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2화 : 국민을 죽음으로 내 몬 권력자들
한국전쟁의 폐허 속, 총 대신 삽과 봇짐을 짊어진 채 죽음으로 내몰린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국민방위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국가는 그들을 지켜주지 않았습니다.
수만 명이 굶주림과 추위 속에 쓰러지고, 책임은 끝내 누구도 지지 않았습니다.
이 연재는 잊힌 죽음의 행렬을 불러내어,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을 따라갑니다.
1화 : 아군의 부패로 죽어간 사람들 "잊혀진 죽음의 행렬"
2화 : 부패와 무능 "국민을 죽음으로 내 몬 권력자들"
3화 : 망각과 기억 " 오늘도 국민방위군들은 죽어 가고 있다"
길 위에서 청년들은 총 한 자루 쏴보지 못하고 추위와 기아에 쓰러졌다. 그렇다면 그 추위와 기아는 어디서 왔는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진짜 원흉은 누구였는가. 그 질문의 답은 전쟁터가 아니라, 권력의 심장부에서 찾아야 했다.
1951년 겨울, 피난 수도 부산의 임시 국회의사당. 한파 속에서 국회는 분노로 들끓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야당 의원들은 단상에 올라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눈밭에 쓰러진 청년들의 참혹한 사진들이 의사당에 내걸리자, 의원들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는 통곡했고, 누군가는 주먹을 쥐고 몸을 떨었다. “전쟁 중에 수만 명이 얼어 죽는 동안, 당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는 질타가 국회 회의장을 메웠다. 이 침묵과 분노의 대면은 비극이 한낱 간부들의 횡령이 아닌, 국가적 규모의 구조적 범죄였음을 드러내는 첫 순간이었다. 그것은 1부의 참혹한 죽음이 권력의 허구 속에서 만들어진 비극임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국민방위군 설치의 명분은 분명했다. 전선이 밀려 내려오자 후방 보급과 전선 지원, 북진 대비를 위해 전국의 청년들을 동원한다는 국가의 거창한 선언이었다. 그러나 그 선언은 허상에 불과했다. 이들의 동원은 병력을 보충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국민방위군 간부들은 청년들의 이름으로 국방부에 허위 보고를 하고, 유령 병력을 만들어 예산과 보급품을 챙겼다. 정부가 지급한 양곡과 피복은 전선으로 보내지 않고, 시장에 팔아치워 개인의 주머니를 채웠다. “국가 명령은 있었으나, 보호는 없었다.” 굶주린 청년들을 위해 내려온 배급은 장부 속 숫자로만 존재했다. 명분은 있었으나 실체가 없는 유령의 군대. 그들의 죽음은 이미 장부 위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부패의 뿌리는 깊었다.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을 비롯해 부사령관 윤익헌 등 지휘부는 물론, 전국의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조직적으로 횡령에 가담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족과 재산을 불리는 데 혈안이 되어, 수십만 청년의 목숨을 외면했다. 사건의 윗선에는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있었다. 그는 국민방위군을 지휘하는 최고 책임자였으나, 이 사태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은 회피했다. 군내 파벌 싸움과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은 끊이지 않았다. 국가 권력의 탐욕과 무능이 곧 수만 명의 청년들에게 내려진 사형선고였다. 그러나 진정한 권력의 최고 정점은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다.
이러한 참혹한 실상은 국회와 언론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세상에 드러났다. 1951년 국회는 긴급 진상조사단을 구성해 전국의 국민방위군 집결지를 조사했다. 조사단은 “보급이 아닌 방치”라는 충격적인 보고서를 발표했다. 특히 야당 의원이었던 엄상섭은 이 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치며 국민의 분노를 대변했다. 그와 함께 언론도 침묵하지 않았다.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등 당시 언론들은 눈밭에 쓰러진 방위군들의 비극을 연일 폭로하며 정부의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당시 언론의 보도는 정부의 검열과 통제로 인해 많은 부분이 축소되거나 왜곡되었고, 이 사건의 진실은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분노한 국민을 달래기 위해, 그리고 권력의 책임을 은폐하기 위해 지휘부 몇 명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1951년 8월,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등 지휘부 5명이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다. 이들은 국민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정치적 희생양이었다. 진실은 묻히고, 수만 명의 죽음은 단지 몇 명의 처벌로 덮어졌다. 당시 이승만 정권의 구조적 무능과 최고 권력층의 책임은 끝내 규명되지 않았다. 국민을 지키는 군대가 아니라, 국민을 삼켜버린 권력이었다. 이 사건은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가 나오기까지 반세기 넘는 시간 동안 집단적 망각 속에 묻혀 있었다.
이 참혹한 사건은 우리에게 묻는다. 국민방위군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 진정 혹한의 추위였는가. 아니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권력자의 부패와 탐욕이었다.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할 국민이 권력의 탐욕에 의해 희생되는 장면을 우리는 지금도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세월호의 침몰, 이태원의 참사, 반복되는 국가의 무능과 책임 회피. 국민방위군의 비극은 70년 전의 과거사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오늘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망각은 범죄를 반복하게 한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단순히 전쟁의 참극을 넘어, 무능과 부패가 한데 엉켜 국민의 목숨을 앗아간 구조적 범죄였다. 기억은 집단적 면역력이며, 기록은 시민의 의무다. 다음 회에서는 망각 속에 묻혔던 잊힌 죽음의 흔적을 좇으며, 그들이 오늘 우리에게 남긴 기억의 숙제를 짚어볼 것이다.
참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보고서 (2010)
국회 회의록 (1951년 부산 임시국회)
당시 언론 보도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민 방위군에 대한 이야기는
세편의 시리즈로 부정기적으로 연재됩니다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