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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 May 26. 2020

강제적 종교개혁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With Covid19

 크리스천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좋은 일에도 인도하심이 있으며, 좋지 않은 일에도 더 나은 인도하심이 감춰져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그 섭리하심의 큰 뜻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이해할 수 있을 때가 많다는 것이 무척이나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좀 더 빨리 이해하고 좀 더 깊이 깨달았더라면...... 

 그러나. 잠잠히 생각해 보면 그 크고도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나의 생각이 짧거나 지식이 부족해서 혹은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하나님의 그 깊은 뜻을 조금이나마 느끼는 순간 우리의  부끄러움을 통해 우리와 교통 하시고 계십니다. 

 항상 무지한 우리는 모든 것을 되돌려 기억해 보아야만 일일이 간섭하는 그분의 세밀한 손길임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기에 

그분은 코로나 19와 같은 구체적인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끝없는 겸손과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아득함을  깨우쳐 주시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19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이것 또한 조만간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인간의 문명과 기술은 그 어떠한 난관도 극복해왔고 특히나, 한국인들에게는 고난을 극복하는 유전자가 각인되어 있다고 믿으며, IMF를 이겨 낸 것처럼,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것처럼,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낸 것처럼  조만간 모든 것을 다시 되돌릴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확진자의 숫자가 늘어나고  종식되어 간다고 방심하는 순간 또다시 확산되는 코로나 19 앞에 우리나라는 물론 우리가 알던 선진국들은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 만난 코로나 19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관성을  무자비하게 깨뜨려 버리고 순식간에 모든 일상을 멈추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지구는 지금 , 산업혁명 이후
가장 한가한 나날을
보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도에서는 30년 만에 히말라야 산맥이 보인다고 하고 우리나라에는 미세먼지 없는 봄이 왔습니다.

인도에는 홍학 떼가 아파트 단지 앞 호수를 장악했고 학교는 텅텅 비어 있고 거리에는 차들이 줄었습니다. 

오월의 푸른 햇살을 오랜만에 느껴보았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우리 교회의 공적 예배가 멈추고 처음 드린 온라인 예배에 우리 목사님이 주신 말씀의 제목입니다.

 멈춰 서라.

 인도에서 히말라야 산맥이 보이는 것은 원래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미세먼지 없는 봄이 원래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세계였음을  돌이켜 생각하게 만드는 일들이 우리 앞에 펼쳐졌습니다.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 19는 우리의 습관과  모든 관성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며칠간, 당분간, 혹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회복되고 일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사람들의 막연한 믿음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어느새 우리는 학교에 가지 않는 봄날을 보냈고, 햇발 같은 어린아이들이 마스크를 끼고 유모차에 앉은 모습이 익숙해지고 어디서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간격을 벌리는 것에 익숙해지는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이전과 이후는 너무나 많은 것이 달라져야 한다고 하고 코로나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학적으로 코로나를 퇴치하고 종식을 선언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번 코로나가 만들어낸 생활의 변화는 어쩌면 앞으로도 "함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After Covid19 가 아니라 With Covid19


 잔인하지만 이번 코로나는 우리 인간의 쌓아 올린 부끄럽고 어두운 곳을 낱낱이 그리고 정확히 공격했습니다. 신천지가 그러했고 정통이라 일컬어지는 교회들을 덮쳤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태원으로 대변되는 음란과 퇴폐의 민낯을 드러내었습니다.

 

 미혹하는 영들은 엄연히 대낮에 활보하고 그 세력을 엄청나게 키워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정통교단이라 일컬어지는 한국교회들이 써나가던 성공신화의 어두운 이면도 같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이단의 세력은 정통교회들과 더불어 썩어가고 그 종양의 범위는 크고도 놀라웠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이단에 사로잡히고 사회가 이단으로부터 고통받는 장면들을 어쩌면 책임 있는 기독교 인들이 짐짓 무시해 왔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역시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이런 것들이 세세히 드러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세습과 불의, 물질과 세속에 깊숙이 뿌리내린  한국교회는 많은 세월 동안 양적 성장과 관습에 얽매여 커다란 매머드가 되어왔으며, 이런 교회와 신앙인들로 인해 한국교회 전체가 민족의 미래를 밝히지 못하고 오히려 지탄받는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이번, 코로나는 그 지점을 건드리고 , 다중이 집합하여 예배드리는 전통적인 한국 교회의 예배 형태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한국 교회를 정면으로 멈춰 세우셨습니다.


 절대적 빈곤을 극복한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와 다원화의 사회로 진입한 듯 보입니다.  

자본주의의 극단적인 대립과 독점, 착취와 억압에 대한 대안을 다양성의 인정에서 찾고자 했고 우리 사회는 어느 정도 배타성을 버리고 다원의 사회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졌습니다. 대한민국 어느 시골에 가도 베트남 며느리와 필리핀 엄마를 가진 아이들이 있습니다.  어느새 인가 도심을 걸어가노라면 외국인들이 너무나 자연스레 우리의 거리에서 같이 걸어가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직업이 다양해졌고 삶의 양태가 다양해졌습니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아버지. 가정을 돌보는 어머니의 상을 이제는 유일하고  보편적이라 하지 않습니다. 

 속도와 경쟁에 단련된 사회는 우리가 인정하기도 전에 이미 진리의 다양성 조차 시나브로 인정해 버렸습니다.


 그 틈을 타고 한국사회의 성소수자의 문제는 본질을 벗어나 다양성으로 이해되고 양성화해야 되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었습니다. 

 다원화 사회는 진리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다양성과 인문 즉, 사람의 무늬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배려와 이해의 문제였지만 성소수자를 비롯한 일부의 아픈 송곳들은 다양성을 빌미로 진리의 다양성을 인정받는데 까지 이르렀던 것 같습니다. 변화해야 하는 것과 타협이 되지 않는 것들이 혼재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지켜야 할 진리는 어쩌면 모호해지고. 비타협적인 진리를 지켜오면서 만들어진  시대적 방법과 수단이 오히려 진리의 중심으로 받들어지는 현상이 벌어졌는지도 모릅니다.

 

지킬 것과 변화해야 할 것의 구분이 무너진 시대

 

7,80년대 한국교회의 성장신화 뒤에는 한국사회의 급속한 자본주의로의 이전 과정, 그 속에 농촌의 해체와 이촌향도의 사회적 현상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언제인가 부터 한국교회는 이때의 성장의 방법과 방식을 유일한 경전처럼 지켜오며 변화된 시대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왔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사회의 지도자적 지위에서 사회의 지탄이 받는 집단으로 전락하고 있는 교회.  

우리가 일단 멈춰 서야 할 이유입니다.


 코로나 이전부터 대형 교회의 세습을 둘러싼 사회적 인식과 교회의 태도,  대형화를 거듭하며 진정한 공동체성을 상실케 하는 매머드 교회, 목회자들의 일탈과 정치적 탈선등 교회는 어쩌면 이 사회의 등불이 아니라 골칫덩이가 되어 가고 있었는지 도 모릅니다.


 코로나는 우리의 일상적인 예배를 빼앗아 갔습니다.

공적 예배의 집합을 불허했고, 악수하고 안아주던 스킨십을 금지시켰습니다. 식탁의 교제를 거두어갔고 공동체의 친교를 막아세웠습니다.

 박해도 아니고 탄압도 아닙니다. 우리는 지하교회로 숨을 수도 없고 이스라엘을 떠나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떠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코로나는 교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임에는 분명합니다.

멈춰 서서 잠잠히 고요하게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한국교회가, 세계교회가 지금 서 있는 우리의 자리를 바라보고 회개를 시작해야 합니다.


공적 예배를 멈추게 하고 혹은 사회적 거리를 두고 앉아서 마스크를 끼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열정적인 찬양과 간구하는 기도를 멈춰야 합니다. 과연, 언제까지 일까요.


 강제적인 종교개혁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것들을 주님이 일일이 멈추고 세워서 보여주십니다.

히말라야 산맥이 보이고 미세먼지가 없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실낙원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맹목적으로 지켜왔던 예배의 형식과 자세에 대해  감사하게 하시고, 

코로나 이후 새 술을 담을 새 부대를 준비하라 하십니다.

  우리가 진리로 알아왔던 관습적인 신앙의 뿌리조차 흔드시면서 처음으로 돌아가라 하십니다.

코로나를 극복하는 것, 우리의 신앙의 근본을 다시 돌이키게 하는 계기를 주셨습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목회자를 목회자답게. 크리스천을 크리스천답게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는 등한시하고 물질문명의 바벨탑을 끝없이 쌓아 올리고

목회자와 이단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일들이 횡횡하고 교회가 진리의 비타협성을 지켜 내려 노력하지 않는 한

코로나 19는 어쩌면 영원히 우리와 동행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히말라야 산맥이 보이는 하나님의 낙원, 미세먼지가 없는 티끌 없이 맑은 하나님의 나라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곳

 Afetr Coivd19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때까지 아마 우리는 코로나 19와 길고도 불편한 동거를 계속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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