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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 Feb 04. 2021

Maudie. 스며들다. 배어 들다. 젖어들다. 물들다

영화에 젖어들다. 낡은 양말 한쌍처럼

2016년작 Maudie


캐나다의 국민화가로 불리는 모드 루이스(1903~1970)의 삶과 사랑을 그린 영화

"내 사랑 ( Moudie, My love)"



아일랜드 출신의 감독 에이슬링 윌쉬의 작품입니다.

감독은 이 작품을 위해 10년을 준비했고 사계절이 지나는 아름다운

캐나다의 풍경을 가감 없이 절절히 담고 있습니다.

촬영 역시 10년에 걸쳐 순서대로 촬영되었습니다.

고증을 통해 그녀와 그가 살던  세상에서 제일 작은집을 재현해내고

영화 20도의 설원의 촬영을 이겨내며 살린 영상미는 가히 아름답습니다.


영화를 정주행 하면

그림 같은 영상미들을 끝없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관절염으로 선천적 장애를 안고 태어난 모드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친오빠로부터 버림받고 고모집에 얹혀살게 됩니다.

에버렛이라는 남자가 그의 집을 돌볼 가정부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운명을 바꿀 결심을 합니다.

글조차 읽지 못하는 생선장수 에버렛과 불편한 동거를 시작합니다

가로세로 3,4미터 남짓한 그의 집에는 침대조차 하나밖에 없었고

에버렛이 정한 그 집의 서열은 개와 닭 그다음 모드였습니다.

몸이 불편한 모드와 마음이 불편한

가장 낮은 곳에 거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그냥 사는 이야기



처음 에버렛의 집을 찾아가는 모드가 혼자 걷던 길은

불편한 그의 걸음걸이만큼 처절하고 절박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에버렛의 뒤를 열심히 뒤따라가던 불편한 걸음걸이의 모드

에버렛 다음에 개, 개 다음에 닭, 닭 다음 서열인 모드는

앞만 보고 걸어가는 에버렛의 뒤를 숨을 헐떡이면서 따라갑니다.

시간은 또 흘러 에버렛의 수레에 타고 얼굴을 마주 보며

에버렛이 수레를 미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아스라한 풍경은 주인공만 바뀔 뿐, 사계만 바뀔 뿐, 변함이 없습니다.

천천히 한지에 먹물이 스미듯이 아스라이 젖어들었습니다.



붓 한 자루만으로 행복하다던 모드는

집안 곳곳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에버렛은 그런 그녀에게  좁디좁은 집안을 조금씩 내어줍니다.

글을 모르던 에버렛을 위해 외상 장부에 그림을 그리던 모드는

그의 작품을 알아봐 주는 산드라가 처음으로 25센트를 주며

그의 종이그림을 사주면서 본격적으로

집안밖에 널려있는 판자와 널빤지 가재도구와

계단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두 사람만의 결혼식을 마치고

음악조차 없이 에버렛에 구두에 발을 올리고 춤을 추며

" 낡은 양말 한 쌍처럼"같이 하기로 약속하는 장면은

아름답고도 아픕니다.



영화사에서 올린 소개글에 보면 이런 두 사람의 관계를 "스며들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스며들다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기체나 액체 따위가 밖으로부터 배어드는 혹은 흘러드"는 것이라 설명합니다.


"의도하지 않게 혹은 의식하지 않고 천천히 물드"는 것

물들거나 스며들거나 젖어들거나 곧장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수채화를 그리는 어떤 작가는 작품을 하기 전에

아주 질 좋은 화지 한 장을 물에 이틀 정도 담가 둔다고 합니다.

푹 젖은 화지를 천천히 건져 올려  채색을 올린다고 합니다.


저도 채색을 하기 전에 물칠을 먼저 합니다.

특히, 하늘이나 넓고 부드러운 색감이 필요할 때

충분히 종이에 물칠을 올려야 합니다

그러데이션, 물감이 스며들듯 종이에 배어 들어갑니다.


서로에게 스며든다는 것

좀 더 정확한 표현은 젖어든다는 것일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충분히 젖어들 동안의 그 찝찝함 불편함을 참아내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자극이 가해지면

본능적으로 약한 것을 지키고자 방어기제를 발현합니다.

스스로를 억압하거나, 회피하거나, 퇴행 혹은 합리화하는 등

수많은 방어기제를 복합적으로 발현합니다.

서로에게 젖기 싫어서


우리는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낯선 사람에게는 말 도하면 안된다고 가르칩니다.

감정을 단속하고 나쁜 친구에게 물들지 않도록

교육합니다.

항상 감정을 드라이하게 유지하는 것이

경쟁에서 지지 않고 성공하는 법이라 배웠습니다.

모드와 에버렛은 서로가 젖어드는 불편함과 찝찝함을

그냥 운명처럼 받아들입니다.

젖지 않고서는 스며들지도 배어들 지도 않습니다.


국내 개봉명이 "내 사랑"입니다.

영화는 아무리 봐도 원제 "Maudie" 여야 합니다

정식으로 교육받지 않은 자유로운 표현의 화가라는 뜻입니다.



줄거리는 스포 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줄거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드라마틱한 이영화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거의 없습니다.

갈등구조나 반전도 별로 없습니다.

그냥 갈등 역시 천천히 일어나고 자연스레 해소됩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그냥 말하지 않으렵니다.


글을 적으며

혼자 몇 번 갈등합니다

영화를 더 깊이 이야기하고 싶지만

결국은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관전 포인트만 제시할 까 합니다.


"모드는 가장 불편하고 불행한 사람이지만 그림을 그리면서

제일 행복합니다."


"에버렛과 모드는 그 어떤 행복의 조건과 상관없이 불편하면 불편한대로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운 대로 아프면 아픈데로 서로에게 젖어들고 기대어 있습니다"


사실 이영화를 보고 펑펑 울었습니다.

나는 충분히 상대에게 젖어들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경쟁과 고립의 세상을 살아가기에

감정이 촉촉한 것은 약점을 드러내고 잔인하게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강박에 메어 우리는 살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의  감정은 얼마나 메말라 있아 누구든 가까이  젖어들려 하면

날카로운 날을 세워 베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모드와 에버렛처럼 서로에게 스며드는 삶이

과연 가능할까요.

죽은 줄 알았던 딸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모드의 슬픔은 지금도 촉촉이 가슴을 때립니다.


실제 부부의 모습






속상함의 끝이 무엇인지 오래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마도 영화와는 결코 같지 않은 침습이 어렴풋이 보이기 때문일까요

영화보다도 모드의 관절염증세는 더욱 심했고 붓을 쥐기 힘들 정도의 고통 속에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에버렛은 그런 그녀를 끝없이 그림을 그리도록 종용하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곳곳에 깔린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은

행복합니다.


그녀가 그린 그림들입니다.




" 내 인생 전부가 이미 액자 속에 있어요"

창밖으로 보이는 것 들과 기억하는 것들을 그린다는 그녀는

자신의 인생 전부가 이미 액자 속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번역하면 액자이지만, 다시 한번 곱씹어 보면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자기 고백이기도 합니다. 장애의 억압, 가난의 억압, 가부장의 억압에

인생 정부가 갇혀있다는 고백


모드가 에버렛에게 남긴 마지막 말

" 난 사랑받았어"

이 말이 반어적으로 들리는 것은 지나친 상상이겠지요.




넷플릭스에 있습니다.


되지 않는 그림 한번 그려 봤습니다.

감정이 그대로 투사되는지 그림이 잔뜩 찌푸려있습니다.

선도 거칩니다. 그림 실력과 무관하게 내 그림도 내 안타까움인지 속상함인지

무언지 모르는 감정이 깃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작은 집에 평안을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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