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부재를 무엇으로 보상받으려 하는가?
며칠 전 방영된 TV 프로그램 '개는 훌륭하다'의 보더콜리 코비와 보호자 가족 이야기가 뜨겁다.
보더콜리를 키우기에는 협소한 아파트에서 예민하고 입질이 심한 코비와 또 다른 보더콜리 담비를 입양한 가족, 훈련사는 처음부터, 간곡하게 담비의 입양을 권유했지만. 견주들은 따르지 않고 결국은 훈련을 중단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방송 후 '무지한 모녀에 대한 질타' '훈련사에 대한 존중 결여' 등을 지적하는 다양한 글들로 후폭풍이 이어지고 있다.
엄마 보호자는 코비가 딸과의 관계를 회복해 주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코비가 외로울까 봐 또 다른 보더콜리 담비를 입양을 결심했다고 한다.
TV를 본 사람들은 누구나 눈치를 챘겠지만. 이 가정은 불안해 보인다. TV 속에 나타나지 않은 아빠는 폭력적이거나 최소한 소통의 방법을 모르는 사람으로 보이며, 딸 역시 가족과의 소통이 없었다. 엄마는 그러한 안정적이지 않은 가정에 코비의 등장으로 최소한 딸과의 소통과 연대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마도 담비를 또다시 입양한 엄마의 속마음에는 담비가 자신의 상실감과 불안을 해소해 줄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불과 입양한 지 2주밖에 안된 작은 강아지 담비를 엄마는 계속해서 쓰다듬고 터치한다.
방송 후 두 가지의 다른 반응이 뜨겁다.
한편에서는 훈련사를 질타하는 소리, 입양을 권유해도 시원찮을 판에 훈련과 도움을 주기는커녕 파양을 권하는 훈련사, 유기를 부추기는 방송이라고 까지 소리 높인다.
다른 한편에서는 모녀의 무지와 전문가의 권유를 무시하고 훈련에 협조하지 않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 반려견과 반려묘들이 중심으로 들어앉고 예능프로그램 조차 몇 개씩 유사한 프로그램이 생길 정도로 관심이 생겼을까, 혹은 왜 일까.
상실과 삶의 왜곡에서 오는 보상은 아닐까.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의 반려견이 있었다. '해피'
그 당시에는 반려견이라는 개념도 없었을 때라 그냥 지킴이 개 한 마리가 있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는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에 유기되어 버려진 믹스견 한 마리를 데리고 오셨다. 생김새는 진돗개와 닮았지만 크기는 반 정도밖에 안돼 보이는 믹스견.
이름을 '해피'라 지어주고 그와 친해지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학교가 파하면 쏜살같이 돌아와 묶여있는 '해피'앞에 앉아 해가 질 때까지 시간을 보냈고, 그러던 어느 날 그 앙칼지고 못된 강아지 '해피'는 나와 친구가 되었고 거의 5~6년을 한 몸같이 지냈다. 학교를 갈 때면 교문까지 따라와서 헤어졌고 집 근처 발자국만 들려도 저만치서 달려왔다, 딱지치기를 할 때도 같이 있었고 뒷동산에 놀러 갈 때도 함께 했다.
그렇게 나의 유년을 함께 했던 '해피'는 어느 날부터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다가 동생 친구들이나 동네 어른들이 집안으로 들어오면 갑자기 뒤꿈치를 물거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입질을 했다. 어른들은 '해피'가 늙어서 그렇다고 이별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동네의 천덕꾸러기가 된 늙은 개 '해피'는 내가 아니면 목줄조차 아무도 채울 수 없었으며. 입질은 점점 더 심각해져 갔다.
어느 날, 나는 내 손으로 '해피'의 목줄을 채우고 개장수에게 줄을 건네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몇 날 며칠을 먹지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어머니는 '해피'를 데려간 개장수를 찾아 며칠을 수소문까지 했었다.
40년 전 일이다. 여름이면 어른들은 동네 어귀에서 솥을 걸어 보신탕을 삶고 채소 장수처럼 동네마다 개장수가 돌아다니던 시절 이야기이다.
그러나. 나는 몇 날 며칠을 울었고, 그 후 지금 까지 개를 키우지 않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삼촌들과 형, 동생 누이들이 같이 살고 마당에는 지킴이 개 한 마리 마루에는 고양이 그렇게 살던 시절이 있었다.
서로를 구속하지도 않았고, 감히 개가 집안에서 사람들과 생활하지도 못하던 시절이지만 적어도 개도 사람도 서로 행복했던 시절이다.
지금의 반려견, 반려묘는 어쩌면 깨진 가족공동체를 메우기 위한 대체제 이며. 왜곡된 삶의 상처를 위로받는 감정 받이이다. 하루 종일 주인을 기다리는 분리불안의 개들, 산책 한번 시키지 않으면서 종일 안고 만지고 뽀뽀하고 자신의 불안을 충족시키는 감정의 쓰레기통.
전통적인 가정이 해체되고 산업화가 된 지 벌써 50여 년이 넘어간다. 관계의 부재와 상처 왜곡을 강아지가 메울 수는 없다. 건강한 가정이라야 강아지도 건강할 수 있다. 상처 난 가정과 무너진 관계에서 오는 감정의 문제를 반려견이라는 미명 아래 정서적 학대를 하고 있지는 않는가 묻고 싶다.
자신의 문제. 가족의 문제를 결국은 개에게 투영하고 학대와 방임 그리고 애정을 번갈아 주면서 결국은 사육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상실과 부재를 채우는 강아지 한 마리, 그러나 그 강아지는 상실과 부재를 고스란히 물려받고 스스로 치유할 수 없이 상처를 더욱더 키우며 소모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감정의 악순환, 학대와 가정폭력을 물려받은 아이가 그대로 자식에게 돌려주는 것과 같은 이치
개는 결코 당신의 상처와 부재를 채워줄 위로자가 아니다. 세상 모든 반려견의 문제는 견주의 문제가 확대 생산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학대와 사랑을 구별하지 못하는 많은 견주들이 있다.
당신이 애정이라 생각하는 행위는 개에게 정서적 학대에 다름 아닐 수 도 있다. 당신이 건강해야 개도 건강하다.
요즘 자꾸 반려견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어쩌면 나 역시 상실과 부재의 자리가 넓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실과 부재를 채우는 것은 스스로의 자존감을 높이고 관계 속에 건강성을 회복하는 것이지. 퇴근 후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강아지 한 마리는 아니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위로와 안식은 가족과 공동체의 몫이다.
혹은 절대자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그 신성한 일들을 개에게 그 책임을 지워서는 안 된다.
내 유년의 '해피'와의 기억은 기쁨과 행복, 아픔과 죄책감도 함께 공존하고 있지만. 결코 아픈 상처나 흉터로 남아있지 않다. 폭풍 같은 성장기를 함께 건너온 건강한 기억이다. 내가 그에게 위로를 구하거나. 상처 난 삶을 보상받고자 한 적이 없었고 그 역시 내게서 상실과 불안을 물려받은 적이 없다. 학교를 파할때 까지 '해피'랑 헤어져도 나도 문제가 없었고, '해피'역시 문제가 없었다.
그때 '해피'와 나는 그냥 서로의 좋은 친구였다. 건강한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