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6월까지, 피와 신앙의 연대

전두환시대, 침묵하는 교회, 폭압에 맞서는 교회

by 여운



“언제부터 우리는 예수께 금관을 씌워 권력의 보좌에 앉혔는가?”
한국교회의 80년 역사를 회개의 눈으로 추적합니다.
십자가의 길 대신 권력과 번영의 길을 걸어온 교회의 죄를 고백하며,
금관을 벗어던지고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는 여정을 함께 시작합니다.





광주에서 6월 항쟁까지, 피와 신앙의 연대

전두환시대, 침묵하는 교회, 폭압에 맞서는 교회


1980년 5월, 한국 현대사는 다시 한번 피로 얼룩졌습니다. 10.26 사태 이후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 오르던 때, 신군부는 5.17 쿠데타를 단행하며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광주민주화운동은 국가 폭력의 참혹함을 온 세상에 드러냈습니다.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총칼을 휘두를 때, 교회와 성당의 종탑에까지 총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교회는 이 폭력 앞에 어떤 선택을 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역사적 물음이 아니라, 그 시대 교회의 양심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었습니다.


피의 폭거, 양심의 외침


1980년 5월, 광주 시내의 성당과 교회들은 시민들의 비명과 총성 속에서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수의 보수 교단과 대형교회 지도자들은 신군부의 압박과 '안정'을 강조하는 정부의 선전에 굴복했습니다. 그들은 광주에서 벌어진 비극을 '폭도들의 난동'으로 규정한 정권의 프레임에 동조하거나, 최소한 침묵으로 외면했습니다. 이 침묵은 복음의 순수성을 지켜야 할 교회가 권력의 폭력에 사실상의 면죄부를 주었던 뼈아픈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일부 성직자와 신자들은 숨은 기록자이자 증언자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시민들은 부상자와 시신을 옮기며 목숨을 걸고 군부에 맞섰고, 이들은 총알이 빗발치는 거리에서 교회와 성당으로 부상자를 옮겨 치료했습니다. 특히 가톨릭센터 지하에서는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임시 구호소가 차려졌고, 신부와 수녀들은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부의 총칼에 맞섰습니다. "군인들이 성당 안까지 쳐들어와 부상자를 끌고 갔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은, 신성한 공간마저도 폭력의 예외가 될 수 없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비극은 종교의 이중적인 위치를 극명하게 드러냈습니다. 권력과 결탁해 온 종교가 '정치의 외피'를 썼다는 비판은 유효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수배를 당한 민주 인사들이 교회와 성당에서 숨어 지냈던 것처럼, 종교 공간은 독재와 폭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마지막 안전지대가 되었습니다. 광주를 침묵 속에 가두려 했던 신군부의 계획은, 그 참혹한 역사를 기록하고 증언하려 했던 양심 있는 신앙인들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지속된 투쟁과 헌신


광주의 비극이 끝난 후에도 종교인들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980년 광주에서 다수의 교회가 침묵했다는 아픈 기억은, 이후 민주화 운동에 대한 종교계의 자성을 촉발하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미 유신 시대부터 독재에 저항해 온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1985년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을 폭로하며 군사정권의 인권 탄압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이 단체는 1974년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계기로 결성되었습니다. 또한 NCCK(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1984년 창설)는 지속적으로 인권 상황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국제사회에 한국의 실상을 알렸습니다. 도시산업선교와 농촌목회운동은 노동자와 농민의 고통에 깊이 연대하며, 복음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는 것임을 증언했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엑스플로 대형집회와는 달리, 이 시기 교회들은 예배당의 문을 활짝 열고 민주화를 위한 기도와 투쟁의 장소로 내어주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 "신앙과 시민의 연대"


1980년의 침묵에 대한 깊은 자성은 1987년, 거대한 결실을 맺게 됩니다. 한국교회의 저항은 마침내 6월, 거대한 파도로 터져 나왔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촉발한 국민적 분노는 '고문 없는 세상'과 '대통령 직선제'를 외치는 함성으로 번졌습니다. 이때 교회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6월 10일, 서울 시내 곳곳에서는 민주화를 위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종교계는 시민들의 안전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었습니다. 특히 명동성당은 시위대가 경찰의 진압을 피해 들어온 후 농성을 벌이며 민주화 투쟁의 상징적인 거점이 되었습니다. 전국 각지 교회에서는 시국기도회가 열렸고, 개신교, 천주교, 불교 등 종교를 초월한 연대가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NCCK와 정의구현사제단은 공동 성명을 발표하며 독재 정권의 퇴진을 요구했고, 교회들은 예배당을 시민들에게 내어주며 물과 음식, 피난처를 제공했습니다. 종교인들이 앞장서서 경찰의 진압에 맞섰고, 교회의 종탑은 자유를 위한 함성을 울리는 확성기 역할을 했습니다.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6월 항쟁에 불을 붙였고, 국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마침내 6월 29일,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했고, 이는 국민과 신앙인의 연대가 이뤄낸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6월 항쟁은 단순히 직선제 개헌이라는 결과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이후 민주화 세력의 제도권 진입 기반을 마련하며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그 역사 한가운데에 교회가 함께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십자가는 광장에 세워졌다


권력의 제단에 무릎 꿇고 번영을 추구했던 대다수 교회가 있었지만, 광주의 피와 6월의 함성 속에서 진정한 십자가의 의미를 되찾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이 건물의 화려함이나 교세의 성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 받는 민중과 함께하는 것임을 몸소 증명했습니다. 교회가 성전이라는 닫힌 공간을 벗어나 광장으로 나올 때 비로소 복음은 살아 숨 쉬는 힘을 얻었습니다.


광주의 희생과 6월 항쟁의 승리는 '민중과 함께한 십자가'의 신학적 의미를 새롭게 증언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낮은 곳에서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셨던 것처럼, 교회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 민주주의의 거리에 섰을 때 비로소 진정한 교회가 되었다는 신앙적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는 광주의 피와 6월의 함성 속에서 신앙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그 희생을 잊지 않고, 다시는 권력의 제단에 무릎 꿇지 않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광주의 아픔을 외면했던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6월의 함성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저희가 모든 폭력과 불의에 맞서,
십자가를 들고 가장 낮은 곳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두려움 대신 당신의 용기를,
침묵 대신 당신의 정의를 택하게 하소서.



다음 회 예고

9월 30일 월요일 연재됩니다

제2부 : 권력과 교회의 결탁

8화 : 민주화 이후 "교회의 공공성 상실과 신뢰의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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