 교회에 저항하고 빈민촌 아이들에게 통조림을 건네는 여자 잇지와 가부장적인 폭력 남편을 탈출한 루스는 의기투합하여 간이역 카페를 연다. 그곳은 노숙자를 돌보고 흑인에게도 열려있는 작은 공동체였다.
이후 폭력 남편 프랭크는 루스로부터 아이를 데려가려다 실종된다. 사실 잇지와 흑인 식구가 폭력 남편을 죽인 것이다. 시신 없는 살인에 대해 경찰 앞에서 그들은 시치미를 뗀다. 당시 거짓말하는 흑인은 교수형을 가했던 불평등한 인권 차별법과 달리 마을의 사람들과 목사는 그들의 범죄를 눈감아 준다.
영화 속에서는 몇몇 사람의 죽음이 나온다. 안타까운 죽음과 달리 죽어도 괜찮은 죽음도 나열된다. 소설 〈죄와 벌>의 러시아 정교회적 시선으로 보면 이해될 수 없는 1930년대 인종 차별과 가부장제, 보수적 가치관에 대한 사회적 죄에 대한 일종의 상징적 사형 선고이기도 하다. 단순히 시신 없는 살인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적인 문화에 대한 불가피한 죽임에 대해 예술적 무죄 선고를 내리는 로컬 공동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비도덕적 존재(전당포 노파)를 죽여도 인류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도덕적 계산을 내세워 살인을 저지른다. 그의 살인은 이념적·철학적 살인이다.
반면,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에서의 살인은 정서적·윤리적, 문화적 살인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신 앞에서 죄를 자각하고 참회함으로써 구원'을 얻지만, 잇지와 루스는 '공동체의 침묵과 연대 속에서 정의를 다시 규정'한다.
다시 생각하면 한쪽은 완벽한 선이며 약자이고 또 한쪽은 이제 완벽한 악이며 강자이기에 관객은 영화를 보고 난 후 졸렬하게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거나 혼란해하지 않는다. 심지어 카타르시스까지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나는 영화 속에서 살인이라는 극단적 행위가 공동체 정의를 토론할 수 있고 회복할 수 있는가? 다시 묻는다. 영화 속 살인은 타인의 죽음으로 등장인물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행위로 사용된다. "주인공이 절실함과 정당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주인공 중심의 폭력의 시각화이다.
이것이 '살인 포르노'의 근원이다.
영화 속 죽음은 또 어떤가? 등장인물의 소멸을 통한 이야기의 화룡정점이며 재구성 작업인데 영화 속 등장인물의 애달픈 죽음은 관객에게 주인공으로 모든 것을 집중시키는 흔한 장치이다. 영화 속 죽음은 모든 이야기 체계를 리셋시키는 단 하나의 강력한 방법이다. 그중에 하나가 안타깝고 애달픈 외부 혹은 타인으로 인한 죽음이다.
영화 속 죽음은 이제 금기가 아니라 가장 흔하고 여전히 강력한 영화적 언어이다.
이 영화가 주목해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오늘날 공동체를 뒷배로 해서 일어나는 우리 사회의 양극화된 정의의 단면을 이 영화가 담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우리 시대 소위 서사 문화 콘텐츠들이 죽음의 경제학과 침묵의 정치학으로 확장된다는 데 있다.
휘슬스톱 카페는 단순한 식당이 아니라, 1930년대 미국 남부의 인종·성별·계급 억압이 교차하는 미시적 공동체다. 여기서 프랭크의 죽음은 '필연적 희생'으로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공동체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한 제물이다. 목사와 마을 사람들이 눈감아 주는 순간, 정의는 더 이상 보편적 법이 아니라 로컬한 합의로 변질된다.
이는 도스토옙스키의 라스콜리니코프가 신 앞에서 고독하게 죄를 직면하는 것과 정반대다. 잇지와 루스는 공동체의 연대 속에서 죄를 분산시키며, 개인적 참회 대신 집단적 면죄부를 얻는다.
하지만 이 '공동체 정의'는 취약한 균형 위에 서 있다. 프랭크의 시신이 사라진 채로 사건이 묻히는 장면은, 죽음의 증발을 상징한다. 시신 없는 살인은 물리적 흔적뿐 아니라 윤리적 흔적까지 지우는 행위다. 공동체는 이를 통해 '우리'와 '그들'을 재구성한다 – 폭력적 백인 남성(프랭크)은 '그들'로 배제되고, 억압받는 여성·흑인·노숙자(잇지, 루스, 빅 조지 등)는 '우리'로 재편된다.
이 영화는 죽음의 서사적 기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오빠의 기차 사고 죽음은 잇지의 자유분방함을 정당화하며, 프랭크의 죽음은 루스와 잇지의 우정을 영웅적으로 완성하는 '클라이맥스'다. 이는 주인공 중심의 폭력 미학이다 – 타인의 죽음이 주인공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순간. 관객은 카타르시스를 느끼지만, 이는 오늘날 너무나 흔하게 사용되는 죽음을 남용하는 소비다.
영화는 프랭크를 '죽어도 되는 존재'로 단순화함으로써, 살인의 윤리적 복잡성을 회피한다.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왜 주인공의 구원을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가? 영화 속 공동체가 정의를 재정의할 수 있다면, 왜 작가나 감독의 비폭력적 상상마당은 이렇게도 좁고 가파른가? 당연히 시장과 대중의 편협한 소비와 욕망 탓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영화에 대한 비판적인 다양한 시선과 해석의 부재이기도 할 것이다.
춤과 노래 그리고 말과 글의 문화가 정점에 달하고 있지만 오히려 말과 글의 양분열로 인해 춤과 노래도 ' 그들'과 '우리'로 나누어졌다.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는 꽤 정치적이고 여전히 통용되는 오래된 '이야기 화폐'일뿐이다.
문화 민주주의적 시선으로 이 영화를 읽어보려 한다면 너무나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또한 평등한 삶을 위한 여성들의 낮은 포복 같은 저항의 영화 속에 숨겨진 편협이 엿보인다. 오늘날 우리 문화 콘텐츠의 '폭력의 미학화'와 '정의의 사유화'라는 근본적 속성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