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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pmage Mar 25. 2017

점심 산책

엄지손가락을 입으로 자근자근 깨문다. 미간은 이미 성이 나 있고, 턱은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 이런 상태가 조금 더 계속되면 왼쪽 이마에 수분이 마르고 열이 핀다. 주먹을 쥐고 머리에 피어오르는 마른 열을 잡아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물이라도 마시면 열이 잡힐까 싶어 휴게실에 갔다. 물을 한껏 들이켜면서 휴게실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고 눈이 동그래진다. 벌써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니. 출근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시작한 업무 하나를 세 시간 가까이 붙잡고 있던 셈이다. 이 업무 말고도 할 일이 많은데. 오늘도 역시나 야근을 해야 하나 보다.


길마중로 산책길 (10월 촬영)
A walk in the park (1904) / Victor Borisov-Musatov


머릿속이 사무실에서 어지럽게 유영하는 먼지처럼 혼탁해지면 나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산책하러 나간다. 회사의 점심시간은 주변의 여타 회사들과 달리 30분 늦지만 엄격하지 않다. 늦었다고 화이트보드에 이름을 적는 따위의 유치한 행태는 하지 않는다. (마음에 담아둘지는 모르지만.) 삼삼오오 모여 점심을 먹으러 식당가로 향하는 사람들 사이로 어색하지만 당당하게 횡단보도를 건너가면 도시에 숨겨진 산책로가 보인다. "길마 중길 ". 고속도로 양옆에 길게 들어선 소음방지벽 너머로 담박한 산책로가 있다. 꽃샘추위가 누그러지고 따스한 볕들이 오래 머물기 시작한 후부터 12시 반이 되면 길마 중길은 사람들로 북적댄다. 하지만 오후 1시가 되면 그 많은 사람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그 길을 나 혼자 작작 유여하게 걷는다. 하늘을 향해 뻗은 나뭇가지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휘 젖히다가 차르르 소리를 낸다. 아직 차가운 공기가 목덜미와 어깨를 움츠리게 하지만 따뜻한 햇볕이 있어 걷는 데 무리가 없다. 강남 한복판에서 맞을 수 없는 고요함, 잔잔함, 평화로움 그리고 조용함을 적게나마 누린다. 그러나 그 정도면 충분하다. 오전 내내 답답한 업무에 짓눌렸던 머리의 무게가 가벼워지기에 말이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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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출처: wikiart.org - 출처 사이트의 사진은 오직 온라인 게시만 가능하며, 정보전달 및 교육 목적 이외에 상업적인 사용을 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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