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세상
북극곰이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가며, 뒤따르는 새끼를 자꾸 돌아보는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자주 보았다. 뒤를 따라오는 새끼의 안부가 궁금해서일 거다. 어찌 궁금하지 않겠는가. 자기 새끼보다 더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부부가 외출할 때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게 될 때가 가끔 있다. 앞에 가는 아내가 뒤돌아보아 주지 않고 곧장 걸어 건널목까지 건너 버렸을 때의 섭섭함을 경험한 적이 있다. 뒤돌아보고, 조금 기다려 주는 애틋한 마음이 아쉬울 때가 있다.
매월당 김시습이 쓴 <금오신화> 6편의 한문 소설 가운데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가 있다. 만복사는 그 소설의 무대였던 고려 시대의 사찰이다. 전북 남원시 왕정동에 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에 불타 없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동안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만복사지를 찾았다. 도로 위에서 바라보는 만복사지는 상당히 넓은 절터였다. 안내문에 의하면 3,200평이라 했다. 돌로 된 오 층 석탑과 불상 좌대, 당간지주, 석불입상, 석등 좌대, 많은 건물의 초석 등 다수의 석조물이 옛날 번성했던 사찰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중에서 석조여래입상 하나만 건물 안에 따로 보존되고 있었다.
길 위에서 보니, 당간지주 너머 석불입상이 고독한 듯 혼자 서 있었다. 부여 정림사지의 석조여래좌상을 닮은 듯 투박하나 고졸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바로 만복사지 석인상(萬福寺址 石人像)이었다. 키가 커서 올려다보는 나를 압도하였다. 안내판을 보니, 전체 높이는 550cm, 머리 위에서 다리 끝까지가 370cm라고 소개되어 있다. 얼굴을 자세히 보니 부처님의 인자하심은 없고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무서운 모습이었다. 뒤쪽에 위아래로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금강역사상(像)을 한 당간지주로 사용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바라보고 있는데, 앞으로 굽은 두 팔과 얼굴의 방향이 서로 달랐다. 그 자세가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금강역사가 되었든, 석인(石人)이 되었든 우리나라에서는 보지 못했던 뒤를 돌아보고 있는 석조상(石造像)이었다.
너무나 반가웠고 기뻤다. 우리나라에도 뒤를 돌아보는 석상이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지고 훈훈한 바람이 불었다. 어미 곰의 사랑과 부처님의 자비가 나의 가슴에도 가득 채워지는 듯했다. 뒤돌아보는 석조상이라는 문구는 안내문의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찬찬히 석인상을 보았다. 역시 뒤를 돌아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일본 교토(京都)의 영관당(永觀堂) 선림사(禪林寺)의 본존불이 ‘뒤를 돌아보는 아미타불(見返り阿弥陀)’이었다. 이제까지 보아 온 부처님은 모두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으로 만난 ‘뒤를 돌아보는 아미타불’의 눈빛은, 북극의 눈밭을 걸어가는 어미 곰의 보살핌이며 사랑이었다. 곰으로 환생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어미곰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세상을 밝히는 등불을 들고 앞에서 걷고 있는 부처님께서 뒤를 따라오는 중생을 염려해 주시는 자비로운 눈빛이었다.
우리말에 ‘돌보다’라는 단어가 있다. ‘돌아보다’에서 연결어미 ‘아’가 생략된 형태라고 한다. 즉 ‘돌아보다’는 ‘돌보다’와 같은 의미이다. ‘돌아보는 아미타불’의 그윽하고 자비로운 돌봄의 눈길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있었다.
자기 뒤를 따라오며 힘들어하는 이를 돌아보는 돌봄, 자신의 현재 위치와 주위를 살펴보는 겸손, 자신이 들고 있는 등불의 그림자를 염려하는 성찰, 따뜻한 마음으로 주위에 사랑이나 정을 베푸는 자비, 중생과 함께 앞으로 정진하기 위한 부처님의 보살핌 등을 의미하는 ‘뒤돌아보는 아미타불’을 가슴에 새기며 돌아왔다. 어쩌다 앞서 걷게 되면, 뒤돌아보아 주고, 기다려주고, 같이 걸어가겠다. 그것이 사랑이고, 사람 사는 세상일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