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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riteller 토리텔러 Feb 01. 2017

북스캔(Book Scan)하다.

옛날 책을 e-book으로 보고 싶었을 뿐이다.

토요일 느지막이 일어나 여유롭게 마실 복장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손에 들린 에코백에는 오늘 북 스캔할 책이 9권. 3권짜리 초한지와 5권짜리 열국지. 그리고 지난번 수작업하다 실패한 코마 상태의 책 한 권. 이 가게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주차장이었다. 9권의 소설책이 무거워 봐야 얼마나 무겁겠냐마는 그건 짧은 거리를 움직일 때 이야기다. 옛날 어머님들이 아이를 업고 매고 만원 버스에 시달리며 데리고 다녔던 만큼의 집념이 없는 내게 아홉 권의 소설책은 차로 운반해야 할 무게다. 여유로이 차를 몰고 사당동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이 없었을 적 운전사들의 능력에 새삼 감탄할 때는 지시하는 길목을 지나치는 순간이다. 이번에도 역시 지나쳤다. 대로변에서 골목으로 들어가고 한 번 더 우회전을 시킨다. 차 두대가 지나가기엔 좁아 보이는 골목으로 내비게이션이 계속 안내한다. 불안했지만 이미 기계에 굴복한 두뇌에는 업체로 가는 길을 저장해 놓지 않았다. 믿고 가는 수밖에. 생각보다 널찍한 주차장이다. 바닥에는 흔한 사각형의 주차구역도 없고, 주차장이라기보다는 자갈과 시멘트를 적당히 마당에 뿌려 놓은 것 같은 곳이었다. 당연히 주차 관리요원도 없지만 차들은 적당히 이중주차가 되어 있다. 주차장도 반듯하지 않다. 교외 주차장을 한 삽 떠다가 옮겨놓은 것 같은 친근함. 등을 보이고 있는 건물 한쪽에 세 개의 계단을 오르면 만나는 철문이 있다. 안내판도 없지만 그리로 들어오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북스캔(Book Scan)은 책처럼 수백, 수천 장의 종이를 빠르고 정확하게 스캔하는 것에 특화된 업태를 말한다. 개인들에게야 책을 스캔하는 것 말고는 없겠지만 학교나 병원, 회사 같은 곳에서는 온갖 종류의 서류뭉치가 있다. 이런 법인들을 대상으로 수익을 내기 위한 일도 같이 하고 있다. 북스캔은 셀프 스캔이라고도 부른다. 이런 귀찮은 일을 사람들이 할리가 없을 테니 누군가 아이디어를 냈다. 책과 웃돈을 주면 스캔을 한 후 파일을 보내주는 사업이다. 훨씬 편리했던 시절을 저작권법을 등에 업은 출판사가 몰아냈다. 불법유통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내가 내 책을 보내서 스캔을 한 뒤에 파일을 받고 수고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지만 그 틈새로 사람들의 욕심이 비집고 들어왔다. A라는 사람이 YY라는 책 스캔을 맡겼다. 북스캔 사장님은 YY라는 책을 잘 스캔한 후 A에게 파일을 전달했다. 우연히 B라는 손님이 똑같은 날 똑같이 YY라는 책 스캔을 맡겼다. 합리적인 인간의 선택답게 사장님은 A라는 사람의 YY라는 파일을 B에게 전달하고 돈을 받는다. 사장님은 일을 한 번 밖에 하지 않았지만 두 번 일한 수고를 챙겼다. 한번 더 생각해 보니 앞으로 누가 오든 YY라는 책 스캔을 맡기러 온다면 똑같이 파일만 전달하면 된다. 사장님은 그 날부터 스캔한 파일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아두기 시작했다. 이 정도라면 부당이득을 챙긴 사장님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영리하게 돈을 벌었다고도 할만하다. 문제는 실제 책을 사지 않은 사람이 파일만 구매해 가는 경우다. 이전의 경우는 모두 책을 샀다. 그렇기에 디지털 파일로 바꿔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종이책 소유주가 디지털 소유주로 바뀌는 것뿐이니까. 종이책을 사지 않은 사람이 디지털 파일을 사가는 것은 문제가 된다. 출판사에게 돈이 전달되지도 않으며 저자에게도 당연히 돈이 전달되지 않는다. 책의 저작권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 간의 불법거래가 된다. 그래서 법으로 금지시켰다. 북 스캔 대행은 금지가 된다. 남은 것은 스스로 하는 셀프 북 스캔이다. 이곳은 스캔을 도와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돈을 받는 구조가 된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 두 계단 내려가는 복도가 나온다. XX스캔이라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말엔 사람이 많아서 미리 알아보고 방문해야 한다는 홈페이지 공지글을 보았지만 토요일 10시 사당역 근처의 스캔 업체에 사람이 얼마나 있으랴 생각했다. 한 10평 남짓한 공간에는 책과 스캐너 기계와 사람들과 군인까지 가득했다. 구석에 놓인 둥그런 탁자에 있는 공짜 믹스커피 한잔을 먹으면서 돌아왔다. 주말엔 사람이 많다.


며칠 후 2차 도전. 평일엔 역시 사람이 없다. 사람 좋게 생긴 젊은 청년들이 안내를 해준다. 시키는 대로 따라 하면 된다. 전기밥솥을 다룰 줄 정도의 이해력이면 스캐너 기계를 다루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그 이상의 문제가 생기면 청년들을 쳐다보면서 손을 들면 된다. 인상 좋은 청년이 사근 하게 잘 보살펴 준다.


"복원하실 건가요?" 홈페이지에서 미리 알아보지 않았다면 당황할 질문이었다. 책을 다시 원상태로 만들어 준다는 뜻이다. 책을 왜 원상태로 다시 만들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어봤다. 손님 중에 종이책도 가지고 있고 싶고, 들고 다니기 편하게 디지털 파일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단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질문이다. 종이책을 없애버리려고 했던 사람이라면 당연히 불필요한 서비스지만 마음이 흔들렸다. 분명히 종이책을 버리려고 들고 나온 것인데, 마치 키우던 반려동물을 버리려다가 들킨듯한 마음이 들었다. 짧지만 깊은 고민으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안 할 겁니다"라고 했다. 못난 주인 만나서 버림받는 책들에게 미안했다.


표지 스캔이란 애피타이저 같은 단계로 시작된다. 표지만 따로 스캔한 후에 본문을 스캔한 파일  맨 앞장에 끼워 넣어준다. 나중에 e-pub라는 파일을 만들 때 표지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대량 스캔 작업을 할 때 두꺼운 표지는 표준화되어 고속으로 진행되는 프로세스에 걸림돌이 된다. 표지는 컬러로 스캔이 가능하다. 글자만 가득한 본문은 굳이 컬러로 할 필요가 없다. 흑백이 더 빠르고 더 선명하게 스캔이 된다.


절단.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수십 년 또는 수년간 한 방에서 같이 숨 쉬던 책이 뎅겅 잘린다. 스캐너에서 고속으로 스캔을 하려면 페이지를 일일이 넘겨주는 것보다 고속 복사기의 자동 급지 장치처럼 롤 고무 롤러가 종이를 밀어 넣는 것이 빠르다. 책이 붙어 있으면 안 되니 책 옆구리를 생선회 뜨듯 얇게 잘라낸다. 피부가 한 꺼풀 벗겨지는 것 같다. 한 권의 책이라는 물리적인 접점은 사라지고 페이지로만 알 수 있는 분해된 책. 인상 좋은 청년이 분리된 책-종이 뭉치라고 불러야 어울릴-을 솜씨 좋게 매만진다. 자동 스캔할 때 걸리지 말라고 하는 작업이다. 위아래로 종이를 펼쳤다가 모았다가 꿀렁꿀렁 종이를 굽혔다 폈다. 계수기가 없을 때 돈을 세는 은행원의 손기술만큼이나 예술적인 퍼포먼스였다. '복원'작업을 요청하면, 이렇게 잘라냈던 책을 다시 원래 모양으로 붙여주는 거다.  다시 붙여 놓더라도 책 주인은 프랑켄슈타인처럼 이어  붙여놓은 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스캔. 본격적인 스캔 작업이 이루어진다. 1인당 1 스캐너와 책상이 배정된다. 든든한 청년들이 뒤에서 보조해 주는 것도 포함이다. 절단된 책을 고이 모아서 스캐너 급지 장치에 쌓아둔다. 그리고 각종 설정이 시작된다. 몰라도 된다. 든든한 청년들이 해준다. 물어볼 때 대답만 하면 된다. 설정은 '흑백'으로 할지, '대비(contrast)'를 어느 정도 레벨로 할지 등등을 정한다. 옛날 책이라면 '흑백'으로 대비를 적당히 두는 것이 깔끔하게 나온다. 원본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대로 유지를 하면 누런 종이의 색이 시커멓게 나온다. 과도한 화장은 추하지만, 적당한 화장은 서로가 행복해진다. 스캔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스캔되는 동안 책 주인은 스캔이 잘 되는지 계속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중간중간 에러가 발생한다. 종이가 자동 급지 장치에 물리는 잼(jam) 현상이다. 인상 좋은 청년이  "옛날 책이라 먼지가 많아서 그래요. 닦으면 돼요"라며 열심히 스캐너를 청소하고 다시 스캔한다. 이 과정이 여러 번 반복된다. 귀찮을 만도 하건만 그 청년은 계속 "옛날 책 냄새가 나서 좋네요"라며 안심시킨다. 그래도 민망함은 어쩔 수 없다. 


파일 정리 스캔이 완료되면 검수를 거친다. 가끔씩 종이가 밀리면서 검은 띠가 생기기도 한다. 그때는 다시 스캔을 하거나 그대로 넘어가거나 선택할 수 있다. 종이가 조금 비뚤어지기도 하지만 이것까지 모두 제대로 맞추려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다. 어른답게 적당히 넘어가야 한다. 검수가 끝나면 파일로 저장한다. 그리고 각 권마다 이 작업을 반복한다. 


옵션. 옵션은 크게 두 가지. OCR과 레티나 중 각자 선택하면 된다. 단 옵션은 추가 비용이 든다. 보통은 스캔하기 전에 결정해야 한다. 옵션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몰아서 이야기하겠다.  


완료. 검수까지 완료된 파일은 업체의 서버에 저장이 되고 결제를 한다. 결제는 카드도 된다. 그리고 이메일을 남긴 후 집으로 돌아오면 그날 저녁 즈음에 이메일로 스캔한 파일이 전달된다. 총비용은 9권에 옵션을 다 선택했을 때 약 4만 원 선. 옵션을 빼면 약 2만 원이 든다. 업체마다 다르니 각각 알아서 검색하고 결정한다. 

파일은 크게 두 종류. 하나는 스캔한 각권의 표지 이미지 파일. 하나는 각 이미지를 합쳐서 각 권마다 하나씩 만들어지는 PDF 파일이다.  


종이책과의 이별

나와 같은 공간에서 수년간 동거하던 책. 절단된 후 스캐너를 통과해 낱낱이 분해된 책을 업체에 남기고 돌아선다. '복원을 해야 할까?'라는 고민을 잠시 하다가 과감히 돌아선다. 종이책과의 이별은 과거와의 이별만큼이나 가슴이 시리다. 몸의 한 부분을 버려두고 오는 것 마냥 아쉽다. 돌아와서 넓어진 방을 보면 '잘했군' 생각이 든다. 인간은 참 영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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