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의 파묘 논란을 바라보며
호국선열을 추모하고 전몰장병의 넋을 위로하는 현충일
1956년 이승만시절 6월 6일을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의해 ‘현충 기념일’로 처음 지정했습니다.
국가기록원에 밝히는 유래는
6월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달이며 <망종>이라는 절기에 즈음하기에 망종을 따라 제사형태를 취했다고 적혀있습니다.
1956년 "제1회 전몰장병추모식"은 정작 이승만은 참석하지 않고 함태영부통령이 참석하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추측컨데 현충일이 6월6일로 특정된 이유는 별달리 없다고 여겨집니다.
1939년 임시정부 의정원은 11월17일을 "순국선열 공동기념일"로 지정하고 광복 이전까지 임시정부 주관으로 시행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이날을 정한 이유는 "을사늑약"이 있던 날이며 이날을 즈음하며 많은 순국선열들이 자결하기도 하고 온몸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해방후 45년 부터 49년 까지 김구선생과 이승만이 참석하던 순국선열 추모행사는 한국전쟁이후 정부에서 주관하다 박정희 정권에서 정부행사가 폐지됐습니다.
그러나 광복회 등 유족 단체 등이 그 명맥을 어렵게 유지했고, 1997년 법정기념일로 제정됐습니다.
현충일이 6월 6일 이 된것은
몇 가지 다른 배경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1949년 6월 6일은 우리 역사에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인 사건이 있던 날입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1948년 설치되어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설치되었습니다.
반민특위는 국회의원 10명을 조사위원으로 삼고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도 구성되었습니다. 헌법에 의해 제정된 기구로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등이 함께 구성하였고 사법권과 경찰권을 가진 기관이었습니다.
반민특위는 먼저 7,000명의 친일파 일람표를 작성하고 체포 준비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전 국민의 지지와 성원을 받으면서 친일파 주요 인사들을 연이어 체포합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민특위의 활동을 가로막고자 합니다. 실지로는 반민특위의 활동과 맞물려 관제데모 "반공 국민대회"를 여는 등 지속적인 방해를 합니다.
예산을 배정하지 않고 자료 요청에도 거부로 일관했습니다.
특히, 이러한 배경 속에 친일파들은 오히려 반민특위 요인에 대한 암살 등을 획책합니다.
노덕술, 최난수 등 친일경찰들은 반민특위 특별 검찰관 노일환, 김웅진, 특별 재판관 김장렬 등을 납치한 후 강제로 ‘나는 38선 이남에서 국회의원 노릇을 하는 것보다 이북에 가서 살기를 원한다’는 취지의 성명서를 자필로 써 신문사 등에 보내고는 38선으로 가는 도중에 이들을 살해해 애국청년들이 살해한 것으로 가장하려 까지 했습니다
결국 6월 6일 새벽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지휘하는 50여 명의 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하였습니다. 건물 주변은 기마경찰들이 에워쌌습니다. 35명이 끌려가고 무기와 통신기기를 탈취당합니다.
김구선생의 암살과 함께 친일파는 다시 득세를 하게 됩니다.
이후, 반민특위는 이승만과 친일파들의 줄기찬 방해 책동으로 업무개시 8개월 만에 해산합니다.
반민특위는 친일파 잔재들에 의해
암살, 살해, 테러, 린치등을 당했습니다.
일제 감정기가 아닌
엄연히 독립된 새나라에서.
물론, 이승만 정권이 6월 6일을 현충일로 지정한 것은
반민특위 습격일을 기념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승만은 임시 정부로 부터 이어진
독립정신이 도도히 서려 있는 11월 11일 "순국선열 공동 추모일"을 없애버리고
친일파들을 반공 전사로 변모시켜 독립정신을 훼손시키고
항일을 지워 버리고
반공을 현충의 중심으로 바꾸려 한 것은 확실합니다.
항일 애국을 추모하던 임시정부의 기념일을 버리고
친일파를 애국으로 인정하는 새로운 의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현충일을 6월 6일로 지정했다고 보여집니다.
애국의 범주 안에 친일을 허용하는 현충일.
최근, 국립묘지의 친일파 파묘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가는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국립묘지는
적어도 독립에 기여한 인물들과 민주주의에 기여한 선열들을 모시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파묘 논란의 핵심은
친일파가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한국전쟁을 비롯한 근대 역사에 활약했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반공주의자이든지 친미주의자 이든지 하는 것은 논의의 뒷전입니다.
먼저, 친일파인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현 대한민국의 건국과 독립에 기본적으로 반대하거나 탄압하던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친일은 어떤 이유로도 애국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친일파들이 항일투사들의 곁에
영광과 추모를 같이 받고 있습니다.
친일파는 파묘해야 합니다.
현충일을 소위 애국보수세력이 활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호국 보훈이라는 말을 애국 복수라 자칭하는 세력들이 방패로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 습격사건으로
친일파들이 부활했으며. 오히려 득세하고
반공을 외피로 대한민국을 겁탈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6월 6일은
친일파가 반공전사로
민족반역자에서 애국자로 탈바꿈하는 신비한 단어
"친일" "반공"이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테러를 가한 날
이승만과 박정희는 현충일의 핵심정신인
항일 애국을 지우고 그자리에
친일과 상관없이 반공을 중심으로 바꿔치기 했습니다.
항일 없는 애국
항일 없는 반공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반세기를 지켜온 현충일의 날짜를 바꿔야 할지는 어려운 문제 이지만
반공에 등 떠밀려 뒤로 사라진 현충의 의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인
독립과 항일이 추모의 중심의 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현충일을 친일파로 부터 찾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친일이 사라진 진정한 애국자들을
진정한 추모의 대상으로 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짜 나라 일 것이기에"
이름없이 빛도 없이 산화해 간 순국영령 들께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참고 자료
https://solveout.tistory.com/45 문제해결 이싸빅의 자료
http://blog.daum.net/gmania65/1231 현이의 이바구의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