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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속에서 아날로그를 그리다.

손 떼 묻은 뭔가가 그리워지는 날에는...

by 꿈꾸는 아재

나의 MBTI는 INFP다.

예전엔 가끔 다른 유형으로 나올 때도 있었다.


MBTI가 나이와는 무관하다던데 난 영 안 그런 것 같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만 봐도 왕왕 뭉클해지곤 한다.

어떤 땐 석양 속 기러기 떼를 보고 콧날 시큰해지는 날도 생긴다.

오십 대 중반 아재의 여성 호르못 탓인가 이제는 누가 봐도 빼박 INFP란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가끔 손 때 묻은 무언가에 더 마음이 쏠릴 때가 많다.


얼마 전에는 입사 1년 된 모 직원이 장문의 편지와 함께 그간의 소회와 감사를 자필로 꾹꾹 눌러 담아서 작은 선물과 함께 내 책상 위에 몰래 올려놓았더라. 생각해 보면 예전엔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요새는 이런 게 불현듯 생경스럽다고 느낄 때가 있다.


언제인 지 찾아볼 필요도 없고 뭘 보낼지 고민도 필요 없는 편리한 타의의 세상~

핸드폰이 알아서 척척 ‘오늘은 누구누구 생일이오!’ ‘오늘은 네가 뭘 눌러야 하오!’ ‘적당한 금액은 이것이니 너는 잔말 말고 결재 버튼이나 누르소’라고 결정해 준다. 기성복 교복처럼 새 주인을 대기하고 있던 문장들은 어느새 내 마음인 양 둔갑한다.


이렇게 편리하고 신속한 세상인데,

‘그래도 아날로그로 마음이 진짜지~’라고 까탈스러운 고집이 생길 때가 있다.


사실 나는 AI 플랫폼을 꽤 많이 쓰는 편이다.

유료가입도 몇 개 있고 일상이나 회사 업무에서 활용하고 있는 AI도구들도 열 개 이상은 되는 것 같다. 시간활용 효율성이나 생산성 측면에서는 일 년 전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된다. 그럼에도 나는 AI에게 온전히 마음이 가지 않는다. 마치 결혼 앞두고 전 여자 친구 못 잊는 예비신랑처럼...


회사를 떠나간 후배들 중에서 특이하게도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 간 친구가 있었다.

“나름 잘해 보려고 했으나 저는 조직에 늘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선후배님들께 불편을 끼쳤던 일들은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그래도 저는 좋았던 일만 기억하고 부장님께 배운 것들만 가지고 가겠습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대략, 그런 내용의 편지였는데 무던히 속 썩였던 그 녀석이 그날부터 참 좋아져 버렸다. 꼴랑 아날로그 자필 편지 하나에… 그 덕인지 지금도 끊기지 않고 계속 만나고 있다.


가끔은 카톡에 아날로그를 양념처럼 버무려서 쓸 때가 있다.

특별한 감사를 전하고 싶거나, 비록 회사 비즈니스 차원이더라도 사과나 양해를 구해야 할 때 자필로 써서 사진을 찍어 톡으로 보낼 때가 종종 있다. 그런다고 상대방이 냉큼 감동할 리도 없겠지만 일단 내 마음의 퉁 치는 차원이다.


지금 막, 또 비슷한 호기심이 비슷하게 발동해서 GPT한테 어리광 같은 질문을 해 봤다.

지금 바로 이렇게 보내 봤다.

GPT에게 자필로 질문












그랬더니 이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 이렇게 화답했다 ㅎㅎㅎ








그저 학습된 거대언어의 조합일 뿐인 GPT의 답에도 소꿉장난처럼 기분은 좋다.


지금은 이미 불가역적인 디지털 AI시대가 되었음을 인정한다.

한국의 Chat-GPT 가입자만 1,800만 명을 넘었단다. 허기사 주말에 AI 공개강좌 같은 데를 가보면 절반 이상이 60~70대 분들인 경우가 허다하게 많더라. 일상과 일에서 AI 문명의 이기를 지혜롭게 누리고 잘 활용하는 것은 선택의 영역이 아니라 필수 의무라는 목소리도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


그래도, 아주 가끔 ‘나다움’을 아날로그로 담아낼 수 있는 여유만큼은 ‘선택 권리’ 불가침 영역으로 남겨져야 하지 않을까? 이 빠르고 각박한 세상에 그런 공간 정도 있어야 살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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