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인 딸이 말했다.
아이가 문득 하늘을 보고
"언니! 생일 축하해!"라고 말했다.
"생일? 오늘 누구 생일이야?"하고 물으니
"응 엄마, 오늘 10월 7일, 언니 생일 이잖아"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알았다.
오늘이 나의 첫째 딸 생일이라는 것을.
2007년 오늘. 첫째 딸을 낳았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내 품에서 2009년 4월 21일에 하늘로 여행을 떠났다.
사람의 시기와 계절에 대한 감각은 참으로 오묘하다. 내가 머리로 알지 못하는 것을, 마음은 알고 있는 것이다. 이맘때였다-라는 것을. 세월은 밀어내는 기억을 계절이 데리고 온다.
어쩐지, 지난주부터 티어라이너의 '바다여행'을 계속 듣고 싶었다. 2007년 방영됐던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의 o.s.t로 인기를 끌었던 곡이었다. 나는 나의 첫 아이를 품에 안고 수유를 하면서 그 노래를 들었다. 조명은 아늑했고 아이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눈부시게 푸르른 너는 내게 바다인걸-이 노래 가사가 우리를 위해 쓰였다고 믿어도 용서가 되는, 우리가 이 우주의 중심인 날들이었다.
아이는 1년 8개월 만에 결국 혼자 여행을 떠났다. 희귀하고도 독한 뇌종양 때문에 그 1년 8개월 중에 거의 1년을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며 치열한 시간들을 보내고 떠난 내 아름다웠던 첫째 딸. 정말로 아름다웠다. 그 아픈 치료과정 중에도 방긋방긋 눈부시게 웃었다. 정말로 눈부시게 푸르른 아이였다.
첫아이를 떠나보내고 그로부터 2년 뒤에 나의 둘째 딸을 낳아서 지금까지 왔다. 첫째 딸은, 내 가슴에 품은 비밀 같은 것이었다. 너무 괴로워서가 아니라 너무 소중하고 깊어서 그 누구에게도 꺼내 보일 수도 , 그러고 싶지도 않은 비밀.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내 삶이 뻔한 신파가 될 것 같아서 두렵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 비밀이 그 아이와 나의 마지막 연결고리 같아서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올 초에 문득, 이제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비밀을 아이와 나눌 때가 되었다. 어느 날 밤, 아이와 나란히 누워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있잖아- 엄마가 늘 너에게는 수호천사가 있으니 늘 용기를 내라고 했던 거 기억나?"
"응"
"오늘은 그 수호천사가 누구인지 알려줄게. 있지.. 사실 너에겐 언니가 있었어"
그리고 덤덤하게 아이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주었다. 아이는 놀라기도, 눈물을 흘리기도, 기뻐하기도 하면서 내 이야기를 들었다. 언니가 있었다는 사실에는 놀라고, 언니가 그렇게 아프고 고생했다는 사실에는 슬퍼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자기에게 그런 언니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에는 기뻐하면서.
아이는 섣불리 나를 동정하거나, 배려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순수함은 그러한 것들을 모른다. 그것이 늘 어른들을 구원해준다.
다음 날, 그동안 내 방 한구석에 소중하게 보관해왔던 첫째의 물건들과 사진을 아이에게 보여줬다. 언니의 물건들이지만, 다 아가의 것들이다. 언니보다 훌쩍 자란 동생이 자기보다 어린 언니의 물건들을 만지작 거리고, 언니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이런저런 질문들을 했다.
그 뒤로, 아이는 가끔씩 언니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엄마 언니 임신했을 때 어떤 꿈을 꿨어? 엄마 언니는 병원에서 어떤 치료를 받았어? 엄마 언니는 어떤 걸 좋아했어?
그 질문들의 순수함에 11년 전 그날들이 새롭게 쓰여나간다. 아이와 함께 그 날들의 서사를 다시 써나간다. 아이와 함께 내 삶의 장르를 다르게 재구성한다. 미완결 상태였던 그때의 나라는 소설이 이제야 완결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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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조금은 아쉽고 섭섭했다. 그동안 혼자만 간직했던 내 버전의 '그날들의 기억들'이 특수성을 점점 상실해가는 것만 같아서. 대신에 보편적인 문장들만 남는 것 같아서.
첫 아이가 아프기 전, 태어난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지금은 돌아가신 시 할머님이 아이를 보러 오신 적이 있다. 할머님은 아이의 웃는 모습을 보고 천상 미인이라며 예뻐하셨다. 그러다 문득 옛날이야기를 하셨다.
" 너희 아빠 (나의 시아버님) 위로 원래 누나가 한 명 더 있었어. 웃는 게 정말 예뻤지. "
슬퍼하시면서 하신 말씀도, 진지하게 하신 말씀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일이 있었지- 라도 서술하셨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말씀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내 인생이 소설이라면, 할머님의 저 이야기는 '복선'같은 것이었을까. 그래서 본능적으로 저 문장 아래에 밑줄을 그었던 것일까.
아이를 떠나보내고 한동안은, 얼른 할머니가 되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젊기에 가져야 하는 삶의 의욕이 버거웠다. 빨리 할머니가 되어 , 나도 시 할머님처럼 '그래 그땐 나에게 웃는 모습이 예쁜 아이가 있었지'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내 상황의 특수성이 무거운 존재감으로 나를 압박했기에 , 얼른 뻔하고 간단한 문장으로 내 삶이 요약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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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와중에도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웃고 울고, 그리고 둘째 아이를 낳았다. 첫째 아이는 가슴속 깊은 곳에 몰래 숨겨두었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십 번 각색되고 미화되고 지워지고 재구성되어 이제는 누구에게도 쉽게 열어 보일 수 없는 나만의 특별한 세상이 그곳에 있었다.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그때의 일들이 단순한 문장 몇 개로 대체되어지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아이에게 언니의 존재를 알리는 일을 미루고 또 미뤘다. 가족들과도 남편과도 , 그 누구와도 그 가슴속 특별한 마음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어-라고 생각해버렸다.
가능하다면 평생 나만의 것으로 끌어안고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그 아이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 가슴속에 갇혀있어서 답답하지 않을까. 자유롭게 나와서 뛰어놀고 싶겠지. 이름으로나마 이 사람 저 사람의 기억과 이야기 속에서 자주 또는 가끔이라도 등장하면서. 자기를 닮은 동생도 자기를 기억해주기를 바라겠지.
그 아이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란, 나 혼자 끌어안고 있던 기억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열어 보이는 일이라는 것을 아이가 떠나고 11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그게 아이를 살게 할 것이란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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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1일 근처에만 가도 마음이 욱신 욱신 아프던 날들을 지나, 이제는 10월 근처에만 가도 '바다여행'이 듣고 싶어 지는 날들이 왔다-드디어. 잘 살아냈다, 나.
며칠 전, '헤이 구글, 바다여행 틀어줘'라고 말하는 나에게
"엄마 왜 요즘 자꾸 저 노래만 들어. 지겨워"
라고 딸이 투덜댔다.
"그렇게 말하지 마. 저 노래가 사실은, 네 언니가 아기 때 자주 듣던 노래라서 그래. 언니 생각이 난단 말이야"라고 대답하니 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래?"라고 대답하고,
그 뒤로는 내가 저 노래를 얼마나 자주 듣던, 뭐라 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렇게 아이에게 대답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고, 아이도 나를 그렇게 이해해줘서 고마운 일이다. 내가 낳은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자라서 나와함께 이런 이야기를 한다나- 곰곰히 생각해 볼수록 비현실적이다.
저 대화를 나눌 때만해도 나는 첫 아이의 생일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는데,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 너의 생일이 다가와서 그렇게 이 노래가 듣고 싶었던 거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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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결국- 11년 전 내가 바라던 데로, 지금의 나는 두려워하던 데로- 그 모든 어둡고 아름답고 괴롭고 행복하고 치열했던 너와 나의 특별한 날들이 , 단순한 문장 몇 개로 줄여져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날들이 올 것이다.
나도 시 할머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정말 웃는 모습이 예쁜 아이였다' 고 말할 수 있을 테고.
그때가 되면, 그 날들의 특별함보다, 보편성에 큰 위로를 받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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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까지는 동생과 가끔 너의 이야기를 하면서, 십 년 전 우리의 이야기에 밝고 아름다운 색채를 입히고 디테일을 만들고 다시 구성하고 그럴 것이다. 그 이야기들 속의 너는 '나만의 너'와는 다르겠지. 그래서 나는 여전히 조금은 아쉽고 서운할 것이다.
그래도 , 지금은 너의 동생과 함께 ,
오늘의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언니는 정말 아름다운 계절에 태어났다 그렇지?"
라고 말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늘에서 맞이하는 너의 13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나는 처음으로 너의 이야기를 , 이렇게 활짝 열린 곳에 남겨본다.
( 십년전의 이 일들에 대하여, 그때 남긴 기록들과 일기들에 대하여 언젠가는 정리해서 글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불쑥 이런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았는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 거칠게 쓴 글이지만 올립니다. 불친절한 글이지만, 아이에게 남기는 생일선물이라고 생각하시고 친절하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