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약은 달리기였고 후시딘은 맞바람이었는데

by Topmage

펜에 힘을 주어 도화지에 굵은 직선을 그으려고 해도 어느샌가 아래로 기운 곡선이 되어버린다. 몸과 마음이 아래로 기운 탓이다. 청년 시절에는 어디서 온 지도 모르는 불안이 내 마음에 웅크리려 할 때면 바람을 가로진 대시로 날려버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아니, 할 수는 있지만 분명 몸이 크게 아우성을 칠 것이다. 얼굴에 희미하게 패인 주름만이 나이 듦을 말하지 않는다. 조금만 빠르게 달려도 시큰해지는 무릎과 뻐근한 허리가 나를 주저앉히려고 한다. 여기저기 부딪혀 긁히고 터진 내 마음의 빨간약은 달리기였고 후시딘이 맞바람이었는데. 참 나이 먹는 것은 이래저래 불편한 일들 뿐이다.


사실 작년은 몸과 마음이 모두 바닥난 한 해였다. 회사는 재작년 가을에 희망퇴직을 단행했다. 희망퇴직을 하면 떠나간 사람과 남겨진 사람은 서로 다른 묘한 감정선을 지니게 된다. 떠나는 사람 중에 누구는 목돈을 받고 은퇴한다며 좋아했고, 반면에 다른 누구는 쫓겨난다면서 회사와 남겨진 동료들을 원망했다. 떠나간 그들이 남긴 감정의 흔적들은 남겨진 직원들이 오롯이 떠안고 일한다. 안도감과 미안함이 어수선하고 어색하게 섞인다. 그런 와중에도 급여 명세서는 냉정하다. 세후 급여는 물가에 이미 많이 희발 된 상태다. 앞자리는 변한 것이 없고 물가에 밟혀 눌렸던 뒷자리가 조금 올랐을 뿐이다. 우리 팀은 8명에서 4명이 줄었고 업무량과 강도는 그만큼 늘어났다. 서로 더지고 덜지고 할 것 없이. 우리는 Ai가 아니기 때문에 높은 생산성을 유지하는 것은 내 일상과 삶을 갈아먹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므로.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역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버티는 방법을 배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나의 성공의 기준이 ‘임원‘이었다면, 지금은 국수 면발처럼 가늘고 길게 회사를 다니는 것이다. 임원은커녕 매니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승진할 능력도 없을뿐더러 내게는 이미 귀찮은 일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나의 팀장은 나를 자꾸 자신의 승계자로 두려고 한다. 일단은 알겠다며 모른 척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이지 전혀 생각이 없다. 그의 마이크로 매니징을 내가 채울 수 없기 때문. 마이크로 매니저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개입하길 원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통제력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불안에 빠진다. 예측할 수 없는 코 앞의 삶마저 통제하고 싶은 자학이다. 게다가 워킹 홀릭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과 태생이 전혀 다르다. 그런 매니징은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다.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은 내가 싫어하는 일이다. 나는 내가 항상 옳고 바르기 때문에 예외적인 일을 해도 괜찮다는 망상은 가지고 싶지 않다. 그래서 말하고 싶다.


“그냥 새로 매니저를 뽑으세요.”



요즘 나의 행간에 머물다 간 사람들 대부분이 예민해진 것 같았다. 약간의 손해나 조금의 양보도 허락하지 않았다. 본래 내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것을 가질 기회를 놓쳤다며 크게 억울해했다. 화를 내며 신경질 부리는 사람이 있고, 울면서 억울하다고 떼를 쓰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피해를 봤다면서 보상을 해달라는 사람도 봤다. 심지어 남의 혼잣말을 듣고 다가와 따지는 사람도 만났다. 아마도 뒤에서 쫓기고 옆에서 잘리고 앞사람에게 뒤처지는 불안 때문이 아닐까? 암튼 이런 생각을 아내에게 말했더니 나를 빤히 쳐다본다. 하긴 나도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없겠지. 마치 거울 바로 앞에 서서 욕한 격인가 싶어 속으로 엄청 뜨끔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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