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강한 생활력

나도 엄마를 닮아 있었다.

by 정새봄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항상 생활전선 맨 앞에서 진두지휘하는 이미지셨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더 어린 유아시절에는 엄마는 밖에서 일하고 계셔서 집에 혼자 있는 게 두렵고 엄마가 그리웠던 기억이 난다. 유난히 어린 시절 건강이 좋지 않아서 유치원도 1/3밖에 나가지 못했다. 면역에 약해서 온갖 전염병들을 달고 살았다. 이런 자식을 두고 일을 가는 엄마의 마음도 당연히 무거우셨을 것이다. 왜 엄마는 이토록 평생 일을 하시는 걸까? 사실 우리 아버지는 내 또래의 아버지들과는 다르게 대학원까지 나온 고학력자이다. 남들보다 많이 배우셨지만 현실과의 괴리감이 커서 번듯한 직장생활을 하지 못하셨다.

기회가 될 때마다 사업에 손을 댔고, 그 사업이 끝까지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모든 사업자금은 엄마가 꾸준히 대셨고, 사업이 실패하면 고스란히 그 빚도 엄마가 다 갚아 나가셨다.


어린 나이에도 이런 엄마가 대단해 보였고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 모든 사업자금을 합하면 아마도 건물 몇 채는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중3 때 아버지의 부재를 겪었고, 엄마는 우리의 유일한 보호자가 되셨다. 그때가 40대 초반이었으니, 지금 내 나이에 겪었을 엄마의 힘든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힘든 상황에서도 사춘기라는 것은 어김없이 찾아와서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말들을 융단폭격으로 엄마한테 쏟아냈던 것 같다. 엄마가 나에게 해준 게 뭐냐부터 시작해서 가슴을 헤집는 그런 말들을 말이다.


두 살 터울 위의 오빠와도 사이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어서 대화를 많이 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나의 예민한 청소년기 시절은 그렇게 더 예민하게 흘러갔다.


엄마는 살아내기 위해서 포장마차를 짜와서 분식을 만들어 파시기 시작했고, 단속반들에게 쫓기고 포장마차

부서지면 또 새로운 것을 짜와서 다시 시작하곤 하셨다. 그 당시에도 엄마의 이미지는 밟으면 다시 일어서고 밟으면 또다시 일어나는 잡초를 연상케 할 정도로 강인한 엄마였다.


나중에는 한 건물 모퉁이에서 자리를 잡아서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무사히 보낼 정도로 괜찮은 수입을 벌기 시작했다. 훗날 안 얘기지만 엄마가 그 포장마차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그 건물 전체를 일이 끝나는 새벽시간부터 청소를 해주기로 하고 시작하셨단다.


그렇게 힘든 일과를 끝내고 나면 엄마는 외할머니를 새벽에 꼭 목욕탕에 모시고 가서 다 씻겨드리고 집에 와서 늦은 잠을 취하셨다.


지금의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더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나는 가끔 생활력이 강하다는 말을 듣곤 한다. 이 세상 텐션이 아니라는 등의 말을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속으로 나원씨의 딸이라는 것을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다.


나도 세월이 지나면서 엄마를 똑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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