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을 방학답게
작년 여름 초등학생이 된 아들이 처음 방학을 맞았습니다. 어린이집에 다닐 때도 방학이 있었지만 고작 일주일이니 방학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의 방학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일상이 여느 때와 다름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초등학생이 되니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아들이 여름방학 이야기를 하는데 문득 초등학생의 방학이 한 달 이상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방학이구나, 특별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미 저는 저의 초등학교 방학 시절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저는 방학이 다가오면 늘 설렜습니다. 방학의 중심엔 항상 외갓집이 있었지요. 방학 때마다 외갓집에 갔고 외사촌들이나 외갓집 동네 아이들과 함께 놀았습니다. 외사촌들은 여전히 연락을 하며 보기도 하지만 외갓집 동네에서 같이 놀았던 앞집 누나, 옆집 친구와 동생들, 뒷집 동생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문득 궁금했습니다.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칼과 활을 만들며 놀았습니다. 때로는 딱지치기를 하거나 병뚜껑을 갖고 놀기도 했었지요. 동네서 굴러다니는 모든 것들이 놀이 재료가 됐습니다. 가끔은 외할머니가 주신 용돈으로 장난감을 사서 놀기도 했습니다. 그때 시절을 생각하니 저절로 즐거워졌습니다. 언제나 즐거운 방학이었으니까요.
초등학교 방학 때 숙제 외에는 공부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숙제조차 한 번도 다 해본 적이 없지요. 겨우 하는 시늉만 했습니다. 그런 제가 외갓집에 있는 동안 공부를 했을 리가요. 늘 놀기만 했습니다. 아침부터 해가 떨어질 때까지요. 얼마나 재미있었겠어요? 지금 생각해도 기분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같은 방학이 길지는 못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외할머니가 오래 살지 못하셨거든요.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저의 꿈같았던 방학도 끝이 났습니다. 그 생각을 하며 다시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저와는 완전히 다른 방학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맞벌이 부부다 보니 방학이 되어도 학교에 가고 공부도 합니다. 엄마 아빠가 집에 올 때까지 학원에도 다니지요. 이런 아이들의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 꿈같았던 방학 시절을 떠올렸더니 아이들의 방학이 너무 재미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방학을 방학답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침 직장인에게도 보장된 휴가와 주말이 있으니 그 시간만 집중적으로 활용해도 아이들에게 충분히 멋진 방학을 만들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아이들 덕에 나도 방학 한번 제대로 즐겨보자. 옛날처럼.’
아이들과 방학 계획을 세웠습니다. 아이들에게 방학 때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을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딸이 하고 싶은 것은 놀기(놀기, 워터 파크 가기, 만화카페 가기, 애견카페 가기, 자전거 타기)가 대부분이었고 홍대와 인천을 가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해야 할 것은 방과 후 수업, 학원, 공부, 독서, 운동이었습니다. 늘 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본인이 뭘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초등학교 5학년 기특한 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이 하고 싶은 것도 놀기(아빠와 축구, 놀기, 오락실 가기, 엄마 아빠와 놀러 가기)가 제일 많았으며 프랑스 여행과 베이블레이드 뮤지컬 보기도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2018 러시아 월드컵 우승의 영향이었고 베이블레이드는 광고효과였습니다. 아들은 “엄마 아빠와 놀고 싶은데 놀 수가 없네요.”라고도 했습니다. 엄마 아빠와 놀고 싶은데 엄마 아빠는 일하러 가서 놀 수가 없다고 말했던 거지요. 엄마 아빠와 오래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들의 마음을 알고도 그러지 못하니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하고 싶은 것과 아이들이 했으면 하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아빠가 하고 싶은 것은 할머니 댁 방문, 야구장 가기, 다른 가족(함께 놀 아이들이 있는 가족)과 함께 여행 가기, 극장에서 영화 보기, 서점가기, 도서관 가기, 미술관 가기, 물 놀이터 가기야. 그리고 너희들이 했으면 하는 것은 독서, 운동, 공부, 친구와 놀기, 할머니 댁 방문, 일기 쓰기, 매일 우리 가족 칭찬하기, 선생님께 편지 쓰기란다.”
아빠와 아이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제 안에 있는 아이와 진짜 초등학생인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버물렸습니다. 엄마 아빠도 같이 즐거워야 하니 우리 부부가 하고 싶은 양념도 살짝 쳤습니다.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 할 '주말마다 찾아오는 특별한 방학 열가지 아이템'을 만들었습니다. 열 가지 아이템은 할머니 댁 방문, 가족여행, 다른 가족과 함께 여행 가기, 물 놀이터 가기, 미술관에 가기, 음악회에 가기, 영화보기, 야구장 가기, 서점가기, 도서관 가기였습니다. 아이들의 방학이 5주쯤 되니 토요일 일요일에 한 번씩 하겠다는 생각으로 정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는 동시에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으니 어렵지 않게 열 가지 특별한 방학을 다 누릴 수 있겠다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계획했더니 아이들의 방학 시작과 함께 우리 가족에겐 주말마다 진정한 방학이 찾아왔습니다. 방학이 시작하고 처음 맞은 주말 우리 부부는 여름휴가를 내고 아이들의 할머니를 만나러 내려갔습니다. 아이들은 할머니도 보고 싶어 했지만 사촌들과 함께 놀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생각대로 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하필 우리가 처갓집에 갔을 때 두 처남들 모두 급한 일정이 있어 만나지 못했습니다. 대신 아이들은 외할머니와 영화 <신비 아파트>를 봤습니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장모님도 즐거워했습니다. 그날은 맥도널드에서 맥모닝을 먹고 영화를 봐서 마치 여행을 하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아이들 할머니 집에 가서는 물 놀이터에 갔습니다. 시골이지만 서울 우리 동네에 있는 물 놀이터보다 시설과 물이 더 깨끗해서 훨씬 만족스러웠습니다. 그 날 가져간 비치볼이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습니다. 저는 두 아이들을 따라다니고 도망치다 지쳐 나가떨어졌지만 아이들은 그 어떤 때보다 즐거워했으니까요. 저녁에는 오랜만에 사촌들과 만나 즐거운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아이들은 육촌들과 신나게 놀았고요. 그러면서 외갓집에서 사촌들과 놀지 못한 아쉬움을 조금은 덜어냈습니다.
우리는 양가 어머니를 뵈었고 아이들은 할머니들의 사랑을 받고 영화도 보고 물 놀이터도 갔으니 일석삼조 그 이상이었습니다. 아이들도 좋았지만 저도 즐거웠습니다. 어머니와 장모님을 뵙고 와서 마음이 편했고 사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니까요.
방학에 여행이 빠지면 앙꼬 없는 찐빵이지요. 우리는 주말을 활용해 두 번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한 번은 우리 가족끼리만 갔고 한 번은 이웃사촌들과 함께 갔지요. 우리끼리 가는 여행도 좋지만 아이들은 자기들이 함께 놀 친구들이 있는 다른 가족과 같이 가는 여행도 좋아합니다.
우리 가족끼리는 양평으로 짧은 1박 2일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의 테마는 물놀이였습니다. 이틀 연속 워터슬라이드가 있는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했지요. 아이들과 비치 볼 던지고 받기, 수구, 잠수 게임, 워터슬라이드 타기 등 다양한 놀이를 하며 오랜만에 동심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랜만에 초등학교 5학년 딸의 수영실력도 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우리 부부를 위해서는 검색 평가가 가장 좋은 카페에 갔습니다. 아이들이 먹고 싶은 팥빙수를 먹고 우리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잔했지요. 커피 맛이 탁월해서 원두 이백 그램을 사 왔습니다. 카페에서 제로게임을 했는데 초등 1학년 아들이 너무 신나 해서 우리보다 아이들이 더 즐거웠던 카페 나들이였습니다.
아들은 여행을 간다고 하면 꼭 한번 물어보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랑 가?, 우리만 가?"
다른 가족들이랑 같이 가면 자기랑 같이 놀 친구나 또래가 있어서 그렇겠지요. 같이 가고 싶다는 우회적인 표현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예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만난 이웃사촌 세 가족들과 함께 철원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금요일 퇴근 후 떠나서 2박 3일 동안 여행을 했습니다. 토요일에는 한탄강에서 래프팅을 했습니다. 엄마들은 빼고 아빠들만 아이들과 함께 했었지요. 아이들이 너무 좋아했습니다. 래프팅 하다가 다이빙 장소에서 신나게 다이빙하는 아이들을 볼 때는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용감했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래프팅이 끝나고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우리 내년에 또 와요.”
저녁에 어린아이 세 명을 데리고 산책을 했습니다. 호수에서 뱀도 보고 강에서 고기도 봤습니다. 별빛이 내리는 한적하고 조용한 철원 들판을 돌아오는데 문득 세 아이들과 사진을 찍고 싶었어요.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얘들아, 여기 봐.”라고 말했는데 거기서 제일 어린 미취학 아가씨가 저를 포근하게 안아줬습니다. 갑자기 셋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가 있어 내가 이런 행복을 누리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요.
방학 때는 문화 예술 활동하기에도 좋은 시기입니다. 아이들 방학에 맞춰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니까요. 처음에 미술관에 가자고 했더니 딸은 좋다고 하는데 아직 그림에 관심 없는 아들이 안 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그림 체험하러 가자!"
똑같은 것이지만 체험은 좋아하는 아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가면 또 좋아합니다. 오디오 가이드 끼워주면 미션 클리어한다고 온데 돌아다니며 다 듣는 아들이니까요. 출발 전에 헤드셋 하나 챙겨서 끼워줬더니 열심히 돌아다니고 숫자를 못 찾을 때만 아빠와 엄마를 찾았습니다. 역시 오디오 가이드가 효자였습니다. 미술 체험한다고 약속했으니 미술체험도 했지요. 그림을 그려서 머그컵에 새기는 체험을 했습니다. 자기가 그린 그림이 새겨지고 집에 갖고 왔더니 그 컵으로 물을 마십니다.
아이들은 노래방을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도 즐거워야 하니 세종문화회관에서 하는 가족 콘서트를 갔습니다. 아이들 방학기간에 맞춰 열린 콘서트였습니다. 오페라 합창, 뮤지컬, 한국민요, 가요와 팝송,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공연입니다. 중간중간 아이들이 노래하는 장면도 있어 아이들도 눈빛을 반짝이며 봤습니다. 그래도 공연은 아직 엄마 아빠가 아이들보다 더 즐겁습니다. 집에 오는 길에는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렀습니다. 책을 하나씩만 사주기로 했는데 아이들이 양손에 하나씩 들고 놓지를 않았습니다. 책을 사달라는데 마다할 부모가 있을까요? 흔쾌히 사주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준 방학선물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주말을 보냈더니 아이들의 방학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매주 방학이 찾아왔고 아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정말 특별한 행복이 됐습니다. 물론 처음에 계획한 대로 다 되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외할머니 댁에서 사촌들과 놀지 못해서 아쉬웠고 저는 한여름 밤 라이온즈 파크에서 야구를 못 본 것이 조금은 아쉬웠습니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도 5년간은 방학이 있을 테니까요.
한편으로는 5학년이 된 딸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아빠가 이제야 방학다운 방학을 시작했으니까요. 딸이 조금 더 어렸을 때 시작했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방학이 세 번밖에 남지 않은 딸을 위해 지금 이 겨울방학과 6학년 두 번의 방학은 딸 맞춤형 방학 계획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딸의 의견을 더 많이 반영할 생각입니다. 스키와 스케이트를 좋아하는 딸과 스키장도 가고 스케이트장도 갈 생각입니다. 겨울축제에 가서 눈썰매도 타고 얼음낚시하는 것도 뺄 수 없겠지요. 가족 여행도 하고 할머니, 외할머니도 뵈러 갈 생각입니다.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하니 친구들과 함께 놀이공원에도 보낼 것입니다. 이제는 혼자서도 잘 다니는 딸이니까요. 이렇게 딸이 방학다운 방학을 보내면 행복한 추억으로 가득한 아이로 자랄 것입니다. 행복한 추억은 곧 사춘기를 맞을 딸의 버팀목이 될 거고요.
매주마다 맞이하는 방학다운 방학이 늘 기다려집니다. 어떤 특별한 행복을 만들지, 어떤 행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두근댑니다. 아이들의 방학이 곧 저의 방학이기도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