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브론테 문학관 Bronte Parsonage Museum'에서
“나는 그 온화한 하늘 아래에서 비석 주변을 거닐기도 하고, 히스와 실잔대 사이를 파닥파닥 나는 나방을 바라보기도 하고, 풀잎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 고요한 땅 속에 고이 잠든 사람들을 두고, 어떻게 그들이 잠을 설친다고 상상할 수 있는지 의아스러웠다.”
_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요크셔에서 가장 큰 도시인 리즈 Leeds에서 기차를 타고 20분, 굽이진 도로 위를 달리는 버스를 타고 20분을 가자, “이다지도 완벽하게 세속 잡사에서 동떨어진 곳”이자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천국”이라던 하워스 Haworth의 모습이 보였다. 한반도의 태백산맥과 같은 영국의 등뼈 페나인 Pennines 산맥. 그 사이 계곡에 자리한 하워스는 회색빛 안개에 잠겨 있었다.
“폭풍(wuthering) 비바람이 몰아칠 때 이런 높은 곳이 감당해야 하는 대기의 격동을 가리키는 이 고장의 표현이다. 이렇게 높으니 사시사철 상쾌하고 통풍은 좋겠다. 절벽 위에 불어오는 북풍의 위력은 본채 가까이에 있는 전나무 두어 그루가 미처 못 자라고 심히 기울어져 있는 것과 앙상한 관목 한 무더기가 마치 태양에게 구걸하는 거지처럼 모두 팔을 한쪽으로 뻗은 것으로도 능히 짐작된다. 다행히도 선견지명 있는 건축가가 건물을 튼튼하게 지었다. 창은 좁게 해서 벽 안 깊숙이 넣었고 우묵한 곳마다 돌을 돌출 시켜 바람을 막았다.”
여행자로서 따뜻한 햇살까지는 아니더라도, 보슬비는 내리지 않는 흐린 날씨를 바랐건만, 현실은 우산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거센 바람이 불고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폭풍 wuthering 그 자체였다. 200년 전부터 거친 날씨가 그치지 않던 이곳의 지금 날씨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날씨였고, 한 치의 예상도 벗어나지 못한 영국스러움 자체였다. 바람을 감당하기에 약한 우산살을 손으로 바치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Wuthering Heights의 모델인 브론테 자매의 생가를 방문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날씨는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천천히 걸으며 브론테 자매의 아버지가 목사로 있었던 하워스 교구 교회 St Michael & All Angels Church를 향해 올라가는데 빗줄기와 바람이 서서히 잦아들어갔다. 빠르게 재촉했던 발걸음을 늦추고, 언덕을 올라가다 뒤돌아 멀리 보이는 푸른 언덕과 그 사이를 가르는 검은 울타리. 옹기종기 모여 있는 노란 잿빛 건물들이 무채색 안갯속에서도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보였다. 주변에 자리한 건물들 역시 아기자기한 장식들이 건물 외관을 가렸지만, 원래 건물의 빛깔이 밤색이었다.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뒤에서 나를 떠미는 바람을 타고 언덕을 올라가자 바로 브론테 목사가 봉직했던 교회와 옆에 세워진 학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브론테 자매들이 학생들을 가르친 이름 두 곳 다 실내에 외부인의 출입을 허락하고 있지 않았다. 외관을 눈으로 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비에 젖어 거무스름한 건물들은 선명하게 짙은 검은빛 건물들이 다가왔다.
이곳에 오기로 마음먹은 건,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고 쓴 기행문의 장소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1904년, 나와 같은 나이, 23살 버지니아는 하워스로 여행을 온다. 그는 이때 쓴 기행문을 가지고 생에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았다. 영국 최고의 신문 <타임지>에 실린 그녀의 글에 “하워스는 브론테 자매를 나타내 주고, 브론테 자매는 하워스를 나타내 준다. 그들은 껍데기 안의 달팽이처럼 서로 꼭 들어맞는다.”라고 썼다. 그녀의 말처럼 하워스는 브론테 자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캐서린이 묻힌 곳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린턴 가문의 묘석이 있는 교회 안도 아니었고 밖에 있는 언쇼 가문의 묘지 쪽도 아니었거든요. 캐서린이 묻힌 곳은 공동묘지 한구석의 푸른 비탈인데, 그곳은 담이 아주 낮아요. 히스와 월귤 가지가 습지에서 담을 넘어오고, 담은 거의 토탄에 묻힐 정도지요.
하워스에서 태어나 샬럿은 이곳 교회에서 결혼했고 그들의 가족들은 이 교회 묘지에 묻혔다.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 캐서린 언쇼가 교회도 가족묘지도 아닌 “담장이 낮아 히스와 월귤나무가 황야에서 타고 올라와 자라고 온통 토탄질로 뒤덮인 교회 부지 구석의 푸른 언덕”에 묻혔듯이, “브론테 자매 역시 토탄질의 황야 흙 속에 잠들었고, 따라서 많은 작가들이 말하듯 이들이 하워스 풍경의 일부”라는 그녀의 말은 교회 앞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작은 교회 앞 빽빽한 묘비에 그녀의 몸이 잠들었다고 해도, 캐서린처럼 바람결에 그녀의 영혼이 이리저리 나부끼고 있을 것 같았다.
브론테 자매와 하워스는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결합된 관계”였듯이 버지니아에게 브론테 자매 역시 떼어 놓을 수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버지니아가 세상에 발표한 첫 에세이가 <폭풍의 언덕>을 쓴 소설가 에밀리 브론테의 고향이라는 점은 묘하게 두 사람의 삶의 족적을 겹쳐보게 한다. 사실 두 사람은 비슷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성이기에 그 재능을 발휘할 기회보다 집안에, 자신의 울타리 내에 두려고 했던 아버지의 아래 자란 그녀들의 삶의 자취를 밟으며 자기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버지니아의 마음속 무언가가 움직이지 않았을까. “우리 가족을 벗어나 다른 사람들과 교제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우리는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오로지 우리끼리 서로 의지해 삶의 낙과 일거리를 찾았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브론테 자매들을 부러워하지 않았을까. 이후 버지니아 울프에게는 케임브리지 동지들이 있었지만, 자신이 가지지 못한 피를 나눈 자매들간의 강력한 유대감이 주는 힘을 부러워하지 않았을까. 아직 케임브리지 동지같은 친구들도, 피를 나눈 자매도 없는 난, 버지니아 울프보다 조금 더 부러운 마음을 가지고 이곳을 거닐었다. 그러다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였던 버지니아는 자신과 반대로 딸들의 죽음을 차례로 받아들여야 했었던 브론테 목사를 어떻게 바라보았을지 궁금했다. 그녀의 글에는 브론테 자매가 중심에 놓였지만, 자신의 아버지와 닮은 그녀들의 아버지가 눈에 안들어왔을리가 없다.
문득 그녀가 체스터필드 가문의 딸이었다면 조금 다른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싶었다. 자신의 딸을 위해 편지 쓰기 안내서를 썼던 체스터필드 백작 2세 혹은 그의 손자였던 체스터필드 백작 4세의 자녀였다면 조금 다른 삶이 그녀 앞에 펼쳐지지 않았을까. 할아버지처럼 체스터필드 백작 4세는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아들이 그의 사생아였기에 더 많은 관심을 끌었다. 백작이 아들에게 “아버지와 떨어져 살면서 ‘부정확한 삶’을 살지 않도록 전하는 조언”을 담은 편지가 지금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가 브론테 재마의 아버지였다면 그녀들에게서 어떤 글이 태어났을까. 확실한 것은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녀들의 작품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브론테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던 곳은 원래 200년 전에 브론테 목사의 목사관이었다. 1938년 하워스 지방 유지인 James Charlotte 경이 브론테 추모회에 기증하면서 지금의 박물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브론테가 살았던 때와 다른 건, 정면에서 오른쪽에 있는 건물은 1800년대 후반에 새롭게 지어진 것으로 지금은 도서관과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본래 건물에 있는 대부분의 가구는 브론테 가족들이 사용했던 물건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여 전시하고 있다.
브론테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자 따뜻하게 반겨주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환대에 비로 인해 쳐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브론테 박물관 곳곳에서 안내해주시는 분들은 궂은 날씨에 좀처럼 방문하기 쉽지 않은 이곳까지 온 방문객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현관이라고 하기에 좁은 공간에서 한 발짝 들어가 왼쪽에 있는 방이 식당이었다. 하지만 나는 단번에 알았다. 이곳이 바로 폭풍의 언덕에서 말하는 ‘큰방’이라는 걸. 폭풍의 언덕을 읽다 보면 워더링 하이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 나온다.
건물 안에 발을 들여놓자, 현관이나 복도 같은 것도 없이 곧바로 공용 거실이었다. 이 고장에서는 이곳을 ‘큰방 House’이라고 한다. 보통은 부엌과 응접실을 합친 공간인데, 폭풍의 언덕의 경우 부엌은 뒤쪽 어딘가로 밀려난 듯싶다. 어쨌든 두런두런하는 말소리와 덜걱덜걱하는 그릇 소리가 안쪽 어디선가 들려왔고, 거대한 벽난로 주변에 볶거나 끓이거나 구웠던 흔적이 전혀 없었고, 벽 위에서 반짝이고 있어야 할 구리 냄비나 양철 어레미들도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던 장면이 현실로 중첩되어 보였다. 보통은 부엌이 함께 붙어 있는데, 워더링 하이츠처럼 이곳의 하우스는 부엌은 다른 쪽으로 몰아놓았고 방안의 온기를 더하는 목적으로만 사용되었던 벽난로와 안락의자, 가족들이 식사를 했을 식탁이 방안 가운데 놓여 있었다. 단정하게 정돈된 공간은 포근한 안정감보다, 어떤 사건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가 흐르는 듯 싶었다.
천천히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내서에 에밀리가 테이블에 앉아서 빵을 구우며 독일어 공부를 했다는 설명을 읽다, 혹시 무어를 산책하며 거센 바람을 한참 맞고서 이곳 테이블에 앉아 벽난로의 불에 몸을 녹이며 <푹풍의 언덕>을 써 내려가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녀가 어디에서 작품을 썼는지 알 수 없지만, 부엌은 에밀리가 빵을 굽고 독일어를 공부했던 곳으로 좁지만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큰방과 다를 바 없는 부엌의 모습에 이내 실망했다. 깔끔한 벽난로의 모습이 빵을 굽거나 스튜를 끓인 흔적도, 구리 냄비나 음식을 젓기 위한 커다란 주걱도 없는 모습이 아쉬웠다. “두런두런 말소리와 덜걱덜걱하는 그릇 소리가 들려야 할 것 같은 이 곳”은 너무 적막해 관찰할수록 아늑함은 쓸쓸함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다, 에밀리가 세상을 떠난 소파가 눈에 들어왔다. 이 소파의 이야기를 알고 있어서 쓸쓸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문학관에서 부엌 외에 에밀리의 공간을 찾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흔적은 방과 방 사이의 좁은 틈새의 공간에 꾸며진 침실이 아마도 에밀리가 사용했던 침실이 아닐까, 라는 추론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을 뿐, 그녀가 이 집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알기란 쉽지 않았다. 자매들 가운데 오래 살았던 샬롯의 흔적은 집안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폭풍의 언덕>만을 남기고서 떠난 에밀리는 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취 역시 많은 부분 비밀로 남겨두었다. 그렇기에 자매들 중에 그녀에 대한 열혈 팬들의 관심이 쏟아지는 지도 모른다.
자연과 바람이 에밀리를 일종의 영적 초월 상태로 데려갔다면, 황야의 마법은 그녀로 하여금 육신 안에 거하며 육신을 통해 느끼게 했다. 산책은 육신 안에 거하는 한 방식이었다. 쉼 없는 걷기와 움직임을 통해, 그녀는 동경을 언어로 가다듬어 소리 낼 수 있었다. 에밀리의 시에 등장하는 호흡, 자연에 대한 감정적 반응으로 고동치는 가슴이나 떨리는 몸, 터져 나오는 눈물 등은 에밀리가 자신이 다루는 주제와 신체적으로 얼마나 밀접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녀에 대해 오랜 시간 연구한 데버러 러츠의 말처럼, 난 에밀리에 대해 문학관이 말해주지 않는 비밀을 알아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카일리 Keighley 버스 정류장에서 챙겨 온 안내 책자에도 경고했듯이, 이곳의 날씨는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박물관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잔잔했던 날씨가 본격적으로 무어로 발걸음을 옮기자 또 날씨는 또 바뀌었다. 우산을 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휘몰아치는 비를 피하는 둥 맞는 둥 하며 브론테 자매가 자주 산책을 했다고 하는 무어로 발걸음을 향했다. 브론테 자매 덕분에 유명해진 무어 Moor는 황무지라는 뜻으로 주로 잉글랜드 북부에서 통용되는 말이라고 한다.
노르스름한 어두운 빛깔을 내던 건물은 목사관에서 나와 교회와 묘지를 지나며 점점 짙어져 갔다. 짙은 검은색 돌 울타리가 자리를 내고 있었다. 차분하다기보다 칙칙한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넓은 돌판 길을 따라 걸었다. 제법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나무와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양옆으로 쌓인 돌무더기는 이끼에 덮여 있었지만 원래 색은 검은색이라는 것이 보였다.
전날 나는 길 한쪽 길쭉한 돌들이 습지와 면한 곳을 따라 5~6미터 간격으로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돌이 길쭉하고 회가 발려 있는 것은 어두울 때 아니면 지금처럼 눈 때문에 단단한 길이 인접한 깊은 늪과 분간이 안 될 때 길잡이로 삼으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지금은 길잡이 돌들이 흔적조차 없고, 거뭇거뭇한 점들이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을 뿐이었다.
원래 이 울타리는 산책로를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영국의 요크셔나 스코틀랜드 북부 하일랜드 지방 등에서 볼 수 있는 돌담장은 원래 양목장의 울타리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돌 울타리를 가리켜, 스톤 헷지(stone haga)라고 한다.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울타리를 한 번 더 감싼 이끼가 말해주고 있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몇 백 년이나 걸려 쌓아져 온 헷지는 빙하로 사라진 계곡에서 산의 능선까지 뻗어나가 역사와 삶의 무게가 느끼지는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실 하워스라는 이름에는 바로 이 헷지에서 따왔다. 하워스의 Ha-는 앵글로 색슨어 hage(헷지)에서 따온 말로 ‘울타리’라는 뜻이고, -worth는 앵글로 색슨어 worth로 ‘둘러싸인 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두 단어가 합쳐진 하워스의 의미는 헷지로 둘러싼 곳이라는 뜻이다. 언덕을 올라 마을 전경을 둘러보면 녹색 구릉지대 사이를 가르기도 하고 그 사이를 타고 올라가는 돌무더기들이 만든 선들이 보인다. 차게 부는 바람으로 추론하건대 양목 장간의 경계를 가른 헷지를 돌로 만든 이유는 시도 때도 없이 부는 바람 속에 그 자리를 지키도록 하여 안개 자욱한 그 땅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하려는 작은 배려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눈으로 뒤덮여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짙은 안개 때문에 걷는 속도가 느려지기도 했지만, 비보다 더 큰 문제는 바람이었다. 원래 바람이 거센 곳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 남부 콘월에서 거친 바닷바람을 맞은 터라 더 심할 리가 있겠나 싶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짧은 착각이었다. 한없이 길게 펼쳐진 무어 랜드에 나무보다 잡초와 야생화들이 뿌리를 내린 이유는 그들이 바람을 타고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원을 부는 바람을 타고 유연하고 움직일 수 있는 이들만이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따금씩 보이는 나무는 바람에 휘어지기도 하지만 고고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먼발치에서 몇 그루씩 보였다.
“내 동생 에밀리는 무어를 무척이나 사랑했어요. 동생은 무어에서 황량한 고독을 느끼면서도 진정한 자유를 맛보았어요.”
오늘 Bronte way를 따라 걸으며 언덕바지에 있는 top withens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왕복 3시간 코스로 돌아가는 시간을 계산해도 거의 2시간 정도 여유시간이 있었다. 다만, 궂은 날씨로 인해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우비를 쓰고 걸어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고, 가다 보면 앞뒤로 누군가는 반드시 만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흰 안개에 잡초들 사이에 오랫동안 발걸음으로 길을 내었던 흔적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나와 같은 여행자를 위한 나무 안내판에 적힌 步道라는 한자어가 낯설었지만 반가웠다. 힘차게 걸음을 옮겨 1시간 반 정도 걸었지만, 누군가 걸었던 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이 길이 하나로 쭉 나있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두 개로 갈라지기도 하고 흐릿해지기도 하니 제대로 걷고 있는지 자신이 없었다. 콘월에서 트레킹을 했을 때 종종 발견할 수 있었던 안내 표지판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주위에는 보라색 히스 군단이 만드는 언덕이 높고 낮음 정도의 차이만 보였다. 초조한 내 마음과 달리 하워스 무어는 여름에 볼 수 있는 보라색 히스 군단이 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길을 잃었다는 상황을 인지하는 순간, 즐겁던 마음도 브론테 뮤지엄으로 돌아가는 길조차 자신이 없었다. 길을 잃었다는 두려움이 마음을 가득 채웠지만, 사실 마음 한 켠으로는 “어떻게든”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다. 이미 한번 경험했던 일이기에, 길잃기는 두렵지 않았다. 잃는다고 해서, 모든게 틀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잉글랜드 남쪽 끝에서 충분히 배우고 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직 시간은 오후 2시밖에 되지 않았고, 해가 지기 전에 하워스의 어느 마을이든 닿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음을 회복하기 이전까지 두려움에 잡혔을 때는 발끝이 젖어들어가는 운동화와 가는 비바람에 젖은 옷깃과 머리칼. 우산을 덩그러니 들고 있는 내 모습에 그 당당했던 자신감이 젖어 들어간 운동화 발끝까지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스마트폰을 켰지만, 산 정상과 개울 위에 나를 놓는 구글 맵을 보고, 다시 주머니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무모한 도전을 또 할 것인지.
무모한 도전은 한번으로 족했다. 날씨가 따르지 않을 때 모험은 더없이 위험했다. 판단을 마친 후, 빠르게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갔다. 다행히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여러 갈래로 난 길도, 흐릿한 길도 내가 이미 지나온 길들이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물밀 듯 밀려내려 가는 마음을 천천히 다잡자 저 멀리 전깃줄이 보이는 것 같았다. 높은 구릉보다 완만한 구릉을 따라 길을 내려가다 보면 내가 출발한 브론테 뮤지엄이 있는 마을은 아니지만 어느 마을에 닿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 하나가 머리에 드리워지자, 쉽게 떨어지지 않던 발걸음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그럼에도, 혹시나 낙오되지는 않을까 싶어 두렵기도 했다. 괜찮을 것이라는 믿음과 이러다 큰 일 나는 건 아닐까 싶은 걱정이 교차했다. (역시, 사람은 반복된 학습이 필요하다. 랜드 엔드에서 교훈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기에 난 눈 앞의 현실에 갈팡질팡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 아찔함은 강아지 짖는 소리와 파란 우비를 입은 영국 할머니를 만나면서 해소되었다. 할머니에 비하면 원래도 한참은 어린아이였지만, 길을 잃었다는 사실에 한참 놀라 있던 나의 어버버한 표정과 엉성한 영어를 들은 할머니는 마치 5살짜리 어린 손녀를 대하듯 쉽게 설명해주었다. 그리곤 브론테 뮤지엄으로 돌아가는 길을 함께 걸어주며, 안도하는 나를 보며, 내가 얼마나 무모한 길을 걸었는지 알려주셨다. 난 무어를 한참 걸어 올라갔지만, 결국 나는 원래 가려고 했던 곳에 도착하지 못했다. 강아지와 함께 걸어온 영국 할머니에게 오늘 같은 날씨에 그곳에 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 이 길을 가고 싶다면 이곳에 숙소를 잡고 날씨를 살피고, 날이 좋을 때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계획된 여정에 따라 움직이는 나에게 내일 이곳에 다시 올 수는 없었다. 이 곳에 살았던 브론테가 나처럼 이곳을 헤매지는 않았겠지만, 내가 걸었던 길에 그녀들이 걸었던 곳이 겹쳐지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다음에 다시 이곳에 오기로 마음먹고 브론테 산책로에서 내려왔다.
브론테 뮤지엄에 가까워지자 다시 뒤돌아 무어를 보자 여전히 하얀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워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내가 참 무모하게도 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신발은 진흙과 비에 젖어 있었고, 초콜릿과 물만 먹었던 위는 맛있는 음식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다. 타박타박 카일리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브론테 자매는 하워스라는 벽지에서 영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썼다. 그녀들의 글에 어떤 시대적인 소명이 담겨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녀들의 개인적 소명을 따라서 자기 자신의 내밀한 세계를 문학으로 분출하고자 했다. 그 뜨거운 열망이 탄생시킨 작품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 때로 어떤 문학 작품은 그 당시의 시대적 소명의 영향을 받아 그 시대를 풍미한 소설이 된다. 하지만 이렇듯 자신의 내면에 응축한 열망을 풀어낸 소설은 그 시대를 넘어, 시공간을 관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운다. 한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에 깃든 메시지는 20세기 버지니아 울프에게, 21세기 나에게도 전해지고 있다.
폭풍의 언덕에 올라 비바람을 걸으며 이런 생각도 했다. 차가운 바람이 뺨에 스칠 때 그녀는 그녀 마음속에 불었언 황량한 바람에 귀 기울인 게 아닐까. 그리고 이를 소설로 풀어낸 것이 아닐까.
내가 이곳에 살았다면, 난 무엇을 들었을까.
그리고 무엇을 남겼을까.
<참고문헌>
브론테 자매 평전, 데버러 러츠, 뮤진트리 (2018)
영국을 걷다, 이영철, 미래의 창 (2017)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문학동네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