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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같은 <기억>의 힘

당신은 무엇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by 꿈꾸는 아재

23년 11월 어느 날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34년 만에 고3 때 담임 선생님 모시고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었다.

모교 이사장님을 주인공으로 만든 다큐 영화의 개봉전 시사회에 선생님께서 오신 덕분이었다.
출신학교 이사장님을 스케치한 영화라서 재경 동문들도 다수 참석한 시사회였다.


재경 동문회에서 존재감이 무명 씨 수준이었던 나의 참석 명분은 약했지만 얼굴을 디밀었다.

참석 안 한다고 누구 한 명 ‘왜 안 왔냐?’고 물어볼 이도 없었겠지만 그날만큼은 가고 싶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 중에서 우리 선생님께서도 비중 있게 등장하신다는 이유가 컸다.

더구나 제자들 볼 겸 서울 시사회까지 직접 오신다니 꼭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싶었다.


시사회가 끝나고 재경 동문회에서 은사님을 위한 뒷풀이 자리를 마련하였다.

뒷풀이 내내 일부 동문들이 선생님과의 대화를 독점하였다. 나는 멀찌기서 지켜 뵐 뿐이었다.

그런데, 뒷풀이가 끝나고 스승님을 호텔 숙소까지 모셔다 드리는 과업(?)이 내게 떨어졌다.

눈도장을 끝난 대다수의 동문들이 뒷날의 공사다망을 이유로 황급히 흩어져버린 다음이었다.

최고참 선배님께서 우물쭈물 대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은사님을 모시라는 지령을 내렸다.

선생님의 숙소는 영화 시사회장에서 가까운 이태원 해밀턴 호텔이었다.


호텔까지 택시로 모셨는데 선생님께서 못내 아쉬우셨는지 가볍게 한 잔을 청하셨다.
사실, 공식 단체 석상에서 스치듯 인사드린 몇 번 외에는 사적인 자리는 처음이었다.

아담한 술집 동그란 양철 테이블에 소주 한 병 놓고 일흔 되신 노구의 은사님과 마주 앉았다.

마음이 찡했다. 학창 시절에는 그렇게 태산 같고도 무서웠던 분이기도 하셨는데...


그런데,

선생님께서 첫 잔을 건네자마자 풀어놓으신 나에 대한 기억이 나를 전율케 했다.

내가 향교가 있는 어떤 면 소재지 마을에 살았고 내 하숙집 위치가 어디였는지 기억하시는 게 아닌가.

어른 필체의 글씨체가 참 멋진 아이였다는 말씀도 해 주셨고, 내 영어 발음이 너무 좋아서 영어 선생이자 담임으로서 참 흐뭇했던 기억도 있노라고 기억해 주셨다. 수십 년 간 거쳐 간 제자들이 도대체 얼마일 테며 하물며 평범을 넘어 아싸를 넘나들던 나에 대한 기억을…


소스라치게 깜놀해서 여쭈었다.

“스승님! 저같이 미천한 제자의 기억까지 어찌 그리 다 담고 계셨습니까?”

선생님의 답변이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했다.

선생 노릇의 힘은 아롱이다롱이 제자들에 대한 작은 기억들 덕분이더라.”
“선생의 기억은 제자들의 잘되고 못됨으로 가려지지 않는다. 성적순으로 가려지지도 않더라. 그저 기억이 반복되고 작은 기록들이 쌓이면 나중에라도 다 기억나더라.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인생 처음으로 스승님을 꼬옥 안아드렸다.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기 전에

기억을 담아두는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시작했던 것이 아마 그쯤 부터였던 것 같다. 그날 밤 스승님께서 주셨던 ‘기억'은 기억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리뉴얼해 주셨다.


누군가를 기억해 준다는 것,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


살다 보면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기억나는 것도 있다.

애써 기억하지 않아도 만인이 기억해야 할 날도 있다. 국가기념일 같은...

남들은 다 잊어도 나한테는 가장 귀한 기억도 있다. 첫 만남, 자식이 세상에 온 날, 결혼기념일 등등

그러나, 너무나 흔하고 소소해서 우주의 먼지처럼 흩어질 수 있는 평범한 기억도 누군가의 <기억>과 <기록>으로 인해서 아름답게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김춘수 시인님의 시 <꽃>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 까지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으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된다는 것처럼 '기억'은 누군가를 보통명사에서 특별명사로 승격시켜 주기도 한다. 사람은 타인이 기억하는 자신의 좋은 기억을 지켜 내기 위해서, 없던 노력과 행동까지 보탤 수 있는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다. 일례로, 선생님께서 내 필체가 좋았다라고 말씀하신 이후부터 대충 흘려쓰던 글씨도 의도적으로 다시 신경써서 쓴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직장생활,

그래서 최대한 많이 기록하고 기억하기로 했다. 때로는 배움과 채움으로, 때로는 반성과 통찰로...

우선 세 가지를 실천해 보기로 했다.

◇ 의도적으로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특히, 주변 사람들의 선한 노력이나 고마움 좋은 추억들

◇ 기억을 수시로 기록한다. 기억해 내고 싶어도 안 떠오르는 잊혀진 기억만큼 슬픈 것은 없다.

◇ 좋은 기억은 담아두지 말고 표현한다. 때로는 사소한 기억의 표현이 값비싼 선물보다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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