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똑.
우주야. 우리 영어 공부 같이 할까. 영어 안 쓰니까 다 까먹었어.
그래, 좋아. 뭘로 공부할까? 만나서 하기엔 서로 시간이 없고, 그러면 녹음해서 서로 보내줄까?
그거 좋다. 어떤 거 녹음할까?
각자 집에 있는 책으로 녹음하지 뭐. 새로 사기도 그렇고.
그래 좋다. 각자 시간 될 때 녹음해서 카톡으로 보내자.
쿵쾅쿵쾅. 오랜만에 세영이한테서 온 연락에 머릿속이 바쁘다. 덩달아 심장박동수도 빨라진다.
시간이 멈춰버린 82년생 김우주는 오늘도 꾸역꾸역 출근 준비를 한다. 시급 10,657원(세후)을 받는 놀이학교 영어강사는 한 숨 한 번에 간을, 또 다른 한 숨에 쓸개를 화장대 위에 내려놓고 길을 나선다.
바닥을 친다. 인생이. 자존심이. 그냥 모든 게 다. 전자 운동을 하듯 쿵쿵 떨어지는 게 아니라 아주 우수수 한 톨도 남지 않고 다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동네에서 영어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여학생은 그렇게 하루하루 영어를 잘했던 추억을 먹고사는 아줌마가 됐다. 한때는 영어에 살고 영어에 죽는 그야말로 영생 영사였는데 세월에 찌들어 영어를 잘했던 학창 시절마저 증오하게 됐다. 그때 이티씨 원장님만 안 만났어도 그렇게 영어를 열심히만 안 했어도. 남들은 영어 못해서 죽겠다는데 나는 영어만 잘해서 억울해 죽겠는 거라.
먼지가 뽀얗게 쌓인 책장에 2018년도 10월 EBS 김대균의 토익 킹이 보인다. 아마 토익시험 준비한다고 샀던 게지. 분명히 방송도 안 듣고, 문제도 안 풀고 시험을 봤겠지. 루틴인 자기 비관 시간이 지나고 어느 부분을 녹음할까 책장을 넘기는 손이 바빠진다. 우선은 파트 3부터 해보자. 땅땅.
휴대폰에 있는 음성 녹음 기능을 찾는다. 구글 아이콘을 눌러보니 없다. 삼성 아이콘을 누르니 내 파일 옆에 빨간 아이콘이 보인다. 검지를 갖다 대니 하얀 동그라미 안에 빨간 동그라미가 있다. 누르면 시간이 카운트가 된다. 깜짝 놀라서 앞으로 가기를 누르면 녹음 파일을 저장할까요?라고 뜬다. 취소 / 저장 안 함 / 저장. 와 시간은 계속 올라가고 미치겠다. 저장 안 함을 누른다. 안 되겠다. 파트 2부터 녹음하자.
Does the show start at 7 o’clock?
저장 안 함
Does the show start at 7
다시
Does the show start
다시
Does the show
다시
Does the
아오 이 *?#$%& 다시
녹음파일 속의 발음이 구리다. 구려도 그렇게 구릴 수가 없다. 친구한테 보내는 거지만 제대로 해서 보낼 거야. 아주 그냥 깜짝 놀라게 할 거야. 이제부터 녹음기와 나와의 싸움이다. Does the show start at 7 o’clock? 20번 정도 저장 안 함과 녹음 버튼을 왔다 갔다 했다. sh 발음이 마음에 들려고 한다.
카톡을 눌러서 세영이한테 파일을 누르고 오디오를 누른다. 휴대전화의 파일에서 아까 녹음한 파일을 엄지로 꾹 누른다. 대화창에 경쾌하게 업로드가 된다. 유효기간과 용량이 뜬다.
까똑.
우주야. 방금 들었어. 너 진짜 원어민 같아. 너무 잘했어.
진짜? 나 거짓말 안 하고 30번은 넘게 녹음했어. 너무 힘들었어. 너무 어색해.
아니야. 진짜 잘했어. 나는 시간 되면 할게. 너는 계속 보내 알았지?
어. 너한테 보내니까 확실히 하게 된다. 알았어.
낭독은 그렇게 내게로 왔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