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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방위군 "잊혀진 죽음의 행렬 3"

시리즈 3 (마지막) : 망각과 기억

by 여운
한국전쟁의 폐허 속, 총 대신 삽과 봇짐을 짊어진 채 죽음으로 내몰린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국민방위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국가는 그들을 지켜주지 않았습니다.
수만 명이 굶주림과 추위 속에 쓰러지고, 책임은 끝내 누구도 지지 않았습니다.
이 연재는 잊힌 죽음의 행렬을 불러내어,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을 따라갑니다.


연재 목차소개


국민 방위군 " 잊혀진 죽음의 행렬"

1화 : 아군의 부패로 죽어간 사람들 "잊혀진 죽음의 행렬"

2화 : 부패와 무능 "국민을 죽음으로 내 몬 권력자들"

3화 : 망각과 기억 " 오늘도 국민방위군들은 죽어 가고 있다"







망각과 기억 " 오늘도 국민 방위군은 죽어가고 있다"


이 사건은 '몇몇 간부의 일탈'이 아니다. 국가가 봉합하고 망각을 관리한 구조적 범죄다. 1951년 겨울, 대한민국은 거대한 죽음의 행렬을 목도했지만, 진실 기록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망각은 폭력의 완성이다.



숫자가 말하는 그날의 진실


숫자와 날짜가 먼저 진실을 이야기한다.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TRC)는 사망 및 행방불명자를 최소 5만 명에서 최대 8만 명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1951년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했던 사망자 수는 1,234명뿐이었다.

8만 명과 1,234명

1951년 7월 19일, 군법회의는 국민 방위군 지휘부에 사형을 선고했으며, 8월 12일 형이 집행됐다.

당시 국방부 장관은 여론에 밀려 사임했다.

분노는 신속하게 봉합되었다. 책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공개적으로 진행된 관련자들의 총살형은 분노를 잠재우고 진실을 수면아래로 덮어 버렸다.

1,234명과 8만 명. 이 숫자의 간극. 이것이 국가가 은폐했던 구조적 배신의 크기다.


봉합 메커니즘의 "기억을 관리한 국가"


사건의 전말은 국회 폭로와 언론 보도에 의해 드러났다. 당시 서민호 의원은 국회에서 "수천 명이 굶어 죽어갔고, 귀환 장병 20%는 생명 유지가 불가능했다"라고 폭로했다.

그러나 그 진실을 봉합하는 결말은 빨랐고 기만적이었다.

국회 폭로 → 언론 보도 → 여론의 압력 → 희생양 총살 → 장관 사임 → 침묵.


권력은 비극을 '몇몇 장교의 개인적 탐욕으로 인한 횡령 사건'으로 축소했다. 책임은 꼬리 자르기로 정리됐다. 최고 권력층은 교활한 방어 기제를 통해 면죄부를 얻었다.

이후 사건은 공적 기억에서잊혀졌더. 국사 교과서에서도 다루는 비중은 미미해졌고, 관련 기록은 파편적이었으며 접근이 어려웠다(일부 자료는 여전히 비공개 상태다). 진실을 증언하려는 이들에게는 사회적 침묵이 강요되었다는 증언이 압도적이다. 전쟁 시기 전후 사회에서 국시화된 반공 이데올로기는 자신들의 부정과 부패를 드러내는 것을 막는 전가의 보도가 되었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자들은 좌익으로 몰렸다.

국가는 죄를 심판하기보다, 진실을 축소하고 기억을 관리했다. 국민의 피가 섞인 진실은 기록되지 않았을 때 가장 안전하게 부패한다. 망각은 범죄를 반복하게 하는 가장 안전한 방패였다.



구조적 착복과 침묵의 이익


이 거대한 비극의 근저에는 조직적인 구조적 착복이 있었다. 지휘부는 '유령 병력'을 허위로 편성하여 군수 물자와 양곡권을 횡령했다.

국회 조사에 따르면, 횡령액은 현금 23억 원과 양곡 5만 2천 섬이었다. 유령 병력에 지급되어야 할 예산 전체가 조직적으로 착복된 것이다.

이것이 청년들이 영하 20도 안팎의 혹한 속에서 굶주린 이유다. 그들은 극심한 기아 속에 "소나무 껍질이나 싱아 같은 식용 풀을 먹으며 버텼다"는 증언을 남겼다. 전염병에 쓰러진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들은 적군의 포화가 아닌, 국가의 시스템적 부패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것이 방위군 사건의 본질이다.

사건은 지휘관 개인의 처벌로 끝났다. 그러나 유령 병력 제도를 묵인하고 부패를 방조한 군과 정부의 제도적 책임은 규명되지 않았다. 수많은 청년의 생명을 담보 잡은 구조적 카르텔은 처벌의 칼날을 교묘하게 피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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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 / 오른쪽 국민방위군사령관 김윤근



오늘도 국민방위군들은 죽어가고 있다


진실은 늦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땅 위로 올라왔다.

2007년,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56년 만에 피해자 박술용의 죽음을 첫 공식 순직으로 인정했다. 국가가 저지른 폭력에 대해 개인의 이름으로 받은 최초의 공식적 사과였다.

2010년, TRC는 최소 5만~8만 명의 희생 규모를 추산하며 국가의 책임을 공식 권고했다. 이는 '단순 횡령 사건'이라는 국가의 프레임을 완전히 부수는 결정이었다.

유해는 땅속의 침묵을 깼다. 영천의 임시 매장 흔적 등은 암매장의 실체를 드러냈다. 함양, 김해 등 여러 지역에서도 표식 없는 매장이 확인되었다. 유해 발굴과 유족 구술 채록은 2025년 현재까지도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진실은 늦게 도착했다. 그러나 정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폭정을 부르는 구조적 유사성


우리가 이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그것은 패턴에 있다.

국민방위군 사건의 패턴: 무능한 시스템 → 은폐/책임 회피 → 유가족에게 고통 전가 → 집단 피로와 망각.

우리는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 현대의 비극에서도 이 구조가 반복되는 것을 목격했다.

국가의 기능 부전이 대규모 희생을 낳았고, 이어진 과정은 책임자 처벌보다 진실 축소와 은폐에 집중되었다.

국민방위군을 굶겨 죽인 '비상 상황 프레임'. 국민을 통제 대상으로만 보는 '권위주의적 논리'. 이들은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 국민 안녕보다 권력 유지를 우선시하는 그 가능성 자체가 위험하다.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통제 논리는 70년 전 구조적 배신과 정확히 같은 궤를 달린다.

이름을 바꾸어도, 결과는 같다. 기억에서 가라지면, 비극은 재현된다.



집단적 면역력: 기억을 제도로 만드는 제안


기억은 단순한 애도를 넘어, 미래의 시민을 지키는 집단적 면역력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기억을 제도로서 남겨야 한다.

특별법 제정: 국가 책임 인정, 배보상 재심사, 공소 시효 중단.

기록과 DB 구축: 관련 공적 기록 전면 공개 및 통합 데이터베이스 구축.

교육 반영 의무: 정규 교과 과정에 사건의 구조적 진실 의무 반영 및 현장 답사/구술 아카이브 활성화.

유해 발굴 상설화: 희생자 유해 발굴 및 추모 사업 상설 기구 운영.

국가 사과 및 예우 표준화: 국가 폭력에 대한 공식 사과와 희생자 예우의 법적 표준 마련.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것들


1,234명과 5만~8만 명. 이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우리의 책임이 지워진 이름들이다.

묻지 않을 수 없다. 영하 20도 안팎 혹한 속에 굶주려 죽어간 8만 청년의 차가운 손. 이 손을 잡지 않고, 우리는 과연 민주주의와 정의를 말할 수 있는가.

기억은 애도가 아니다. 기억은 시민의 가장 강력한 방어선이다.

다시는 같은 역사가 쓰이지 않도록, 우리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며,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또다시 국민방위군들의 유령들이 거리에서 떠돌지 않도록

기억을 되살리고 사과와 처벌을 통해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다시는 재발하지 않을

사회적 제도와 합의를 꾸준히 만들어 가야 한다.


참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보고서 (2010)

국회 회의록 (1951년 부산 임시국회)

당시 언론 보도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민 방위군에 대한 이야기를

세편의 시리즈로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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