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이와 멍청이는 백짓장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
그렇지만 헤프면 안 되니까 말로 절대로 드러내지 않고 긴 세월 마음속에만 꽁꽁 아껴 두고 있다.
아내 역시 그런 내 마음 헤아리고 배려해서 말로 절대 표현하지 않는다.
이런걸 두고 부창부수라고 했나? 아니면 쌤쌤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까?
나는 성글고 엉성한데 게으르기조차 하다.
반면 아내는 계획적이고 치밀하며 부지런하다. 그래서 속으로는 나를 많이 사랑할 테지만 겉으로는 종종 나를 꾸짖고 야단친다. 가끔은 정신 차리라고 불같이 호통도 친다. 그게 다 나 잘 되라고 그러는 거 나도 잘 안다.
늙은 아들 하나 키우기가 얼마나 힘든지 나도 알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대들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남자의 체면도 중요하기에 가끔은 소심한 반항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내의 무공은 대단해서 설렁설렁 대충 나와 겨뤄도 내가 매번 제압당한다. 그래서 아내는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고 때로는 넘사벽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아내가 지금까지 줄기차게 내게 요구하는 것은 초지일관 한결같았다.
집에 들어오면 여기저기 먼지 날리지 말고 바로바로 잘 씻으라는 것,
집안일에 내 일 네 일이 없으니 주인의식으로 뭘 할지 먼저 찾아보라는 것,
운동 꾸준히 하고 영양제 잘 챙겨 먹고 매사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것,
약한 주량이니까 싫은 술자리일수록 홍야홍야 눈 풀리면서 먹지 말라는 것,
상대방이 말 잘 알아듣게 항상 두괄식으로 핵심만 똑바로 얘기하라는 것,
이 험한 세상 줏대 없이 휘둘리면 안 되니까 책을 가까이하고 늘 공부하라는 것.
겨우 그 정도다. 그런데 백번 옳은 말인데 참 그게 잘 안된다. 마음 따로 실행 따로 놀 때가 많다. 그러다가도 기를 쓰고 노력해서 뭔가를 좀 했구나 싶으면, 그런 내가 교만해질까 봐 아내는 나의 다른 부족함을 상기 시켜준다. 그럴 때는 한없이 쪼그라든다. 집에서의 나와 바깥에서의 내가 과연 같은 사람인가 헛갈린다.
궁금해서 대학교수인 친구한테 자문했더니 친구도 "당신, 진짜 교수 맞냐?"라고 아내한테 자주 야단맞는다고 했다. 그런데, 내 아내는 입으로만 훈육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몸소 솔선수범으로 직접 보여주기도 한다. 나이 오십에 새로운 공부를 찾아 대학에서 다시 열공 중이다. 그래서 아내가 나랑은 Another 레벨이라는 생각마저 들 때가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늘 부족한 사람이고 틀림없이 멍청하기조차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는 매일 아침에 출근하면서 변신을 한다. 신데렐라가 밤 열두 시에 변신을 하는 것처럼...
띨띨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멋진 중년이 된다. 영화《인턴》의 로버트 드 니로처럼 훗날에는 더 멋지련다.
몇 달 전에 회사에서 부하 직원이 제법 큰 업무 실수를 한 일이 있었다. 입사 1년이 안 된 경력사원이었다.
전표에 거래처 입력 실수로 다른 업체에 거액을 송금을 해 버린 실수였다. 물론 그 직원의 전표처리도 실수였지만, 사실 그건을 결재한 담당 팀장이나 경리 파트도 실수를 한 셈이었다. 전에 없이 야단을 좀 세게 쳤다. 똑똑한 친구가 왜 그런 어이없는 실수를 했냐고... 채용할 때 내가 직접 서류 심사하고 면접 봐서 뽑았던 직원이어서 실망감이 더 컸다. 그런데, 그보다는 당시의 내 심리 상태가 더 작용을 했다. 회사 안팎의 큰 변화와 이해충돌로 인해 내가 많이 예민해졌던 시기라서 평소보다 좀 더 강한 질책을 했던 것 같다. 뒤늦게 미안해졌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 내 기대와는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 직원이 업무를 더 순발력 있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자잘한 실수가 잦아지는 것이었다. 조금만 내가 뭐라고 해도 위축된 모습을 보이고 허둥댔다. 분명히 내 말을 확실히 이해한 것 같지 않아 보였는데도 군인처럼 일단 '네 알겠습니다.'라고 복명복창부터 했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직속 팀장이 아닌 차상위 상사한테 크게 혼나고 나니까 더 위축되고 긴장해서 그랬던 거라고 나중에 듣게 되었다. 그럴 필요까지 없던 질책으로 애먼 직원 위축되게 하고 떨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 후 어느 날 저녁 그 직원의 직속팀장과 같이 술 한잔을 사줬다.
그 친구에게 사과하고 그 친구의 위축된 마음을 풀어줄 나만의 비기(祕器)를 사용했다.
나는 신에 가까운 완전무결한 상사의 위상을 꿈꾸기에, 웬만해서는 내 실패담이나 흑역사를 잘 오픈 안 한다. 그런데, 그날 밤 그 친구한테는 특별히 털어놨다. 내가 사원시절, 엄청난 고액의 전도자금을 잘못 송금해서 전혀 이해관계가 없는 제삼자에게 입금을 했던 실수였다. 당장 잘못 송금된 금액을 환입받아야 하는데 하필이면 그 사람이 해외로 출국한 상태였다. 그것도 외환자유화 이전 시기라서 송금도 입금받기도 어려웠던 공산 국가로 출국했던 시점이었다. 여하튼 결론적으로 다시 돌려받기까지 상사들을 비롯해서 여럿이 엄청 애 먹었었다.
그 엄청난 고문관 짓 외에도 오랜 기간 내 업무 실수 흑역사도 몇 건 더 원뿔로 얘기해 줬더니, "이렇게 완벽하신 부장님께서 그런 실수들을 하셨다구요? 설마요!" 라면서 놀라워했다. 놀라움 뒤에 야릇한 미소가 번지는 것도 보였다. 그러면서 어깨 한번 툭 쳐 주면서 작은 실수도 반복되면 실력이니, 실수하지 말고 똑똑한 능력 잘 발휘해 보라고 격려해 줬다. 그 후 위축된 태도도 많이 돌아오고 업무 태도도 유연 신속하게 회복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단기 간에 그 친구의 업무능력에 무슨 천지개벽할 수준의 일취월장이 있었을까? 그는 여전히 그였을테고 능력 향상 또한 고만고만했을 거다. 그저 그의 위축감이 좀 가라앉았을 뿐이었고, 그 직원을 바라보는 나의 뻣뻣한 시선이 좀 말랑해졌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 만으로도 달라져 보였고, 달라졌고, 달랐다.
초나라 항우의 신하였던 한신은 그 출신과 성격 때문에 늘 홀대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잠재력을 알아봐 준 한나라 유방에게 투항한 후 유방은 그를 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한신은 엄청난 전법으로 초나라를 무너뜨리고 한나라 제국 건국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멍청한 무색무취 이름 없는 진사로 전전하던 한명회의 능력을 알아보고 장자방 책사로 곁에 둔 세조는 또 어떠했나. '달라짐'이 아니라 '알아봄' 덕분이었다.
직장에서의 직원들 업무능력은 천차만별이다. 그건 상사들도 매 한 가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 돌아보니 똑똑함과 멍청함은 백짓장 한 장 차이였더라. 그보다는 사람을 바라보는 상대의 마음 온도가 더 문제였다. 그러니 마음에 좀 안 든다고, 일 좀 못 한다고, 실눈 뜨고 상대에게 마음으로 말로 도끼질을 하지 말자. 나도 도끼질 당할 일 많았겠지만 누군가로부터 그냥 넘어가 준 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정말 옳은 건지도 모를 '옮음'을 핑계로 마음만 먹으면 베풀 수 있는 '따뜻함'을 밀어내지 말자. 내가 넉넉해지면 그도 덩달아 넉넉해진다. 그래야 먼 훗날 내가 나이 든 일병이 되었을 때, 넉넉한 이 세상이 나를 한 번쯤은 구해주지 않겠나. 그러니, 이 땅의 상사 또는 선배들이여! 너무 사소한 것에 우리 후배들 잡도리하지 말자!
※ PS : 훗날 이 글을 내 아내가 보더라도, 이 글이 아내에 대한 반항이나 디스가 절대 아님을 알 것이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대인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