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의 예수 - 새로운 연재를 준비하며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by 여운
이 글은 다음 주부터 연재 예정인 [금관의 예수 - 오 주여 이제는] 글의 내용을 압축하여 쓴 글입니다. 목차와 연재물의 내용을 유추할 수 있도록 내용을 압축하여 정리했습니다.
십자가를 무기와 권력으로 삼고,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을 금관을 씌워 박제해 놓고 자신들만의 바벨탑을 쌓아 온 일부 한국기독교와 지도자들은, 번영신학과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극우화의 길을 걷고 드디어 십자가 대신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서 혐오의 탑을 높이 쌓아 올리고 있습니다, [금관의 예수]는 단순한 고발을 위함이 아니고 회개와 갱신을 위한 간절한 기도입니다. 24회로 예정된 글을 압축하여 소개합니다. 함께 회개와 갱신의 기도에 함께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가시관을 쓰신 예수에게 누가 금관을 씌웠나?


김민기의 노래 《금관의 예수》가 던지는 질문은 오늘도 유효하다. "누가, 언제 가시관을 쓰고 죽어간 예수에게 누가 금관을 씌웠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권력을 거부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이, 어느 순간부터 권력의 정점에 앉아 금관을 쓰고 계신다.


한국교회의 역사는 곧 한국사회의 영적 뿌리다. 일제강점기 수난의 신앙에서 출발한 한국교회는 해방 후 급속히 성장했지만, 그 과정에서 권력과 부의 유혹에 굴복했다. 교회의 문제는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사회 전체의 영적 위기로 이어졌다.

이것은 교회의 문제를 넘어서 한국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전체에 깊이 연결된 문제다. 교회가 권력과 결탁할 때 사회의 견제 장치가 약화되었고, 교회가 혐오를 설교할 때 사회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반대로 교회가 예언자적 소리를 낼 때 사회 개혁의 동력이 되었고, 교회가 소외된 이들과 함께할 때 사회 통합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 글은 고발서가 아니다. 이것은 회개의 서사다. 타락의 역사를 직시하되, 그 안에서도 살아 숨 쉬는 회복의 불씨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다시 듣기 위한 순례다.



1부 : 십자가 대신 태극기

권력과의 결탁

해방 후 한국교회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일제강점기 수난의 신앙을 계승하며 민중과 함께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권력과 손잡을 것인가. 안타깝게도 많은 교회가 후자를 선택했다.


서북청년회와 보도연맹 학살 현장에는 목사들의 축도가 있었다. 반공을 위해서라면 폭력도 정당화되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증오가 합리화되었다. 십자가 앞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가르치던 그 입으로,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고 외쳤다.


국가조찬기도회의 등장은 상징적이었다. 권력자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모양새였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도구로 전락시킨 것이었다. 기도는 권력의 장식품이 되었고, 교회는 권력의 시녀가 되었다.

부흥과 번영의 달콤한 유혹


60-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 성장은 십자가의 복음이 아닌 번영의 복음에 기초했다. "열심히 믿으면 잘 살게 된다"는 메시지가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형교회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목사는 성공한 CEO가 되었다. 강남 땅값이 오르듯 교회도 성장해야 했고, 성공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포장되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막 8:36)라는 예수의 경고는 어느새 잊혔다.


초대형교회들이 강남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십자가는 여전히 교회 첨탑에 있었지만, 그 아래 성전에서는 금송아지 숭배가 벌어지고 있었다. 교회는 성공의 상징이 되었고, 신앙은 성공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2부 : 순응과 저항 그 사이

교회의 양면

군사독재와 민주화의 격동기에서 한국교회는 두 얼굴을 드러냈다. 한편에서는 권력에 아부하며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교회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예언자적 소리를 내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교회들이 있었다.

어떤 목사들은 청와대에서 축도하며 독재정권의 정당성을 빌어주었다. 반면 어떤 목사들은 감옥에서 고문당하며 민주주의를 위해 기도했다. 같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분열된 신앙

이 시기 한국교회의 분열은 단순한 정치적 견해차를 넘어섰다. 그것은 신앙 자체에 대한 이해의 차이였다. 신앙을 개인의 구원과 내세의 복으로만 이해하는 교회와, 신앙을 이 땅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실천으로 이해하는 교회 사이의 갈등이었다.

안타깝게도 전자가 다수였다. 대부분의 교회는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며 현실도피적 신앙을 가르쳤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니, 교회는 세상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왜곡이었다.


3부 : 거대함의 몰락과 작은 것의 시작

시장 논리에 잠식된 성전


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에 교회는 완전히 시장 논리에 잠식되었다. 교회는 종교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 되었고, 신자는 고객이 되었다. 목회는 마케팅이 되었고, 설교는 상품이 되었다.

대형교회들은 더욱 거대해졌다. 수만 명이 모이는 예배당, 수백억 원의 건축비, 연예인 못지않은 스타 목사들. 교회는 스펙터클을 추구했고, 신앙은 감정적 소비가 되었다. "골방에 들어가 은밀하게 기도하라"(마 6:6)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목회자들의 세속적 스캔들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금권, 성추행, 독재적 교회 운영. 십자가를 진 종이 아닌 금관을 쓴 왕들의 치부가 드러났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 아니라, 세상보다 더 짠 존재가 되어버렸다.


작은 공동체의 실험

하지만 이 시기에도 희망의 싹은 자라고 있었다. 거대한 교회 시스템에 실망한 사람들이 작은 공동체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가정교회, 공동체교회, 대안교회라는 이름으로 소박한 신앙 공동체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성장보다는 성숙을, 성공보다는 섬김을, 건물보다는 관계를 추구했다. 여전히 소수였지만,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기 시작했다. 십자가의 의미를 되찾으려는 작은 움직임들이었다.


4부 : 타락의 심연과 회복의 불씨

혐오와 배제의 종교


오늘의 한국교회는 전광훈으로 대표되는 극우화 현상의 한복판에 있다. 코로나19 집단감염의 진원지가 되었던 사랑제일교회, 광화문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혐오를 설교하는 목사들. 교회는 사회 통합의 구심점이 아니라 분열의 진원지가 되었다.

성소수자 혐오, 이주민 배척, 여성 차별이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되었다. 사랑을 가르쳐야 할 교회에서 증오의 언어가 넘쳐났다. 복음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전락했고, 예수는 극우 정치인의 얼굴을 하게 되었다.


여전히 살아 있는 희망

하지만 절망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 타락의 심연 속에서도 회복의 불씨는 살아 있다. 전국 곳곳에서 지역 공동체를 섬기는 작은 교회들,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목회자들, 젊은 세대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신앙 공동체들이 조용히 자라고 있다.

이들은 거대한 부흥을 꿈꾸지 않는다. 대신 한 명 한 명과 진실한 관계를 맺고, 일상에서 복음을 실천하려 한다. 화려한 예배당은 없지만,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고민한다. 수천 명의 교인은 없지만,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려 한다.


회개의 서사를 향해

이 연재 전체는 단순한 역사 정리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어떻게 십자가에서 금관으로 길을 잃었는지를 추적하되, 동시에 다시 십자가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작업이다.

우리는 교회의 타락을 단죄하되 스스로를 의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 교회의 죄는 곧 우리의 죄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회개는 곧 우리의 회개여야 한다.

금관을 쓴 예수는 우리가 만들어낸 우상이다. 진짜 예수는 여전히 십자가에 계신다. 가난한 자들과 함께, 소외된 자들과 함께, 아픈 자들과 함께 계신다.


226432_83966_4858.jpg 성조기와 이스라엘국기 그리고 태극기가 공존하는 기묘한 기독교 시위장면




프롤로그부터 24회까지, 이 연재는 한국교회 80년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회개의 여정이다. 해방 후 권력과의 결탁부터 오늘날 극우화 현상까지, 우리는 교회가 어떻게 길을 잃었는지를 냉정하게 직시할 것이다. 동시에 그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작은 빛들을 찾아낼 것이다.


제1부에서는 해방 이후 권력과 결탁한 교회의 원죄를 다룬다. 서북청년회의 폭력, 보도연맹 학살, 그리고 국가조찬기도회로 이어지는 권력 친화적 신앙의 뿌리를. 산업화와 함께 피어난 번영신학과 강남 대형교회들의 등장까지. 타락의 씨앗이 어떻게 뿌려졌는지를 추적한다.

제2부는 군사독재와 민주화 과정에서 갈라진 교회의 양면성을 조명한다. 권력에 순응하며 기득권을 유지한 교회들과, 예언자적 소리를 내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교회들. 같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정반대의 길을 걸은 교회들의 이야기다.

제3부는 신자유주의 시대 교회의 소비자화를 다룬다. 90년대 이후 시장 논리에 완전히 잠식된 교회, 스펙터클을 추구하며 거대해진 대형교회들, 그리고 그 안에서 터져 나온 목회자들의 세속적 스캔들들. 동시에 이 시기 시작된 작은 교회들의 대안 실험도 함께 조명한다.

제4부는 오늘의 현실이다. 전광훈과 한기총으로 대표되는 극우화 현상, 혐오와 배제의 언어가 신앙으로 포장된 현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지역과 세대를 넘나들며 진정한 공동체를 세우려는 작은 교회들의 실험은 계속되고 있다.



금관을 벗어던지고

이 모든 여정의 목적은 하나다. 금관을 쓴 가짜 예수를 버리고, 십자가의 진짜 예수를 다시 만나는 것이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 한국교회는 온 천하를 얻으려다 제 영혼을 잃었다. 이제는 영혼을 되찾을 때다.


회개는 과거를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바꾸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회개는 한국사회의 영적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교회가 다시 십자가로 돌아갈 때, 사회도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오 주여, 이제는 금관을 벗어던질 때입니다. 오 주여, 이제는 십자가로 돌아갈 때입니다. 오 주여, 이제는 회개할 때입니다.


"누가 가시관의 예수에게 금관을 씌웠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 당신을 초대한다. 고발이 아닌 회개로, 절망이 아닌 희망으로, 분열이 아닌 치유로. 함께 걸어보자, 십자가로 돌아가는 길을.



브런치 북 [금관의 예수] 는 내일 9월2일 화요일 부터 연재 예정입니다,

예정된 분량과 내용대로 연재가 진행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혹시나 연재 과정중 목차와 내용이 일부 수정이 된다면 그것은 보다 좋은 저술을 위한 지속적인 교정과 수정의 작업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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