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원죄
“언제부터 우리는 예수께 금관을 씌워 권력의 보좌에 앉혔는가?”
한국교회의 80년 역사를 회개의 눈으로 추적합니다.
십자가의 길 대신 권력과 번영의 길을 걸어온 교회의 죄를 고백하며,
금관을 벗어던지고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는 여정을 함께 시작합니다.
제1부 2회는
한국교회의 큰 산과 같은 한경직 목사와 서북청년회를 돌아봅니다
빛과 그 뒤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우리는 지금까지 외면하며 짐짓 모른 채 살아왔습니다.
한국교회의 원죄에 대해 이제는 정면으로 대면할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회개와 자성으로 글을 시작합니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에베소서 5:11–13)”
한국교회의 역사를 논할 때, 한경직 목사의 이름은 빼놓을 수 없는 거대한 산맥처럼 존재합니다. 그는 해방 직후 혼란 속에서 영락교회를 창립하며 한국교회 재건의 아버지로 불렸고, 수많은 이들에게 영적 안식처를 제공하며 사랑의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이름 앞에는 늘 한국 기독교의 희망과 부흥이라는 수식어가 따랐고, 그의 생애는 한 시대의 거룩한 표상처럼 여겨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 뒤에는 늘 하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바로 '서북청년회'와의 연결고리입니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페이지 중 하나인 제주 4·3 사건을 비롯한 여러 국가폭력의 현장에서 그 이름이 오르내리는 서북청년회. 그리고 그 서북청년회가 영락교회 청년들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는 불편한 진실은, 한경직 목사라는 인물을 단순한 성인으로만 볼 수 없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으며, 그를 통해 드러나는 한국교회의 초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빛과 그림자가 극명하게 교차하는 한 인물을 통해 우리가 직시해야 할 한국교회의 원죄를 드러내고 회개하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서북청년회는 해방 이후 북한에서 월남한 청년 기독인들을 중심으로 1946년에 결성되었습니다. 그들의 주된 활동 근거지는 아이러니하게도 평안남도 출신 피난민들이 주축을 이룬 영락교회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영락교회 청년부가 서북청년회 조직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곧 "빨갱이 척결"이라는 구호를 신앙적 사명으로 둔갑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들에게 공산주의는 제거해야 할 악의 축이었고, 자신들의 행동은 곧 정의로운 신앙 행위와 동일시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신념이 광기로 변질되면서 폭력과 학살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입니다.
서북청년회는 미군정기와 이승만 정권 초기, 좌익 세력 진압의 선봉에 서며 국가폭력의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그들의 잔혹한 행위는 한국 현대사의 뼈아픈 상처로 남아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제주 4·3 사건(1948~1954)입니다.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제주도민들의 봉기에 대한 진압 과정에서, 서북청년회는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하고 마을을 방화했습니다. 강제결혼, 재산 탈취 등 각종 폭력 행위가 보고되었으며, 이는 민간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약 3만 명에 달하는 제주도민이 희생된 이 비극은 서북청년회의 폭력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척결한다"는 명분 아래, 인권을 유린하고 생명을 경시했습니다.
또한 여순사건(1948) 진압 과정에서도 서북청년단은 동원되어 좌익 세력 토벌에 가담했습니다. 이처럼 일련의 사건들에서 드러난 서북청년회의 폭력적인 행위들은 ‘기독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남깁니다.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는 식의 왜곡된 논리가 강단과 거리에서 퍼져나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를 가르치는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폭력과 학살의 명분으로 둔갑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은 한국교회가 마주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물음 중 하나입니다.
서북청년회와의 연결고리에도 불구하고, 한경직 목사의 긍정적인 면모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해방 직후 혼란과 가난 속에서 수많은 난민과 고아들을 구호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며 영락교회를 피난민들의 안식처이자 희망의 공동체로 만들었습니다. 영락교회는 한국교회 부흥의 상징이 되었고, 한경직 목사는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교회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그의 헌신적인 목회와 사랑의 정신은 분명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과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가 보여준 빛은 분명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었습니다.
그러나 빛이 강렬할수록 그림자 또한 짙어지는 법입니다. 한경직 목사가 서북청년회의 폭력을 직접적으로 지시했는지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서북청년회 조직에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한경직 목사 본인도 생전에 "우리 교회 청년들이 서북청년회를 조직했다"라고 증언했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이 청년들의 폭력적인 행동을 방조하거나 묵인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신앙적인 대의명분 아래 이를 정당화하는 분위기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결국 교회가 국가폭력과 결탁하게 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교회가 마땅히 지켜야 할 약자 보호와 생명 존중의 가치를 외면하고, 특정 이데올로기적 신념에 사로잡혀 폭력을 용인한 것은 한국교회의 지울 수 없는 그림자로 남았습니다.
한경직 목사와 서북청년회의 관계는 단순히 한 개인의 빛과 그림자를 넘어, 한국교회의 구조적 '원죄'로 읽어야 합니다.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사랑과 평화, 그리고 약자들을 위한 희생입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복음 대신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선택했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이것이 복음의 본질을 대체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면서 교회는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는 구조적인 출발점에 서게 됩니다.
이러한 선택은 훗날 국가조찬기도회라는 이름으로 군사정권과 결탁하고, 경제 성장을 지상 목표로 삼는 정권에 신앙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식으로 이어지는 뿌리가 됩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는, 세상 권력과 야합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서북청년회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유혹에 한국교회가 얼마나 쉽게 넘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경직 목사 개인을 성인처럼 미화하거나, 반대로 단죄하는 이분법적인 시각을 넘어, 그를 통해 드러난 한국교회의 초상을 읽어내야 합니다. 그는 분명 한 시대의 희망이자 등불이었지만, 동시에 그가 드리운 그림자는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역사적 책임을 상기시킵니다.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존재했던 이 인물, 바로 그 모순이 한국교회 역사 전체의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용기를 내어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를 직시해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 이데올로기와 권력에 무릎 꿇었던 우리의 역사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은 고발서가 아니라, 한국교회가 다시 십자가의 길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의 자리입니다. 십자가에서 달리신 예수를 금관으로 바꿔치기하고, 사랑 대신 증오를, 평화 대신 폭력을 선택했던 우리의 죄악을 고백하며, 이제 다시 가시관 쓰신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로 돌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오 주여, 이제는.
빛을 빙자한 그림자를 직시하고, 진정한 빛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우리의 교회가 다시 당신의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로 서게 하소서. 아멘.
9월 12일 금요일 연재됩니다
제1부 : 피로 시작 된 한국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