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가인, <노랫가락 차차차> 그리고 유산슬
요즘 대세 중 한 명의 젊은 트롯 가수가 Tv에서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 늙어지면 못 노나니~"
<노랫가락 차차차>를 멋들어지게 트롯으로 편곡해서 부른다.
그야말로 트롯의 화란춘성 만화방창(花蘭春城 萬花方暢)의 시절이 도래했다.
<미스 트롯>의 성공과 송가인의 발굴은 대한민국을 순식간에 트롯 열풍으로 몰아넣었다. 케이블 Tv는 물론, 공중파를 비롯한 모든 프로그램을 트롯이 점령했고, 여세를 몰아 트롯 가수들은 모든 예능을 점령하고 있다.
매스미디어의 잔인한 독점 앞에 대중음악의 숙명이야 말할 것 없겠지만, 최근 모든 매체는 우리들에게 일말의 음악적 선택권조차 앗아가 버리는 것 같다.
Tv만 틀면 힙합이 채널을 점령하던 시절이 바로 엊그제였으며, "당신의 아이돌에게 투표해"달라는 유혹을 받은 것 역시 얼마 전의 기억이다.
그런데, 어느 날 모든 것이 트롯으로 바뀌고 말았다.
송가인은 트롯이 그간 넘지 못했던 트롯의 벽
트롯의 퀄리티를 높여주었다.
밤무대를 전전하거나. B급의 전유물과 같이 술 한잔 마시고 소비하는 음악으로 여겨지던 트롯은 중앙대 국악과 출신의 정통 국악인 송가인을 통해 천박한 이미지를 씻어냈다. 또한, 경연을 거치며 다양한 휴먼스토리와 함께 '부끄럽지 않게 향유'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음악으로 거듭났다.
비슷한 과정을 겪었지만 힙합은 경연이 거듭될수록 "다양한 주작과 논란"에 쌓였지만 오히려 저급하다 여겨진 트롯에서 건져 올리는 다양한 삶의 이야기는 장르를 우리들 삶의 전면으로 끌어올렸다. 아이돌 경연 역시 비슷하다.
이점은 같은 경연의 과정은 트롯이 대중들에게 "대 놓고 좋아하기 어려운 부분을 어쩌면 당당하게 만들어주는 계기"로 만들어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극적인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 술 먹고 망가져서 몰래 즐기던 음악에서 당당히 즐기는 음악으로 극적인 신분상승을 이루었다"
이야기를 되돌리자면 <노랫가락 차차차>란 노래는 과거 시절 금기의 영역이었다.
특히나, 공중파에서는 절대로 들리지 않는 민요가락이었다.
<노랫가락 차차차>는 본래 경기민요로 조선 말기에 불리던 곡이다. 이 곡이 1940년 이화자의 곡으로 음반으로 출시되고 우리가 아는 신민요 풍으로 불리는 것은 1960년대 황정자의 곡이라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젊어서 일하지 않고 놀자고 권하는 퇴폐적인 가사는 박정희 시절 새마을 운동에 정면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그 후, 언젠가부터 공중파에서는 들을 수 없는 곡으로 기억되었던 곡.
김영일 작사, 김성근 작곡
노래 황정자 "노랫가락 차차차" 1963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은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오 달도 차며는 기우나니
인생은 일장춘몽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은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오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얼씨구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화란춘성 만화방창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차차차 차차차
가세 가세 산천경개로 늙기나 전에 구경가세
인생은 일장의 춘몽 둥글둥글 살아나 가자
얼씨구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춘풍 화류 호시절에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차차차 차차차
내 기억 속에 <노랫가락 차차차>는 늦은 저녁 동네 어귀 작부가 있던 선술집에서 흘러나오던
애들은 근처에도 얼씬 하지 말아야 할 곳에서 흘러나오던 노래였다.
어쩌면 나 역시 이곡을 자체 검열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머릿속에 트롯은 이런 음악이었다.
거기다 엔카에 잇닿은 족보라니.
이 열기에다 유산슬은 기름은 끼얹었다.
"놀면 뭐하니"는 유산슬을 통해 B급 정서를 전면으로 끌어올리고 요즘 세대들에게 새로운 의미의 "트롯의 향유법"을 제공했다.
순식간에 뚝딱 작곡해 내는 작곡가 편곡자. 그리고 작사가. 몇시간 만에 만들어 버리는 뮤직비디오의 장인들을 등장시켜 즐겁게 트롯을 즐기는 방법을 제시했다.
동전 노래방 레퍼토리에 당당히 트롯곡들을 등장시켰다.
쿠엔티 타란티노의 초기작. 300의 패러디 영화 "미트 더 스파르탄" " 지구를 지켜라"가 한꺼번에 몰려드는 듯한 기분.
저급한 B급 문화를 전면으로 끌어올리고 적당한 희화화와 의미를 부여한다.
적어도 김태호 Pd가 만든 유산슬은 "트롯"열풍에 숟가락을 얹은 것이 아니라. 트롯 열풍을 통해 B급 정서를 전면으로 끌어올리고 관료화된 사회를 조롱한다.
그러나. 어찌 됐던 유산슬은 트롯 열풍에 폭발적인 기름을 끼얹었다.
(물론, 유산슬에 대해 이렇게 일방적인 평가를 할 수 없다. 이 이야기는 다음 지면을 기약하면서)
이제, 트롯은 갖출 것을 다 갖추었다.
시골 장터에서 지방 특산물 축제에서 막걸리 한잔에 얹어 즐기던 트롯이
회식의 마지막 자리에 가서야 한껏 취한 채 노래방에서 불리던 트롯이
이제는 명실상부 음악시장의 전면에 떠올랐다.
젊어서 힘 있을 때 조금이나마 더 놀자는 퇴폐적 가사를 당당히 부르며
정통 국악 클래식을 설립한 젊은 찐 가수들이 대거 등장하고
B급이면 B급대로 즐기고 누가 나의 음악적 취향을 간섭하느냐 맞서는
트롯의 전성시대
적어도 한동안은 각종 매체들은 이 모든 것들이 식상해질 때까지
소비하고 끝없이 소모할 것이다.
트롯의 전성시대
그 뒤꼍을 돌아보면 몇 가지 두려움이 생긴다.
어차피 대중음악은 소비되고 버려지는 음악이지만. 한 시대의 정서를 대변한다.
2020년 어드메쯤 생애 전성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생의 음악이 아마도 "트롯"이 될 것이다.
트롯의 정서가 가볍다 천박하다 이런 문제제기가 아니다.
문제는 대중매체들의 상업적 논리는
점점 더 우리의 다양성의 선택을 빼앗아 간다는 것이다.
가벼운 음악, 무거운 음악, 진지한 음악, 천박한 음악. 쓰고 버리는 음악.
평생을 함께 하는 음악이 공존해야 한다.
트롯의 독과점은 공포다.
송가인 이어라 까지 딱 좋았다.
미스트 트롯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복제가 두렵다.
트롯의 행보는 창의적이지만 끝없는 자기 복제를 한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멜로디에 어디서 들어본 듯한 가사가
트롯에서는 더 훌륭한 곡 구조이다.
자기 복제.
정말 우리에게 음악은 날마다
"니가 왜 여기서 나와" 라 감탄할 수 있는
다양성과 창조적 실험이어야 한다.
창의적 복제를 그만두고
창조적 실험에 대중매체, 방송국들이 나서라 요구하는 것은
정녕 무리일까?
그러나. 나는 이 정글 같은 대중매체들 사이에서 간혹 도드라져 올라오는
<슈퍼밴드> <비긴 어게인>의 소소한 노력들에 위안을 얻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대중매체, 방송에 의해 우리의 정서가 순식간에
점령당하는 시대를 얼마나 더 살아야 하나.
다원화된 사회 다양한 음악이 우리 사이에 공존하는 이데아는
정녕 자본주의 음악시장 아래 불가능한 미래 일까.
나는 오늘도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이 삭만한 트롯의 점령지에도 새로운 음악이
싹트고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글을 맺으며
창의적 복제란 말과 창조적 실험이란 용어를 적어 놓고 보니, 나영석과 김태호 Pd가 오버랩되어 보인다. 나는 적어도 창조적 실험자 김태호의 영원한 찐 팬이다.
또한, 나 역시 감정이 무장해제되면 "무정부르스"와 " 전선야곡"을 부르며 한풀이를 하는 것은 안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