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국민 방위군 "잊혀진 죽음의 행렬" 1

시리즈 1화 : 아군의 부패로 죽어간 사람들

by 여운


한국전쟁의 폐허 속, 총 대신 삽과 봇짐을 짊어진 채 죽음으로 내몰린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국민방위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국가는 그들을 지켜주지 않았습니다.
수만 명이 굶주림과 추위 속에 쓰러지고, 책임은 끝내 누구도 지지 않았습니다.
이 연재는 잊힌 죽음의 행렬을 불러내어,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을 따라갑니다.

연재 목차소개


국민 방위군 " 잊혀진 죽음의 행렬"

1화 : 아군의 부패로 죽어간 사람들 "잊혀진 죽음의 행렬"

2화 : 부패와 무능 "국민을 죽음으로 내 몬 권력자들"

3화 : 망각과 기억 " 오늘도 국민방위군들은 죽어 가고 있다"





아군의 부패로 죽어간 사람들 "잊혀진 죽음의 행렬"


칼날 같은 바람이 폐부를 찔렀다. 1951년 겨울, 영하 20도를 오가는 혹한 속에서 청년들이 걷고 있었다. 그들은 군인이었지만 군인이 아니었다. 손에 든 것은 총이 아니라 허름한 봇짐이었고, 입은 것은 군복이 아니라 덧댄 옷가지뿐이었다. 낡은 담요 한 장에 의지한 채, 그들은 문경 이화령 고갯길을 넘고 있었고, 삼천포 교육대 막사를 향하고 있었다. 길 위에는 문경의 눈 덮인 고갯길을 넘다 쓰러져 얼어붙은 이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누군가는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졌고, 누군가는 그대로 주저앉아 더는 일어나지 못했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바닥에 깔린 얼음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마치 이 허망한 행렬의 마지막을 알리는 비명처럼 들렸다. 한 생존자는 70년이 지난 후에도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그 겨울의 공포를 담고 있었다. “식사는 주먹밥 하나, 반찬은 소금국뿐이었다. 썩은 고구마 조각이나 소나무 껍질을 씹어 허기를 채웠지만, 그것마저도 며칠 지나지 않아 바닥났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떨궜다. “추위와 배고픔도 고통스러웠지만, 눈밭 위에서 병들어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는 게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앞서 가던 동료가 털썩 쓰러지면 우리는 그를 일으킬 힘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때 우리는 그저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단 하루라도 따뜻한 밥을 먹고 싶었습니다.”



허망한 죽음들

이 허망한 죽음은 총탄에 맞아 쓰러진 전사자가 아니라, 굶주림과 추위에 쓰러진 죽음이었다.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죽어간 것인가. 총 한 번 쏴보지 못한 청년들의 비극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국민방위군은 한국전쟁의 비극이 절정에 달했던 1950년 12월,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공포되면서 탄생했다. 17세부터 40세까지의 청장년 약 68만 명을 후방 보급 및 전선 지원을 명목으로 동원했다. 국가의 명분은 그럴싸했다. 전선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민간의 병력을 총동원해 전세를 뒤집겠다는 국가적 결의처럼 보였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 군대는 전시 동원이라는 급박한 상황을 핑계로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무작정 청년들을 불러 모았다. 군번도, 계급도, 하다못해 기본적인 병력 관리 시스템조차 갖추지 못한 허술한 조직이었다. 오직 숫자로만 존재하는 유령 같은 군대였다. 그들은 그저 행정서류상의 병력이었을 뿐,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국민이자 개인이 아니었다.



330px-국민방위군_징집자들.jpg 국민방위군 징집자들



죽음의 행렬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들은 전장에서 싸우기도 전에 기아와 추위에 시달렸다. 간부들이 빼돌린 식량과 피복은 지급될 리 만무했다. 하루에 주먹밥 한 덩이, 심지어 그것마저 받지 못하는 날이 허다했다. 겨울인데도 담요 한 장 없이 그대로 행군을 이어갔다. 학계와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과정에서 최소 5만 명에서 최대 8만 명의 청년이 아사, 동사, 또는 병사했다고 추산한다. 이는 군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사망자 수 1,234명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믿기 힘든 숫자였다. 이들은 총탄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추위와 기아라는 보이지 않는 적에 무너져 내렸다. 집단 아사 사건은 흔한 비극이었다. 이화령을 넘어 문경착을 지나며 죽을 고생을 했다는 증언처럼, 길 위는 말 그대로 시체가 쌓인 지옥이었다. 삼천포 교육대 막사에서는 얇은 옷으로 떨던 청년들이 발진티푸스에 쓰러져 공동묘지에 묻혔다. 한 생존자는 잊지 못할 증언을 남겼다. "길이 꽁꽁 얼어붙었는데, 시체 위를 밟고 걸어야 했습니다.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밟고 가는, 그런 행군이었지요. 그 지옥 같은 풍경은 평생 잊히지 않을 겁니다." 그들의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국가가 방치하고 횡령이 만들어낸 살인이었다.


이들은 결코 전투에서 싸우다 죽은 것이 아니다. 적군과 총칼을 맞대고 싸우다 쓰러진 영웅이 아니다. 그들은 후방에서 보급을 돕고 전선을 지원하기 위해 동원된, 어쩌면 전쟁과는 가장 거리가 먼 청년들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국가가 제공하지 않은 식량과 의복, 그리고 간부들의 극심한 횡령이 만들어낸 인재였다. "적의 총이 아니라, 아군의 부패가 이들을 죽였다."라는 말이 절절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이 비극의 배후에는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무능하고 부패한 간부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족과 재산을 챙기느라 수십만 청년들의 목숨을 외면했다. 그들의 탐욕은 수만 명의 시신을 낳았다.


무능한 정권, 국민을 착취하고 죽음으로 내 몬 국가

그리고 이 비극을 알면서도 방치했던 무능한 정치권이 있었다. 1951년 1월, 국회 조사단이 이 참혹한 실상을 폭로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려 했다. 국민의 분노가 들끓자 신성모 국방장관을 사임시키고, 국민방위군 지휘부 5명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으로 사건을 덮으려 했다. 그러나 사건의 본질적 책임, 즉 이 비극을 가능하게 한 구조적 무능과 최고 권력층의 방치는 그대로 남았다. 그저 정치적 희생양 몇 명을 총살하는 것으로 국민을 속이려 했을 뿐이다. 국민을 지키는 군대가 아니라, 국민을 삼켜버린 군대였다.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는가. 전쟁의 혼란 속에 잊힌 수만 명의 청년들. 그들의 시신은 이름 없이 흙 속에 묻혔고, 그들의 삶은 한낱 기록으로만 남겨졌다. 역사는 잊힐 때 반복된다. 이 비극의 책임은 단지 몇몇 부패한 간부들의 몫이 아니었다. 이 허망한 죽음의 배후에는 부패와 권력의 무능이 있었다. 다음 회에서는 이 죽음을 가능하게 한 부패와 권력의 무능을 직시할 것이다.


참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보고서 (2010) 경향신문, 한겨레 등 언론 보도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금관의 예수 - 새로운 연재를 준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