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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원 Mar 02. 2022

혼자 하는 여행은 최고의 습득이다

방랑벽은 어릴 적 로망이었다. 교복을 입고 버스 뒷자리를 고수하며 한강대교를 지나다녔던 시간이 최초의 표류였다. 그 시절 겨울은 코 속이 얼어붙을 만큼 차가웠지만 중지도(현 노들섬)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사춘기 소녀에게 말 없는 위로가 됐었다. 단발머리 친구와 함께 시작했던 종점 여행은 ‘좋음’의 시작이었다. 


그 후로도 이렇다 할 여행은 없었다. 유일하게 이동할 수 있는 시간이 출퇴근 시간이었지만 출근 시간은 빈틈없는 사람들 속에서 정신 줄잡기도 힘들었다. 겨우 궁리한 것이 퇴근길 노선을 늘리는 짓이었다. 집까지 지하철로 30분이면 가는 길을 굳이 남산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야경을 즐겼다. 소란했던 직장에서의 하루를 정리하고 집에 계신 부모님과 나눌 대화를 준비하면 얼추 집에 도착했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계획해야 할 일을 번잡함으로 정리하지 못하다 보니 늦은 시간이라도 나를 비워내고 계획해야 했다. 


난, 그랬다. 바쁜 나날의 지속으로 중간 점검을 하지 못하면 재봉틀에 낀 레이스가 박음질 없이 계속 밀려드는 것 같았다. 멍 때리는 일.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잠깐이라도 넋 놓아야 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걸 하고 싶은데 장애물이 무엇인지, 어떤 시점에서 행복해하는지 하나씩 걸러내는 시간이 필요했다. 돌아가는 퇴근길은 그 당시 유일한 쉼표였다.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 시선집 『섬』 중 「방문객」의 일부     


회사를 퇴사하고 이어진 결혼은 이토록 어마어마한 사람끼리 하는 동등한 생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삼 남매의 이 가족과, 육 남매의 저 가족이 만나서 해야 하는 일들은 생각처럼 동등하지 않았다. 가정에 구성원이 늘어나고 업무량도 많아지면서 미뤄짐은 쌓이고, 생각은 더뎌지고, 행동엔 오류가 생겼다. 몰라서 사고 치고, 사고 치고 모르는 일들이 반복되면서 나를 방치하는 일이 더 잦아졌다.

나만, ‘사람의 일생이 온다는 방문객’이 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호흡으로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며 다시 회복하는 일에 집중하고 싶었다.       

안면도. 혼자 떠났던 첫 여행지다. 

책을 서너 권 챙기고 노트북까지 넣었다. 적당함 보다 과한 옷가지를 넣고 슬리퍼와 운동화까지 챙겼다. 노련하지 못했던 여행자의 가방은 쓸모없음이 반이었다. 책은 한 권을 다 읽지 못했고 노트북은 말 그대로 폼이었다. 챙겨간 옷들은 접힌 그대로 옷장으로 들어갔고 운동화도 가방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나마 완벽하게 소진한 게 있다면 편지지 세트와 우표였다. 몇 장 가져가진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주 유용한 물품이었다.   

노을을 보기 위해 서해로 떠났던 첫 여행은 숙소를 잘 못 골라 해 뜨는 집으로 실패했지만, 혼자 떠난 여행의 효과는 오래갔다. 

다음을 준비하는 기대가 생겼고, 여유가 생긴 자리에는 가족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들어왔다. 물론 다시 반복되는 피곤함이 생겼지만 짧은 휴식은 보다 긴 윤택함을 남겼다. 더 좋았던 건 그 감정이 식을 무렵 안면도에서 보냈던 나에게 쓴 편지와 가족 개개인에게 쓴 편지가 도착했을 때였다. 


여행 가방은 점점 줄었다. 책을 줄이고 노트를 넣고, 노트북을 빼고 보조배터리를 챙겼다. 필요성에 따라 바뀌기도 했지만 짐이 정말 짐스러워 줄일 수밖에 없었다.      

몇 달 전에는 간단하게 계획하고 포항에 다녀왔다. 왕복 교통편과 숙소를 정하는 것까지만 치밀하게 했다. 호미곶 근처는 적당한 숙소가 없어 영일만 끝에 있는 숙소를 잡았다. 작아진 여행 가방조차 거추장스러워 던져놓고 현주민이 추천하는 맛집에서 기막힌 물회를 먹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가족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사랑이다. 빈속을 채우고 넉넉해진 생각으로 해파랑길을 따라 독수리 바위까지 걸었다. 빈손의 걸음이 세상에서 가장 느린 걸음이었다.     


여행은 많은걸 주지 않지만 쓸모없는 걸 덜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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