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

by 간질간질

수제비는 글을 써서 먹고 산다. 원래-원래라는 것이 있을랴마는- 신문사와 잡지사를 겪은 기자였다. 아무리 잡지가 안 팔린다고 하지만, 전혀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기사를 써서 광고주의 물건을 홍보해주고 돈을 벌어오라는 편집장과 대판 싸우고 나선 그만뒀다. 사회정의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투철한 기자정신을 가진것도 아니었고, 저널리즘을 신봉하는 신도도 아니었건만 자존심을 몇 백만 원에 팔아넘기는 것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다.


"한 두 번도 아니고..."

수제비는 가끔씩 혼잣말처럼 내뱉곤 한다. 전형적인 소시민 수제비는 광고주에게 어느 정도 비위를 맞춰야 하고 적절한 줄타기를 하면서 기사를 써야 한다는 것을 모를 만큼 돈이 많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는 맞춰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편집장의 요구는 뻔뻔했고, 반복되었으며, 상대방을 비하하는 말투까지 한 번 거슬리기 시작하니 얼굴만 봐도 토악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편집장의 말투가 퇴사를 결심하게 만든 트리거가 되었다. 한 번은 참고, 두 번도 참겠으나 세 번은 못 참겠다는 수제비의 자존심. 아직 나이가 많지 않고 딸린 식구가 없기에 과감히 뛰쳐나왔지만 사람은 역시 먹어야 산다.


평소에 살갑게 굴지는 않았어도 좋게 봐준 동료와 선후배들이 있기에 가끔씩 외고 문의가 들어온다. 외고를 놓고 선배와 실랑이 중이다. 이 선배는 지면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온라인 미디어를 거쳐, 포털에서 뉴스 제휴를 담당하다 다시 디지털 매체의 대표를 거쳐 지금은 사업가다. 이 선배가 잘 되기를 바라는 수제비는 반갑게 선배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난 후 먹고살기 위한 협상에 들어간다.


"분량 하고 가격이 어떻게 된다고요?"

"A4지 2장 정도면 되고, 건당 15만 원을 줄 거야"


수제비는 트렌디하지 못하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환상 중에 하나가 새로운 것에 민감하고, 새로운 것을 써내는 기자들이 트렌디할 것이라 믿는다는 점이다. 기자들도 사람과 같다. 관심 있는 분야라면 최첨단의 앞자락에 서 있지만 관심 없는 분야에선 보통 사람들의 상식보다 훨씬 뒤처져 있는 집단이다. 수제비는 새로운 글 가격 셈법에 익숙하지 않다.


"A4지 2장이면, 200자 원고지로 몇 매인 거예요?"

선배는 기자로 출발은 했지만, 이미 신문이나 잡지의 글쓰기 양식과 셈법에서 벗어나 디지털로 한참 진화한 상황이라 알아는 들어도 대답은 하지 못했다. 수제비가 기억을 떠 올려본다.


"A4지 한 장이면, 약 1,600자가 들어가니까 200자 원고지 8매 수준이 되겠네요"

지면의 한계가 만들어낸 기자들의 셈법이다. 종이와 디지털은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지만 물리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양의 차이가 가장 크다. 종이에는 담을 수 있는 양이 한정되어 있다. 아무리 좋은 기사라고 해도 한 면에 담을 수 있는 글자 수는 정해져 있다. 폰트를 줄이면 되지 않냐는 생각을 했다면, 신문에서 폰트크기가 다른 본문은 없다고 설명해줘야 한다. 제목과 부제의 크기는 다를지 몰라도 본문의 글자크기는 동일하다. 그것이 아날로그식 신문 만들기의 기본이며 틀이다. 아니. 신문을 지배하는 법이다.


신문 지면 한 장에 들어가는 글자 수가 정해지고, 기사의 크기에 따라 담을 수 있는 글자 수가 쪼개진다. 3단이니 5단이니 하는 말들이 신문을 만들던 기자들의 셈법이고, 1피(P)니 2피(P)니 하는 것이 잡지 기자들의 셈법이다. 기사가 들어갈 영역이 확정되면 당연히 다음 질문은 '몇 자로 써야 하냐?'가 된다. 영역이 고정되었으니 그 안에 들어갈 글은 그 영역을 넘쳐도 안되고, 모자라게 써도 안된다. 영역에 글자 수를 맞추는 작업을 해야 한다.


기자들이 마감에 겪는 고통은 분량 조절 때문이다. 중요한 내용을 다 담아내자니 면이 모자라고, 줄여서 쓰자니 면이 남는다. 당연히 남아있는 이야기들을 해당 영역에 맞게 자르고 붙이고, 덜어내고, 축약해야 한다. 이런 일은 기자들이 매체사에 입사해서 겪게 되는 당연한 일이고, 생활이고, 업이 된다. 밥벌이가 되는 순간 '글자 수'라는 것은 '기자들끼리의 세계에서 통하는 전문 언어가 된다.


"오늘까지 1,600자짜리 칼럼을 써야 하느라 바빠"

"이건 700자가 넘잖아. 줄여야 한다니까!"


수제비는 이런 생활에 익숙하다. 그래서 선배에게도 똑같이 질문한다. 본인들은 익숙하지만, 그 업계에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알지 못한다. 마치 관공서 사람들과 아래아한글 문서를 주고받는 것과 같다. 요즘 MS-Word가 대세라고 해도 관에서 아래아한글을 고집하면 그 언저리에서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알아서 아래아한글을 구해서 써야 한다. 수제비는 관도 아닌데 아직 때를 벗지 못했다.


"그럼, A4지 2장이면 16매 정도가 되는 거고, 15만 원 주신다고 했으니 1매당 1만 원이 안되네요. 헐값이다"

수제비의 말처럼 머릿속에서는 익숙한 경로를 지나쳐 금액이 나왔고, 판단이 되었다.


"좀 적긴 하지?"

선배가 민망한 듯 말했다.

"논설위원이나 칼럼을 쓰는 사람들은 아니더라도 종합지 기자라면 못해도 원고지 1매당 2만 원은 받아야 하는데, 잡지사라도 1.5만 원은 되어야 하고요"

수제비는 아직 자기가 현업에 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배고픔은 금세 현실을 깨닫게 한다.


"할게요. 다음에는 좀 더 올려주세요!"

"그래. 알았어"


수제비는 노트북을 열고 워드를 실행시킨다. 수제비의 책상 아니 책장, 아니 서랍이나 창고 어디에도 원고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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