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스터 앤 미세스 아델만'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앞서 개봉한 니콜라스 베도스 감독의 ‘카페 벨에포크’를 아주 흥미롭게 보았다. 주인공이 돌아가고 싶은 기억 속 어느 날을 말하면, 시간여행 설계자가 그 기억을 바탕으로 연극 세트를 짓고 배우를 동원해 과거를 불러내주는 이야기였는데, 몹시 따뜻하고 유쾌했다. 돌아가고 싶은 기억 속 장면을 연출한다는 발상이라니! 이 감독에겐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최근 개봉작 ‘미스터 앤 미세스 아델만’ 역시 인물들의 과거를 배경으로 한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본다는 점에서는 ‘카페 벨에포크’와 닮았지만, 스토리 자체보다 감독의 자기주장이 더 많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영화는 빅토르의 장례식 장면으로 시작한다. 생전에 작가로 명성을 떨친 빅토르가 갑작스레 죽음을 맞자 사람들의 시선이 아내 사라에게로 모인다. 사라가 남편을 절벽에서 밀었다고 생각하는 듯한데, 사라는 흔들림이 없다. 빅토르의 전기를 쓰고 싶다며 한 작가가 장례식장으로 찾아오고, 사라는 손님들을 피해 인터뷰를 시작한다. 영화는 사라의 답변을 따라 1972년, 빅토르와 그녀가 처음 만난 순간으로 돌아간다.
빅토르에게 첫눈에 반한 사라가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분투하던 모습부터,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을 시작한 순간들, 예술에 대한 견해를 나누던 순간들까지, 영화는 긴 시간을 속도감 있게 압축해 보여준다.
즐거운 시간도 잠시, 빅토르는 창작에 어려움을 겪으며 자기비하를 일삼는다. 사라는 그런 빅토르를 위해 자신의 재주를 한껏 발휘한다. 그녀는 빅토르가 써놓은 글을 다듬고 고쳐 그를 유명 작가로 만든다.
사라는 아델만이라는 성을 가진 유대인이다. 빅토르가 사라의 집에 처음 초대되어 간 날, 그는 유대인(가족)의 모습에 매료되어 유대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급기야는 자신의 성씨를 아델만으로 바꾸어버린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 집안의 자손인 것처럼 관련한 이야기들을 글로 써내고, 그 소설로 성공을 거머쥔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주변에서 소재를 찾던 빅토르는 다음 작품으로 자신의 엄마 이야기를 (그대로) 소설로 형상화하는데, 소설을 읽은 엄마는 충격으로 자살한다. 빅토르의 책이 연이어 성공하며 빅토르와 사라는 재력도 얻게 되지만 둘의 관계는 점차 어긋난다.
사라는 빅토르를 떠나 재혼하지만 사라만을 평생의 동반자로 여겨온 빅토르는 그녀를 잊지 못하고, 그녀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태껏 빅토르가(사실은 사라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에 담아낼 때는 느껴 보지 못했던 고통을 사라 자신도 느끼게 된다.
이 영화가 ‘카페 벨에포크’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일생을 통해 최근 예술계(특히 문학계)에서 대두되는 문제들을 묘파해 나간다. 언뜻 한 편의 드라마로 보이는 이 영화 안에는 예술계를 둘러싼 논란들이 여럿 담겨 있다.
가장 먼저 작가가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소재로 삼는 것에 대해.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문제로 논란이 됐던 작가들이 있다. ‘창작자의 윤리’ 문제다. 때때로 자신의 삶이 그대로 작품에 포함되어도 좋다고 승낙했던 사람들마저, 작품이 나오고 나면 고통스러워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누군가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 단 하나의 방식으로 묘사되고 규정되는 순간, 자신의 삶을 해석할 권리마저 빼앗긴다고 느끼는 것이다. ‘미스터 앤 미세스 아델만’ 속 빅토르의 엄마 역시 그랬다. 그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목숨을 끊었고, 빅토르는 그 충격에 14주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빅토르와 헤어진 후 책의 소재가 된 사라 역시 고통을 호소했다. 감독은 주변 인물들과 그들의 삶을 소재로 취하는 것을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을지 관객에게 묻는다.
또 하나는 대필 이야기다. 위 줄거리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영화 말미에 사라는 인터뷰를 하러 온 작가에게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한 가지 비밀을 털어놓는다. 사실 빅토르가 유대인이 되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사라가 계획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사라는 빅토르의 소설을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 남편에게 자신의 성씨를 붙여 소설을 출간하게 했고, 창작에 대한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는 그에게 초안을 써서 넘겨 주었다. 빅토르가 쓴 소설은 사라의 손에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다. 사라는 빅토르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빅토르 소설의 지배자였던 셈이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으니, 피츠제럴드와 그의 부인 젤다다. 잘 알려진 것처럼 젤다는 피츠제럴드에게 영감 그 이상의 존재였다. 젤다 역시 작가였지만 남편 스콧 피츠제럴드의 그늘에 가려졌고, 그녀의 작품들은 대부분 스콧과 공저로 출판됐다. 심지어는 스콧의 이름만으로 발표된 작품도 있었다고 한다. 남성 중심의 사회가 여성의 이름으로 출간되는 작품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젤다는 끝끝내 남편을 알코올중독으로 내몬 ‘미친 여자’ 취급을 받았다.(이 대목에서 아쉬운 점은 영화가 사라를 ‘남편에게 영감을 주는 것을 즐기는 사람’으로 그렸다는 것인데, 제 힘으로 설 수 없어 고통받았던 당시 여자들을 생각하면 문제적인 묘사다.)
‘미스터 앤 미세스 아델만’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몇몇 유명 커플이 떠오른다. 상대를 다시 없을 영혼의 동지로 생각했으면서도 자유연애를 추구했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작품에 대한 서로의 안목을 누구보다 존중했던 김환기와 김향안, 예술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 목표를 향해 함께 걸었던 퍼포먼스 아티스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그의 연인 울라이까지. 어쩌면 예술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생각을 교류하고, 논박하고, 그를 통해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할 동료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감독 역시 이 부분을 가장 힘주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미스터 앤 미세스 아델만’을 연출하고 출연한 니콜라스 베도스와, 이 영화의 각본을 함께 쓰고 출연까지 한 배우 도리아 틸리에 역시 실제 연인 관계였다. 서로의 판단을 누구보다 신뢰하면서도 언제든 따끔하게 필요한 충고를 할 수 있는 사이. 그런 상대가 꼭 예술가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