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 인증을 할 수 없습니다!

by 여운

나를 찾습니다!


동네 어귀에 작은 도서관이 생겼다. 전부터 오다가다 눈여겨보았는데, 정작 들어가 볼 기회가 없었다.

맘먹고 들어가 본 도서관은 카페 같은 작은 규모지만 그럭저럭 최근 장서들도 제법 갖춰져 있고 열람실이 따로 없지만 중앙의 공동 공간에서 카페처럼 책을 읽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뒤처진 독서를 만회할 좋은 기회가 생긴 것 같아. 못 읽고 지나간 소설 몇 권을 집어 들고 대여를 신청했다.

친절한 사서는 회원가입 절차를 일러준다.

완전히 디지털로 바뀐 회원가입과 대여 관리 시스템을 스마트폰 하나로 일사천리 이루어진다.

주민등록증도 어떠한 증명서나 다른 방법도 안되고

"아주 쉬운 핸드폰으로 본인인증" 하는 방법밖에 없단다.


본인인증이 안된다. 내 명의의 핸드폰이 없는 나는 딱 거기에서 막혀 버렸다. 정중하게 사연을 설명하고 주민등록증을 꺼내 회원가입을 해달라고 주문을 했다.

그러나, 회원등록을 끝까지 할 수 없단다. 본인이 본인인 것을 증명할 길이 없어진 것이다.

구청이 허락한 방법 외에는 내가 나임을 증명할 길이 없어져 버렸다.


내가 지금 여기 있는데, 국가 전산은 나를 부재자라 한다.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실존하는 본인은 스스로를 증명하지 못하지만
본인 명의의 핸드폰은 나를 증명한다.


지인의 페이스북에 암담한 글이 올라왔다.

전업 예술가로 살아가는 그에게는 코로나 19로 감소된 수입을 증명해야만 그나마 열린 국가지원이 가능하다는데, 그 증명이 너무 힘들다는 호소였다.

직장인들은 가볍게 몇 가지 클릭으로 끝이 나고 사업자는 국세청의 증명 몇 개로 아주 쉽게 끝이 나는 소득감소 증명이 예술가에게는 너무나 힘이 드는 일이다.


지방의 음악인으로 살아가는 그는 계약서를 쓰고 일을 해 본적이 거의 없다.

수입이 감소했는지 늘었는지 증명할 길이 없다. 국가 매뉴얼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실존하는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 나를 증명하는 시대가 되었다,

공인인증서가 나임을 증명하고, 국세청이 세금 내는 나의 존재를 증명해준다.

핸드폰에 인증문자가 나를 나로 증명해준다.





시인 김영승의 반성이라는 연작시 중에 이런 글이 있다.


반성 99

김영승


집을 나서는데 옆집 새댁이 또 층계를 쓸고 있다.

다음엔 꼭 제가 한번 쓸겠습니다.

괜찮아요. 집에 있는 사람이 쓸어야지요.

그럼 난 집에 없는 사람인가?

나는 늘 집에만 처박혀 있는 실업잔데

나는 문득 집에조차 없는 사람 같다.

나는 없어져 버렸다.

(김영승, <반성>, 민음사, 1987)


산업혁명은 농촌의 공동체를 분해하고 사람들의 이름을 빼앗아 갔다.

군대식 조직체계 속에서만 인간이 존재하기 시작했다.

직급으로 혹은 숫자로 무리로만 존재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나를 평생 보아오신 옆집 할머니도 나를 증명하지 못하고, 유년을 같이 보낸 30년 지기도 나를 증명하지 못한다.


산업사회는 전통적 공동체 속에 나를 분리하고 재편하여 새로운 번호를 부여했다.

이제는 나의 실용적 기능만 분리하고 재생한다.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새로운 인격이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용적인 조직체계를 벗어나는 순간 존재 자체가 부인된다.


자본주의 이전의 그 어떤 사회도 "은퇴"라는 제도가 없었다. 사회가 나를 용도 폐기하고 분리수거할 권리가 있을까?



은퇴
당신의 실용적인 용도가 폐기되었음을
증명하는 단어





Le vent se lve! Il faut tenter de vivre!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풀 발레리는 "해변의 묘지"라는 시에서 이렇게 적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산업사회의 부속으로 의미를 부여받아서도 아니고

표정이 사라진 도시에서 어깨가 무거운 가장의 역할 때문에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그냥 바람이 불어서 살아가는 것이다.


나를 증명해야 하는 사회

개개인의 특별함이 사라진 사회를 뜻한다.

그 끝은 파편화된 폐허일 것이고.


나를 증명해야 하는 사회를 넘어가는 길

삶의 다양성과 다원을 인정하는 것

우리가 문화와 예술에 희망을 거는 이유이기도 하다.


복제된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부속으로 살지 않는 것

나를 증명하며 살아야 하는 사회.


"나를 찾아 길을 떠난다.

길 끝 어딘가에 실존할,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나를 알아주고 보듬어 줄

나의 공동체를 찾아서"

오늘도, 바람이 불어 오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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