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학원에서 돌아온 딸에게서 찬바람이 확 느껴졌다.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좋지 않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아빠로서 그것을 꼬치꼬치 캐묻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해결할 수 없을 문제일 확률이 높기도 하고. 그래도 아빠의 역할은 해야 한다.
시간이 좀 지나 딸에게 이야기했다. "사람은 누구나 기분이 안 좋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마음을 그냥 두는 건 스스로에게 바람직하지 않다. 너는 네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네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친한 친구를 만나거나 그것도 아니면 잠을 자거나"
딸에게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분이 지하로 내려갈 때가 있다. 그럴 땐 다시 지상으로 올라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스스로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가까운 사람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좋은 기운도 향수처럼 퍼지지만 나쁜 기운도 똥 냄새처럼 퍼지기는 마찬가지다.
얼마 전 딸이 겪었던 어두운 터널의 기분을 요즘 내가 느낀다. 인사철마다 겪는 아픔을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겪고 있다. 나의 승진과 관련된 건 아니다. 내가 맡고 있는 직책과 관련된 문제다. 솔직히 말하면 내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고 항변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애쓴다.
딸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터널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한다. 내 어깨가 쳐질수록 주위에 있는 사람도 그럴 수밖에 없다.
며칠 전 휴가를 내고 여행을 다녀왔다. 당연히 나에게 힘을 주는 친구들과 함께. 월악산 제비봉에 올라 충주호를 바라보니 꿈적 않던 철문이 활짝 열리는 기분이었다. 등산 90%와 달리기 10%의 트레일 러닝은 내 마음을 몇 미터는 날게 했다. 내려와서 마신 소백산 막걸리는 남아있던 찝찝함도 씻었다.
나에게 기운을 주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도 읽는다. 그의 말은 백옥 같아 버릴 게 하나도 없다.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곡하거나 광분할 때 거기에 부화뇌동하지 말라"
이 문장을 읽으면서 한 번 더 다짐한다. 파도가 되지 말자.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이 되자.
좋은 음악을 듣고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가볍게 술을 한잔하는 것도 지하에 있는 나를 지상으로 올리는 엘리베이터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12월을 벗어나고 있다.
마음을 채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술? 여자? 도박?
아니다. 시간이다.
움푹 팬 바닥을 채우는 것도 시간이고 젖은 빨래를 말리는 것도 시간이다. 시간이 지나면 허한 마음은 조금씩 채워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오래 기다릴 수 없는 존재가 사람이니, 이럴 땐 스마트폰을 급속으로 충전하듯 마음도 빨리 채우는 방법을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