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끼

by 간질간질

돌멩이는 저녁식사를 준비 중이다. '한국사람은 밥심'이란 말을 이해 못했던 시절을 지나 '당 떨어진다'는 말을 쉽게 내뱉을 만큼 나이가 들었다. 돌멩이가 이제껏 경험한 밥 짓기 전용 기구는 양은 밥솥, 압력밥솥을 거쳐 압력전기밥솥으로 넘어왔다. 젊은이들에겐 즉석밥을 돌려 먹을 수 있는 전자렌지가 밥 솥의 자리를 차지했다. 밥맛이 좋고 누릉지가 구수하다는 검은 무쇠 가마솥은 TV에서 유별나게 떠드는 프로그램에나 가끔 등장하는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고전처럼 무쇠 가마솥으로 밥해 먹는 사람은 멸종 동물 찾기 만큼 어렵다. 무쇠 가마솥밥을 먹을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면 인스타 인증 플렉스(flex)는 '반드시'다. 돌멩이는 수제비를 위해 전기밥솥에서 보온상태로 36시간 가량 지나 조금은 딱딱해진 한 그릇 분량의 밥과 전자렌지에서 갓 꺼낸 즉석밥을 준비했다. 새로 밥을 지을까 생각했지만 전기 밥솥으로 약 30분, 전자렌지 약 2분이 필요하다. 하지만, 수제비가 10분내 도착할 것 같으니 돌멩이의 선택은 당연히 즉석밥이다.


돌멩이는 내일 먹을 밥을 위해 쌀을 씻는다. 수제비가 오기 전 짜투리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생각이다. 효율은 전 세계를 관통하는 최우선 가치다. 아낀 시간은 대부분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드라마에서 몰아보기에 사용하지만, 아무튼 시간은 효율적으로 아껴야 한다. 쌀은 너무 세지도 않게 헐렁하지도 않게 씻어야 한다. 첫번째 쌀 뜨물은 버리는게 낫지만 두번째, 세번째 쌀 씻은 물은 모아놓았다가 된장국을 끓이기에 좋다. 하지만, 된장국도 하루 이틀이지 뽀얀 쌀 뜨물을 주저 없이 버린다.


밥솥에 쌀을 앉힐 때는 손등 중간 정도까지 차도록 밥물을 부어줘야 한다. 할머니의 할머니로부터 전해 내려온 비법으로 가문의 어른에게 전수받는 첫번째 노하우기도 하다. 전기밥솥에는 정확히 눈금이 그어져 있다. 1인분의 쌀량을 덜어낼 수 있는 계량컵도 들어 있다. 문명의 발전은 표준화와 묶여 있다. 진시황도 중국 땅을 통일하고서는 도량형을 통일시켰다지 않나. 그리고, 표준화는 무수한 '비표준의 말살' 결과다. 수제비는 항상 눈금을 보고 밥 물을 맞추지만 돌멩이는 오늘도 손을 푹 담궈 까실하면서 부드러운 쌀위에 손을 얹고 물을 붓는다. 수제비가 보면 또 엑셀 놔두고 전자계산기 두드리는 짓 한다고 타박하겠지만 혼자 있는 동안 돌멩이는 조상들이 알려준 지혜에 따르며 비표준화의 일탈을 즐긴다.


밥을 앉히기 전에 쌀을 불리는 것이 좋다. 물먹은 쌀이 더 부드러운 밥으로 변한다. 부드러운 음식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하지만 나이 들수록 딱딱한 것은 부담스럽다. 수제비는 항상 흑미나 현미 아니면 콩이라도 밥에 넣지만 돌멩이는 백미로만 밥을 짓는다. 돌멩이가 어렸을 때 '혼밥'이 강제였던 적이 있다. 점심시간에는 선생님들이 도시락을 일일이 검사를 하고 흰 쌀밥만 있는 도시락에 면박을 줬다. 북한보다 남한이 더 좋은 나라라는 주입식 교육을 받을 때였다. '이밥에 고깃국을 먹게 해주겠다'는 공산당의 선전에 홀려 웃고 있는 북한 노인이 증거로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북한에선 고깃국은 커녕 '쌀밥'도 못 먹는 지옥같은 나라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에선 쌀밥을 언제나 먹을 수 있다고 배웠다. 그래놓곤 체제 경쟁 승리의 상징인 하얀 밥이 가득한 도시락 때문에 면박을 받는 것은 돌멩이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모순이었다. 하지만, 어린 돌멩이는 저항할 수 없다. 대통령 각하께서 정하면 해야 하는게 법이었다. 돌멩이는 착한 새마을의 어린이니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된 돌멩이는 '쌀 선택권'이 보장되는 순간엔 항상 흰 밥을 골랐다.


밥솥에 밥을 하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압력 밥솥이 아닌 일반솥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돌멩이는 아직도 아이때 어머니가 동네 아주머니들과 모여 앉아 "이것이 독일제 휘XX 압력밥솥입니다. 얼마나 편리하고 밥맛이 좋은데요. 밥 말고 다른 것도 다 할 수 있어요"라며 온갖 요리를 만들어내는 방문판매 아주머니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가장 놀라운 점은 밥맛이 아니었다. 뜸 들이는 과정의 어려움을 한번에 해결해 준 신 기술. 증기 기관차를 처음 본 사람들의 놀라움을 돌멩이는 100% 공감했다. 양은 솥에 밥을 할 때 쌀이 끓어 넘치면 바로 가장 작은 불로 줄여야 한다. 언제 쯤 끓어 넘칠지를 아는 지식. 할머니의 할머니로 부터 전수받은 두번째 노하우인 뜸들이기의 시작점이다. 압력밥솥은 섬세하게 조율하는 밥짓기 장인의 기술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증기기관차처럼 강한 증기를 내뿜으며 '어서 불을 꺼야 한다!'고 소리를 낸다. 이때 할 일은 늦지 않게 불 끄기 뿐이다. 청각이 어둡지 않으면 다섯살짜리 아이도 할 만한 일이 되어버렸다.


압력밥솥이 말살시킨 진짜 기술은 뜸들이기가 완성되는 시점을 알아채는 감각과 방법이다. 할머니의 할머니로부터 전해진 밥짓기의 세번째 노하우이자 정수. 가장 작은 불로 줄여 놓고 '충분히 뜸이 들었다'는 판단이 될때 밥솥 뚜껑을 연다. 그때 맛있는 밥알들이 일제히 내는 박수소리 '쫙'. 이 소리로 맛있는 밥인지, 덜 익은 밥인지, 탄 밥인지 판단한다. 기막힌 연주에 부응하는 관객의 박수소리 처럼 오직 밥짓는이가 들을 수 있는 밥익은 소리인 밥이 된 쌀들의 박수소리는 압력밥솥이 멸종시켰다. 뜸이 충분하지 않으면 밥솥 뚜껑이 '어허 기다리시게!'라며 굳게 닫은 입을 열어주지 않는다. 섬세한 기술과 판단이 아닌 인간의 근육과 압력밥솥의 압력의 힘대결로 결정난다.


아직도 돌멩이의 어머니는 전기밥솥보다 압력밥솥을 선호하신다. 돌멩이 역시 길들여 졌는지, 익숙한 것인지 어머니의 밥이 더 맛있다. 인공지능이 더해진 최신형 전기 압력밥솥에서 지어도 어머니의 밥이 맛있다. 전기밥솥은 증기기관차를 잡아 먹은 전철처럼 압력밥솥을 멸종시키는 중이다. 초등학교를 들어가지 않은 아이도 버튼 하나 누르고 기다리면 밥이 된다. 더이상 뜸을 들여야 할 때를 알 필요도 없고, 불을 꺼야 할때를 알 필요도 없다. 같이 사라진 밥의 박수소리 대신 녹음된 음악이 밥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도어락 소리가 들리고 수제비가 들어왔다. 수제비는 오는 길에 요즘 핫한 것을 사왔다며 유명 맛집의 음식을 포장해서 만든 레트로트 육개장을 꺼냈다. 수제비가 씻으러 간 사이 돌멩이는 익숙하게 포장된 레트로트 육개장의 포장을 가위로 자르고 냄비에 담아서 끓인다. 유명 연예인이 만들어 홈쇼핑에서 판 김치를 냉장고에서 꺼내고, 동네 반찬집에서 사온 나물이며, 멸치볶음이며 밑반찬들로 식탁을 채운다. 씻고 나온 수제비는 즉석밥을 앞으로 당긴다. 몸에 좋지 않다고 말해도 수제비는 선택을 바꾸지 않고, 코렐 식기에 담긴 전기밥솥의 밥을 돌멩이에게 미룬다. 돌멩이도 흰 쌀밥을 먹고 싶지만 양보함으로 승자가 되는 것을 알아차린 착한 동거인의 삶을 선택했다.


돌멩이와 수제비는 밥을 우물거리며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한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배달 음식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 사는지, 최근에 마신 쌀 막걸리며 전통주가 어떤 맛이었는지, 내일은 밥 차리기 귀찮으니 재난지원금으로 외식하고 오자느니, 친구의 딸은 중학생인데도 밥을 일주일에 한번도 안먹는다느니, 아파트 청약은 어디가 좋겠냐느니, 삼성전자 주식에 몰빵했던 친구가 한 턱을 냈다느니, 밥 먹고 난 뒤에 넷플릭스로 무엇을 보자느니, 한국의 코로나 대처로 국격이 상승했다느니... 돌멩이와 수제비가 나누는 저녁 밥. 한 끼의 시간이 자연스레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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