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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윗집 사람들>

by 신지승

형식만 빌린 심리극의 한계

영화가 시작하면 인간의 본능적인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제한된 공간인 한 아파트와 복도에서 벌어지는 이 영화는 대사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연극적 구조를 취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그렇게 참신하거나 창의적인 구성이나 발상에 기인한 것은 아니다.

영화가 끝나자 찾아본 사자, '실가지락'이라는 사자성어가 오래 남았다. 뜻이 맞고 정다운 부부 사이에서 생기는 즐거움을 뜻하는 이 말은, 정작 영화 속 부부들의 관계와는 묘한 대비를 이룬다. 한국 사회 딩크족들의 풍경을 엿보는 즐거움이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혼숙려캠프의 부부 서사보다도 전개의 밀도가 약했다. 굳이 걸작을 통해서만 얻는 통찰이 아니라, 이렇게 가벼운 작품 속에서도 종종 묘한 에너지와 냉소적 쾌감을 건져 올릴 때가 있다.

성공한 배우의 흥, 그리고 남겨진 부끄러움

감독은 배우 하정우다. 자신이 가진 인적 자원을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사용한 것까지는 뭐라 할 수 없다. 하지만 가끔 동창회에 가면 경제적으로 성공한 누군가가 자기 흥에 겨워 혼자 떠드는 꼴을 보게 되듯, 이 영화에도 어쩐지 끝나고 나면 여운 하나 남지 않는 정적이 있었다. 부끄러움은 오히려 다른 이들의 몫이 되는 날처럼. 관객으로 부끄러운 영화이다.

이 영화는 배우 하정우의 내공의 부족을 모르는 오만, 그리고 다른 영화인들이 느끼는 좌절감을 충분히 안길 수 있다. 딩크족들의 그룹섹스나 스와핑 같은 자극적 29금 소재를 앞세운 영화장사치의 탐욕을 드러내는 짓이다. 한국의 층간 소음문제로 인해 살인까지 심심찮게 일어나는 문제는 그들 영화속 딩크족에게는 잔 1초도 화젯거리가 아니다.그룹섹스와 스와핑으로의 초대와 어설픈 부부갈등을 상담하는 것외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오히려 가벼움이 허용하는 한국 딩크족의 여유로운 일탈 , 도시의 아파트 위층에서 새어 나오는 섹스의 층간소음 풍속을 갈고 닦은 연기와 대사로 조롱해 버린다.(스페인 영화 '센티멘털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

밀폐된 공간, 그러나 얕은 심리

이 영화를 보며 떠오른 것은 한정된 공간 안에서 부부의 심리가 점점 벗겨지는 작품들이 가진 힘이었다.

에드워드 올비의 〈버지니아 울프는 누가 두려워하랴〉가 그러했다. 남의 집 거실이라는 단 하나의 무대에서, 두 부부는 술기운에 묻어두었던 상처와 결핍을 서로의 정강이처럼 걷어찼고, 그 과정은 코미디인지 비극인지 모를 만큼 생생하고 추했다. 그러나 그 추함 속에서야 비로소 '진짜 부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탄생했다. 사랑의 형식과 허세, 자기기만과 잔혹함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무서우리만큼 밀도 있게 보여주었다.

야스미나 레자의 희극이자 로만폴란스키 감독의〈대학살의 신〉도 마찬가지다. 아이들 싸움이라는 사소한 사건에서 시작된 대화는 거실 한편에서 와인병이 기울어질수록 점점 다른 전쟁으로 변했다. 결혼, 양육, 계층, 성공, 인격—그 모든 사회적 가면이 빠르게 벗겨지고, 최종적으로는 네 명의 어른이 서로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들춰내기까지 한다. 작은 거실 하나가 인류학적 실험실이 되는 순간이다.

영화 <더 파티>는 버지니아 울프류의 형식적 계통을 따르지만 정치적 은유를 통해 그 사회 엘리뜨들의 지적 윤리적 성적 허영을 풍자한다

보건부장관 임명을 축하하기 위해 초대한 손님들이 한 집에서 벌이는 불륜과 레즈비언파트너들간의 이야기이다.

그와 비교하면, 〈윗집사람들〉은 갈등의 지적 진폭이 훨씬 얕디 얕다. 부부의 농담과 속내가 스치듯 교차하지만, 그것이 재난처럼 걷잡을 수 없는 사회적 화두로 번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올비나 레자의 작품처럼 인간의 핵심을 흔드는 심리적 압력은 만들지 않는다.

형식만 빌린 연극, 무기가 되지 못한 대사

〈읫집사람들〉은 전형적인 실내극(chamber piece)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그 형식이 주는 강점—즉 밀도 있는 대사와 긴장감, 인물 간의 심리적 줄다리기—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인간의 본능적 외로움"이라는 출발점. 사실 딩크족, 도시의 고립, 층간이라는 물리적·심리적 거리는 현대인의 외로움을 다루기에 적절한 소재다. 문제는 그 이후다.

영화가 연극적 형식을 빌렸다면, 그 안에서 대사는 곧 무기가 되어야 한다. 올비의 작품에서 대사는 칼날처럼 상대를 베고, 레자의 작품에서 대사는 가면을 벗기는 도구가 된다. 그러나 〈윗집 사람들〉의 대사는 그저 상황을 설명하거나, 가벼운 농담으로 흐르거나, 자극적인 소재로 관객의 시선을 끄는 데 그쳤다.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부부극은 드라마에서는 이미 수없이 시도된 형식이다. 그렇다면 영화적 승부는 "어떻게 다르게 보여줄 것인가" 또는 "얼마나 깊이 파고들 것인가"에 달려 있다. 이 영화는 그 어느 쪽도 성취하지 못했다. 형식만 빌려왔을 뿐, 그 형식이 요구하는 극적 강도와 인간 사회 심리에 대한 통찰은 부족했다. 아니다. 아예 없다. 하정우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지 제 스스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같다.


심지어 북한 영화의 한국판으로 까지 해석된다 .

북한의 부부갈등 소재 드라마가 가지는 갈등봉합 방식

북한 영화의 부부갈등 스토리텔링은 그 갈등의 원인이나 심리적 묘사는 깊이 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부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료나 당 간부가 나서서 그들을 '계도'하거나, '애민정신'과 '조국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며 화해를 종용한다. 이 영화에서는 당 간부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이하늬역)가 부부의 갈등을 상담하고 봉합하는 구성으로 마무리한다 . .https://brunch.co.kr/@top/747 (남북한 부부갈등을 다룬 영화비교)

바람처럼 지나가는 영화, 그러나

걸작들이 인간의 심연을 후벼 판다면, 〈윗집 사람들>은 그 심연 위를 잠시 흘러가는 바람 같은 것이다. 이런 작품은 거대한 서사 대신, '지금 여기'의 한국 무료한 딩크족의 정신적 무기력을 느끼게 하는 작은 관찰 기록처럼 다가온다.

오래전 〈아래층 남자 위층 여자〉라는 영화의 제목이 갖는 기민성이 생각나는 제목에서부터, 한국영화가 드디어 그 투기의 민낯 기획의 무모함을 드러낸 것은 아닐까. 한국의 배우-감독의 안이하고 한국영화의 평균과 관객의 수준을 모르는 저급한 장사꾼의 오만한 태도가, 결국 관객에게 역겨움과 부끄러움만을 남긴 순간이다.

(로만 폴란스키의 대학살의 신 영화파일이 필요하신 분은 메일로 보내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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