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로 공항(Heathrow Airport) 제 2 터미널'에 서서
기대감에 찬 상상력과 예술의 상상력은 생략과 압축을 감행한다. 이런 상상력은 따분한 시간들을 잘라내고, 우리 관심을 곧바로 핵심적인 순간으로 이끌고 간다. 이렇게 해서 굳이 거짓말을 하거나 꾸미지 않고도 삶에 생동감과 일관성을 부여하는데, 이것은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보푸라기로 가득한 현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_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중...
2017년 7월 19일 오전 9시 30분.
좁은 의자에 앉아 두 번 나누어 잔 시간, 약 9시간.
어깨를 누르는 6Kg 배낭을 메고 기다리기를 약 30분.
피곤할 법도 한데, 피곤하기는커녕 힘들단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점점 정신이 또렷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내가 선 곳이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이 우울할 때면 가는 '런던 히스로 공항 2번 터미널'이라서 그런 걸까. 아쉽게 내가 선 곳은 그가 좋아했던 터미널 전망대는 아니었다. 포네틱 코드로 '09L/27R'인 북쪽 활주로 변에 있는 호텔 맨 위층도 아니었다. 입국 심사를 기다리는 줄, 그곳이 내가 선 정확한 위치였다. 시선을 옮겨 UK/EU 줄쪽을 흘끔 바라보니 한산했다. 다시 고개를 돌려 Non EU 줄을 바라보았다. 여권과 입국신고서를 들고 선 사람들의 얼굴에 초조함이 감돌고 있었다. 나도 그 분위기에 일조하고 선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유럽 내에서 테러 안전지대라고 자부했던 영국에서 2017년 7월까지 3차례 크고 작은 사고가 있었다. 그 때문에 안 그래도 까다롭다고 이름난 영국 입국심사가 더 길어진 게 아닐까 짐작만 할 뿐, 좀처럼 빠르게 줄어들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23!"
간결한 한 마디를 듣고서 난 백팩을 고쳐 메고, 23번 입국심사관 앞에 섰다. 긴장을 숨기려 옅은 미소를 보이며 여권을 내밀었다. 여권을 보며 나에게 한 첫 질문은, '영국에 처음 와봤니?'였다. 짧고 간결하게 'yes!'라고 답을 하자, 몇몇 질문이 이어졌다. '얼마나 머물 예정인지', '귀국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이 차례로 따라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까다로울 것 없는 질문들이었다. 막바지구나 싶었을 때 들었던, "What's the purpose of your visit?", 방문한 이유를 묻는 질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어느 나라를 가든 듣는 질문이었고 예상했던 터라 "Sightseeing.. trip.."이라고 답했다. 말하며 속으로 거의 끝난 듯싶은 생각에 "뭐야, 입국심사 괜찮은데?"라고 여유를 부렸다.
"Why..?"
그 다음에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 나왔다. 문제는 여유 부리다가 질문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이다. 내가 들은 건, Why 비슷한 발음뿐이었다.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순간 난 생각했다. 무슨 질문일까. 영국에 왜 왔는지 묻는다고 생각해 "Because.. I want to come to UK..."라고 말했다. 그 찰나에 난 스스로에 잘 대응했다고 생각했다. 방금 방문한 이유를 물어봤는데도 말이다. 내 대답을 듣고, 고개를 까닥 움직이는 입국심사관의 표정을 보고, 뭔가 잘못된 걸 깨달았다. 바짝 긴장한 채 바로 다시 말해줄 것을 부탁했다. 다시 듣고서 좀 전 질문이 여행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어디를 관광할 것인지 묻는 거란 걸 알았다. 얼굴을 살짝 붉히며 대학에서 문화비평을 공부하는 학생인데, 영국 문학을 다룬 수업에서 배웠던 영국 작가들을 기념하는 문학관에 갈 예정이라고 대답을 했다. 무표정한 입국심사관을 보고, 좀 더 설명이 필요한가 싶어 입을 달싹거리는데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
"Brilliant!"
그리고 입국도장을 쾅 받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무표정하게 "Brilliant"라니. 타박타박 입국심사대를 지나는데, '잉글랜드는 천사들Angels의 나라일까, 아니라 앵글Angles의 나라일까'란 생각이 들었다. 영국을 가리며 천사들의 나라가 아니라 앵글의 나라라고 한다. 말장난이지만, 영국인이 천사 같은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에 붙은 말일 것이다
영국의 정식 국호는 '그레이트 브리튼과 북아일랜드 통합 왕국(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으로, 브리튼 섬 내의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가 있고 북아일랜드가 연합하여 이룬 나라라는 뜻이다. 그중에 보통 잉글랜드만 기억한다. 씁쓸하지만 보통 승자의 이름이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니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잉글랜드는 브리튼 섬 내에 로마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침입한 게르만 민족이 세운 왕국이다. 그래서 이름 속에 브리튼 땅에 침입한 게르만 민족을 말하는 앵글로-색슨 족의 땅(Angles' Land)이란 뜻이 담겨있고, 오늘날까지 영국의 정통성은 '잉글랜드' 안에서 흘렀다. 게르만 족이 침입했던 때 막기 위해 열심히 싸웠던 왕이 그 유명한 아더왕(King Arthur)이다. 원탁의 기사들과 12차례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영원히 죽지 않고, 적들로부터 우리를 구하기 위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온다"는 전설을 남긴 채 글래스터 베리에 잠들었다. 이렇게 브리튼 섬에 원래 살고 있던 켈트족은 침입자에게 자신의 터전을 내주고, 스코틀랜드와 콘월 등으로 이동했다. 잉글랜드란 이름 속 주인공 '앵글'의 역사가 이러한 데다, 영국인의 이미지가 정중하지만 살갑지 않고 친절하지만 어딘가 딱딱해 보이니. 천사 이미지에서 멀어진 건 당연한 듯싶었다. 앵글로 생각이 기울었지만, '그래도, 앵글보다, 엔젤'이라고 마음먹었다. 그래야 진짜 천사들을 만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나만의 생각 주문이다. 좋게 생각하면, 정말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기에, 좋게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게 생각해서일까, 여행하며 난 영국에서 많은 천사들과 만났다.
아! 참고로, 내가 마주했던 첫 천사(입국심사관)는 물리적으로도 앵글과는 조금 먼 인도계 영국인이었다. 그게 조금 영향을 주었는지 묻는다면, 그렇다.
캐리어를 무사히 찾고, 입국장 문을 향해 걸었다. 스르르. 자동문이 열렸다. 뜨겁고 습한 우리나라의 여름 공기와 달리 시원한 무언가가 내 뺨을 스쳤다. 드디어 영국 런던에 도착했구나 싶었다. 이미 입국심사대 앞 줄과 수화물 벨트 앞에 서서 계획보다 많은 시간을 보낸 터라 나에게 가만히 서서 이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오늘 하루 동안 보기로 마음먹은 게 두 가지가 있었다. 분주한 마음으로 런던의 지하철, 'Underground'를 향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터미널 천장에 비행기의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텔레비전과 공항을 빠져나가기 위한 교통수단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시선을 그곳에 고정하니, 안 그래도 급한 마음이 더 급해졌다. 약 한 달. 길다면 길지만, 그때 난 런던에 도착한 순간부터 내게 주어진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다. 조금이라도 이 시간들을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내게 필요한 건 화살표를 따라 이 공항을 빠져나가는 것뿐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터미널을 빠져나와 지하철 역으로 이동하려고 하는데, 내 시선을 끄는 조형물이 있었다. 거대한 조형물로, 히드로 제 2 터미널과 Underground를 타는 지하철역 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빠르게 걷던 내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지더니 그 조형물 앞에 난 멈췄다. 그리고 조바심에 멈추었던 생각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랭 드 보통은 생각으로 우리 기분의 갈라진 틈을 메우는 것을 즐거운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틈을 채우는 생각을 부르는 매개 중 하나로 예술작품을 꼽았다. 난 영국에서 처음 만난 예술품, <Slipstream>을 보면서 조바심으로 꽉 찬 마음에 틈을 벌려 여유를 채우는 즐거움을 느꼈다.
<Slipstream>는 영국 조각가 리처드 윌슨이 만든 작품으로, 비행기가 빠른 속도로 날아오를 때 기체 뒤에 발생하는 소용돌이치며 움직이는 공기의 흐름(와류)을 시각화한 것이다. 슬림스트림은 카레이싱에서 사용하는 용어이기도 한데,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자동차 뒤에 따라가면 공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다른 곳보다 기압이 낮아져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빠른 속도로 갈 수 있는 곳이다. 그 틈을 적극 활용하는 기술이 바로 드레프팅(Drafting)이다. 온라인 게임 '카트라이더'에서 드레프팅 기술을 사용하면 빠른 속도로 이동해 주변 배경이 흐릿하게 번지는 걸 볼 수 있다. 바로 그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이 슬림스트림이다. 리처드 윌슨은 실제 비행기가 움직일 때 생기는 공기의 흐름을 공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계산했다. 그리고 이를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시각화한 뒤, <Slipstream>을 만들었다.
<Slipstream> 작품 설명을 읽고 그 앞에 가만히 서서 가쁜 마음의 숨을 돌렸다.
“<Slipstream> is rooted in its location. This work is a metaphor for travel, it is a time-based work. It is art that moves in time and space coming from the past to the current, delivering different experiences at either end.”*
- Richard Wilson
"〈Slipstream〉은 그 장소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시간에 기반을 둔 이번 작업은 여행을 나타내는 상징물입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는 시공 속에서 예술은 처음과 끝에 다른 경험하도록 이끌어줍니다."
- 조각가 리처드 윌슨
공항은 여행의 출발지다. 비행기에 올라타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몇십 시간 뒤에 "우리에게 아무런 기억이 없는 장소, 아무도 우리 이름을 모르는 장소"에 내릴 수 있다. 아무런 기억도, 우리의 이름도 없던 장소가 여행과 만나는 순간 서서히 달라진다. 우리에게 여행한 곳이 되고 때론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장소로 바뀐다. 또 그곳에 사는 사람과 친해져 그들의 기억에 남고, 박물관이나 미술관 방명록의 이름으로 남고, 출입국한 데이터로 남는다. 여행을 마치고 다시 공항에 도착해, 입국장에 서 있는 지금이 과거가 되고 출국장에 서 있는 지금이 현재가 되는 순간이 온다. 그렇게 공항은 여행의 마지막 장소가 된다. 이를 공항에 있는 비행기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공기의 흐름으로 만든 것이 〈Slipstream〉란 생각이 든다.
물끄러미 거대한 바람의 형상을 보며, 무엇이든 채울 수 있는 텅 빈 나의 처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만약에 내가 조바심 내며 지하철을 바로 탔다면, 지금처럼 여행의 처음을 기억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Slipstream〉을 보며, 내가 여행에서 가장 주의해야 하는 "조바심"을 발견했다. 나에게 조바심은 마음의 빗장이다. 조바심은 볼 수 있는 것도 보지 못하게 만들고, 눈 앞에 보이는 것에서도 아쉬움을 찾기 때문이다. 여행 계획은 내가 행복하게 시간을 채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그 계획에 마음을 빼앗겨 여행지에서 볼 수 있는 보석을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플까.
조바심을 치우고, 마음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서서히 생각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의 영국 여행'이 천천히 제 호흡을 찾기 시작했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라는 말은 정말 맞다. 평소면, 지나쳤을 조형물을 보고 이렇게나 생각을 많이 했다니. 덕분에 그 날 관람 시간 15분을 앞두고, '켄싱턴 궁전(Kensington Palace)'에 도착했다. 당연히 '켄싱턴 궁전' 관광 일정을 취소했다. 그때 난 공항에서 보낸 시간을 후회했을까. 당연히 아니다. 리처드 윌슨의 〈Slipstream〉보며, 알랭 드 보통이 만들어준 슬림스트림을 이용해 드래프팅 한 걸 감사하게 생각했다. 켄싱턴 궁전을 보지 못했지만, 그 이후에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내가 볼 수 있는 것을 놓치지 않는 호흡을 배웠기 때문이다. 분명 그때 난 그때만 깨달을 수 있는 배움을 얻었다. 그런데 후회라니, 당치 않다.
아, 솔직히. '켄싱턴 궁전' 앞에서 아주 조금 아쉬워 발걸음이 잘 안 떨어지긴 했다.
<참고 문헌>
* De La Warr Pavilion 홈페이지
(https://www.dlwp.com/slipstream-a-new-commission-for-heathrow-by-richard-wilson/)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청미래 (2011)
이야기 영국사, 김현수, 청아출판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