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큰 게 아니야
어렸을 때를 생각해 보면 엄마는 항상 일하시느라 바빴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면 조용히 이야기 나누는 풍경은 나의 기억에는 없다. 모두 바쁜 가족들... 각자 자신을 살아내느라 힘겨운 가족이었다. 나는 나대로 밥그릇을 챙겨야 한다는 일념으로 엄마는 엄마대로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항상 생활전선에 계셨다.
어렸을 적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 갔는데 고열로 힘을 쓸 수 없자 담임 선생님께서 엄마한테 연락하셔서 나를 데리고 가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당한 고열이었던 것 같다.
엄마가 급하게 오셔서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는데 주사 맞고 약을 먹는 일련의 일들을 마치고 나를 다시 학교로 데리고 가셨다. 마저 수업을 들어야 한다면서 말이다. 나는 그때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엄마의 손에 이끌려 다시 학교로 가게 되었는데 나도 놀랐지만 담임 선생님께서는 나의 몸상태가 좋지 않으니 조퇴하라고 권하셨다. 하지만 엄마는 아니라고 남은 수업을 다 받게 해달라고 하셨다. 선생님께서 조퇴처리 안 할 테니 데리고 가라고 간곡하게 말씀하신 후에야 나는 집에 갈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어린 마음에 몸도 안 좋아서 그랬는지 엄마가 계모인 줄 알았다. 지금은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얘기지만 그때는 꽤나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이제까지의 얘기를 들어보면 엄마가 상당히 극성스러운 엄마 이미지이지만 반전은 여기부터다.
아마도 내가 어렸을 때 자주 아파서 유치원도 제대로 못 다니고 졸업식 때 다른 친구들 다 받는 선물도 못 받고 나만 안 줄 수는 없으니 형식적으로 주는 선물을 받은 게 전부인데 어린 나이에도 많이 서운했다. 아마도 옆에서 지켜보시는 엄마도 마음이 그리 좋지는 않으셨을 거다. 그래서일까? 초등학교에서 가면서부터는 나에게는 결석이란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아니,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심지어 대학교 4년을 결석 한번 하지 않은 개근을 하였다. 아마도 이런 힘 때문에 내가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근력의 코어가 쌓인 것 같다.
초등학생부터의 나의 성격 급함과 극성스러움은 아마도 엄마가 감당하기에는 많이 힘드셨을 것이다. 주사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나는 학교에서 예방주사가 있는 날이면 나를 찾아내느라 선생님들이 뜻하지 않은 숨바꼭질을 해야 했고, 동사무소에서 무료로 놔주는 주사는 난리를 넘어서 난동을 부려 간호사님이 몇 분이 달라붙어야 겨우 주사를 맞았으니 엄마의 입장에서는 주사 맞는 날이 나보다 더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갖은 방법과 수단이 동원되었고, 주사 맞으러 가는 날 짜장면을 먹이면서 달래고, 주사 맞으면 내가 좋아하는 빵으로 유혹해도 귀신같이 분위기 파악해서 도망 다니느라 바빴다.
더 대박인 것은 치아를 하나 빼려면 치과에 가서 대기하는 동안 안에서 나는 소음에 놀라 2-3번씩 달아나는 것은 기본이다. 엄마 말로는 그때 내가 번개처럼 빨랐단다. 매번 잡으러 다니기 힘들어서 이모가 나를 뒤에서 붙잡고 엄마가 고추장 만들 때 쓰는 큰 주걱으로 위협하며 힘들게 치아를 뽑았다.
또 한 번은 이웃집 언니와 자전거를 타다가 과격하게 타면서 페달에 종아리 안쪽이 5cm 찢어졌는데 병원을 가기까지 여정이 안 봐도 상상이 간다. 누가 보면 대형사고가 난 줄 알았을 것이다. 대성통곡에 수술받으면서도 수술실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사실상은 7 바늘 정도만 꿰면 되는 간단한 시술이었다.
아직 까지 남아있는 종아리의 흉터를 보면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런 소소한 에피소드들은 다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고, 한번 마음먹거나 가지고 싶은 것이 생기면 얻어낼 까지 엄마를 괴롭혔다. 나에게 시달리기 싫으신 엄마는 또 그것을 해주셨고, 나는 이미 쟁취할 방법을 습득하고 있었다.
지금도 엄마랑 얘기하면 엄마가 나를 극성적으로 보는 이유는 예전에 내가 중고등학생시절 일 갔다가 새벽에 들어오시면 육체적으로 많이 피곤하신데 내가 시험기간이면 어김없이 교복을 다 입고 학교 데려다 달라고 했단다. 너무 이른 것 아니냐고 하시면 일찍 가서 공부해야 한다고 엄마를 재촉했다. 막상 학교에 도착하면 경비아저씨들도 주무실 시간이고 온 세상이 깜깜했다. 간신히 문을 열어주시면서 왜 이렇게 일찍 왔냐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그런 것에 아랑곳 않고, 학창 시절의 나는 유별나고 독특했다.
어느 부분에서는 엄마와 나는 다른 시각으로 사건을 보기도 한다. 나에게 좋은 기억이 엄마에게는 버거웠을 수도 있고, 엄마가 기억 못 하는 부분이 나에게는 힘든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우리 모녀는 요즘은 지난 세월에 못다 한 이야기를 하느라 바쁘다.
아침이 되면 운동하는지 여부로 시작해서 시간 나는 대로 친구처럼 자주 통화하는 편이다. 나는 내가 잘나서 혼자 잘 큰 줄 알았던 오만한 때도 있었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나의 극성스러움에 엄마의 묵묵한 지지와 지원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감당해 주고 나를 감싸 안아주신 엄마라는 존재가 더없이 크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외할머니와의 교감이 높았던 나는 내가 대학교 3학년, 외 할머니가 80세가 되시는 날에 떠나가셨다. 감사하게도 나의 꿈에 몇 번 찾아와 주신 외 할머니. 이제 엄마도 할머니와 비슷한 연배로 가시는 중이다.
아직도 열정적이시고 365일 다이어트 중이며 외모도 신경 쓰시는 우리 엄마.
내 또래 엄마들보다 훨씬 스마트하시고, 매사에 긍정적이고 베푸는 것 좋아하시는 엄마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