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 복음인가 신앙인가?

십자가가 국방부 깃발로 바뀌던 순간

by 여운
“언제부터 우리는 예수께 금관을 씌워 권력의 보좌에 앉혔는가?”
한국교회의 80년 역사를 회개의 눈으로 추적합니다.
십자가의 길 대신 권력과 번영의 길을 걸어온 교회의 죄를 고백하며,
금관을 벗어던지고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는 여정을 함께 시작합니다.


제1부 3회는

한국전쟁은 교회가 십자가를 내려놓고 반공의 깃발을 든 비극의 순간이었습니다.

복음 대신 증오가 강단을 지배했고, 학살 앞에서 교회는 침묵하거나 동조했습니다.

그럼에도 원수까지 사랑한 이들의 삶은, 복음의 본질이 결코 꺼지지 않았음을 증언합니다.

한국교회의 원죄에 대해 이제는 정면으로 대면할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회개와 자성으로 글을 시작합니다.






3화 :반공, 복음인가? 신앙인가?

한국전쟁과 교회의 정체성 상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누가복음 23:34)


어떤 신학자는 한국전쟁을 두고 "한국교회의 십자가가 국방부 깃발로 바뀌던 순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평화의 사도로 오신 예수의 이름이 증오와 살육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변질된 비극의 순간이었습니다. 해방 후 민족의 진로를 두고 갈라졌던 사회의 분열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풍 속에서 교회 공동체마저 파괴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그 잔인한 현실 앞에서 무력해 보였고, 그 자리를 반공이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연재는 한국교회가 언제부터 십자가의 예수를 금관의 보좌에 앉혔는지 추적하고 있습니다. 1화에서 우리는 가시관을 버리고 이념의 편에 섰던 ‘타락의 씨앗’을 보았고, 2화에서는 서북청년회의 폭력에 침묵했던 교회의 모습을 돌아봤습니다. 한국전쟁은 바로 그 침묵이 공식적인 ‘제도화’의 길로 들어선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가 국방부 깃발이 되던 순간


전쟁 발발 직후, 교회의 강단은 급격히 변모했습니다.

북한 공산당 치하에서 실제로 수많은 기독교인이 신앙을 이유로 박해받고 순교했던 경험은, 월남한 성도들과 남한 교회에 극심한 불안감과 적개심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러한 실존적 공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 대신, 공산주의를 "사탄의 괴뢰집단", "적귀"로 규정하며 멸절을 외치는 증오의 설교가 울려 퍼지게 했습니다. '멸공'은 곧 '복음'**과 동일시되었고, 기독교인들은 반공 전선의 최전방에 섰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공포나 현실적 위협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이 감정을 활용하여 국가 권력과 긴밀히 협력하며 ‘기독교 의용대’를 조직했습니다. 찬송가 「이기고 또 이기니」를 군가로 개사해 부르며 '멸공'을 부르짖었고, '십자군'을 자처했습니다. 교회가 전쟁에 적극적으로 복무하면서 얻은 이익은 분명했습니다. 국가는 교회에 반공의 이념적 정당성을 부여받았고, 교회는 그 대가로 국가적 특혜와 제도적 영향력을 얻었습니다. 이념의 동반자가 됨으로써 교회가 종교를 넘어 사회의 중심부로 진입하려 했다는 점에서, 이는 단순한 협조가 아닌 구조적 유착의 시작이었습니다.


보도연맹 학살과 교회의 면죄부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여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비극을 마주합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입니다. 예비 검속이라는 명분 아래 수십만 명의 양민이 학살당한 이 사건은 한국전쟁의 가장 잔인한 역사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기록에 따르면 일부 교회 건물들이 이들의 집결지나 학살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수많은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이러한 학살을 방조하거나 최소한 침묵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이름을 앞세우면서도 무고한 이들의 피 흘리는 비극 앞에서 입을 다물었습니다. 이는 이미 반공이라는 이념이 복음 위에 군림하면서, '적'으로 규정된 이들의 죽음은 신학적으로,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침묵과 동조는 이 끔찍한 학살에 사실상의 면죄부를 제공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17708_52163_2958.jpg 창원에서 발굴된 보도연맹 사건 관련자 유골. 어린아이로 추정되는 유골도 나왔다.(진실화해위원회)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이념의 경계를 넘어선 십자가의 사랑


그러나 한국교회가 반공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매몰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전쟁의 비극 속에서도 십자가의 본질적 사랑을 지켰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옥중 순교했던 주기철 목사는 반공 순교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의 아들 주영진은 전쟁 중 공산군에 의해 처형당했고, 이 비극은 한국교회의 반공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기철 목사를 끝까지 돕지 못했던 후배 목회자 한경직은 이후 한국교회 성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두 길은 극명하게 갈라져 보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복음의 본질을 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오직 우리 편'만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더 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공산당에게 두 아들을 잃었지만 그들을 용서하고 품에 안았던 손양원 목사의 사례는 단순한 반공 서사를 넘어, 복음적 사랑이 이념의 경계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보여줍니다. 진정한 신앙의 본질은 시대의 이념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십자가가 보여준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반공주의의 종교화와 제도화


학자들은 한국전쟁이 한국교회의 보수화와 반공주의 강화를 불러왔다고 지적합니다. 이 시기 '반공주의의 종교화'는 단순한 감정적 구호를 넘어, 교회의 구조와 신학에 체계적으로 편입되는 ‘제도화’ 과정을 거쳤습니다.


첫째, 신학적 편입입니다. 공산주의를 '적그리스도'로 규정하는 종말론적 해석이 주류 신학으로 자리 잡으면서, 반공은 신앙적 의무이자 거룩한 투쟁이 되었습니다. 둘째, 구조적 편입입니다. '기독교 의용대'처럼 국가와 연계된 조직이 교회를 중심으로 만들어졌고, 이는 교회가 국가 안보의 협력자라는 인식을 강화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리적 편입입니다. 반공은 개인의 신념을 넘어 공동체의 공적 교리로 여겨지면서,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이단으로 몰아가는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국가조찬기도회로 이어질 길


한국전쟁이라는 격랑 속에서 반공 신앙이 제도화된 과정은, 훗날 정권과 교회가 공식적으로 결탁하는 길을 예비했습니다. 복음의 자리에 반공 이념을 앉혔던 경험은, 이제 기도의 자리에 권력의 제단을 세우는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십자가를 이념의 깃발로 바꾼 죄는, 단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한국교회를 짓누르는 원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외면하고 반공을 복음으로 삼았습니다.
사랑을 버리고 증오를 택했으며, 정의를 외면하고 침묵으로 죄에 동참했습니다.
기도의 자리를 권력의 제단으로 바꿔버린 우리의 죄를 고백합니다.
이제는 다시 십자가의 본질로 돌아가게 하소서.




다음 회 예고

9월 16일 화요일 연재됩니다

제1부 : 피로 시작 된 한국교회

4화 : 권력의 제단이 된 기도 – 국가조찬기도회의 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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