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트라팔가 광장 Trafalgar Square'에서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간다. 아니다, 생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그 생에서 가능한 모든 변화의 닫힘을 향해. 우리는 기나긴 휴지기를 부여받게 된다. 질문을 던질 시간적 여유를. 그 밖에 내가 잘못한 것은 무엇이었나? 나는 트라팔가르 광장으로 몰려간 한 무리의 애들을 생각했다. 나는 일생을 통틀어 단 한 번만 춤을 추는 한 젊은 여자를 생각했다. 앞으로도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을 모든 것들 중에서 내가 지금 알지 못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_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세계 시간의 중심이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 (Royal Observatory, Greenwich)라면, 런던 시간의 중심은 어디일까?
단연,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이라고 생각한다.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y in London), 캐나다 하우스(Canadian High Commission), 사우스 아프리카 하우스(South African High Commission), 세인트 마틴 인 더(St Martin-in-the-Fields)의 앞마당.
런더너(Londoner)와 런던을 방문하는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쉼을 안겨주는 휴식처.
그곳은 런던에서 가장 큰 광장 트라팔가 광장이다. 런던에서 숙소를 소호 근처로 잡았던 난 트리팔가 광장의 아침 풍경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아침에 한적한 광장을 지나갈 때마다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서울 시청 앞 광장이나, 광화문 광장보다 물리적으로 확실히 작은데 작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니 탁 트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일만에 시야가 영국 광장 스케일에 맞추어진 것도 아닐 텐데. 왜 그렇게 느꼈는지 생각해보았다. 작가 송동훈은 트라팔가 광장을 가리켜 '런던의 오아시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탁 트인 광장 한복판에 놓인 분수와 장대한 내셔널 갤러리의 입면이 주는 시각적 청량감은 공감한다. 그것만으로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워털루역에서 트래펄가 광장까지 걸어오며 느낀 감정을 곱씹으며 답을 찾았다.
광장이 품고 있는 이야기가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
트래펄가 광장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크게 다가온 이유는, 이 공간을 다층적으로 만드는 이야기가 그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마치 팔림프세스트(palimpsest)처럼.
팔림프레스트는 '다시(again)'라는 뜻을 가진 고대 그리스어 팔린과 '새긴다(scraped)'는 뜻을 가진 프센이 합쳐진 말로 "사본에 기록되어있던 원래 문자를 지운 후, 다른 내용을 그 위에 덮어 기록한 양피지 사본"을 말한다. 과거와 현재의 텍스트가 서로 겹쳐진 팔림프레스트는 다의적 공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트라팔가 광장은 그 광장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간 역사적 흔적이 무형과 유형의 형태로 남겨져 있다. 그렇기에 도시문화 전문가들은 트라팔가 광장을 자타가 공인하는 런던의 시간과 사람들의 흔적이 쌓인 ‘팔림프세스트'로, 영국 근현대사를 보여주는 중심지라고 말한다.
어떤 흔적이 그 광장에 남아 있을까.
이른 아침 광장을 지나는데. 독특한 현대 미술품이 있어서 다가갔다. 녹이 슨 동상이었는데, 의도적으로 물을 흐르게 두어 녹이 슬도록 만든 작품이었다. 내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녹으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일그러져있었다. 설명문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광장 중심의 넬슨 동상 곁에 선 4번째 좌대에 놓은 예술 작품처럼, 과거 영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처럼 보였다. 1800년대 사용했을 법한 긴 장총과 전쟁에 지쳤는지 바위에 지친 몸을 기대는 모습은 마치 식민지 건설을 위 인도와 아프리카로 떠났던 영국 군인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 무언가에 지쳤는지 알 수 없지만 가뜩이나 고단해 보이는 동상의 형태에 녹까지 슬어 있어 더 지쳐 보였다. 다만 그 형태가 녹이 생겼음에도 계속해서 그 형태가 남아 있는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채 어딘가에 내재되어 있는 제국주의 생각을 꼬집는 작품 같아 보였다.
이 작품 자체가 독특하기도 했지만, 지나가던 사람들의 태도가 더 눈길을 끌었다. 잠깐 시선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관심 있게 들여다보는 사람이 내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길거리를 걸어 다닐 때 무언가 있어도 들여다보는 일이 없는 나와 달리 관심 있게 바라보는 모습에서 혹시, 나와 같은 여행자가 아닐까. 여행지에서는 작은 돌 한조각도 특별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평소에 나처럼 주변 사물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람들도 트라팔가 광장에 놓인 예술작품이기 때문에 관심을 쏟은 건 아닐까. 꽤 합리적인 의심을 거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광장 한쪽에서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예술 작품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또 아직 광장에 찾아오는 사람보다 광장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광장에 잠깐 머무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리 예술가는 오늘 보여주고 싶은 퍼포먼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광장 바닥이 캔버스인 듯,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모습은 지나가는 사람들과 사뭇 달라보였다. 오랫동안 관찰할 수 없었지만, 오늘의 예술을 준비하는 사람의 모습을 눈에 담은 채 난 광장을 지나쳤다. 또 다른 날, 정오 무렵에 트라팔가 광장을 찾았다. 어느새 사람으로 가득 찬 광장은 이른 아침과 사뭇 달랐다. 아침에 보지 못했던 거리의 예술가들이 저마다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었고, 그 사람들 사이에서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해 줄 선 사람, 관람하고 나온 사람, 광장 한켠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광장 곳곳을 채우고 있었다. 아마 이 모습은 가장 평범한 그리고 평화로운 트라팔가 광장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7월 여행객인 나에게 트라팔가 광장은 자신이 가진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영국에서 큰 시위가 있을 때면 트라팔가 광장은 시위대와 경찰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섞인 곳이 된다. 영국에서 시위를 상징하는 공간이자, 가장 먼저 사람들로 가득 찬 곳도 바로 트라팔가 광장이다. 우리나라의 여의도 광장, 광화문 광장이나 시청 앞 광장과 마찬가지로. 트라팔가 광장은 노동자 계급 운동, 여성 참정권 운동, 반 인종주의 운동과 같이 시민사회의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던 장이었다. 또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곳이며 동시에 인류 문화가 펼쳐진 장이기도 하다. 기독교 크리스마스 행사, 무슬림 라마단 축제, 힌두 축제, 중국 설날 축제, 유대인 하누카 축제 등이 열린다. 세계 문화에 대해 탁 트인 공간을 내준 트라팔가 광장은 "세계의 문화가 잔치를 벌이는 곳"이기도 하다. 한해에도 몇 번씩 트라팔가 광장은 다양한 이야기를 쓰고 지우길 반복한다. 시간을 넓혀 트라팔가 광장 자체의 역사만 보아도 광장이 만들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국 역사에 굵직한 흔적이 이곳에 세겨졌다 지워지길 반복했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나무나 꽃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광장. 이곳에 많은 사람이 휴식을 취하는 이유로 다양한 이야기를 쓰고 지우길 반복해도 여전한 광장의 넉넉한 공간감도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건, 나뿐일까? 나뿐이어도 상관없다. 트라팔가 광장을 찾는 이유, 광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모두가 다 다를 테니까.
“트래펄가 광장은 진정한 제국의 중심이다. 역사적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캐나다 하우스, 사우스 아프리카 하우스가 있어서 자치령과 식민지가 식민 모국의 수도 런던에서 진정한 고향을 찾기 때문이다.”
트라팔가 광장이 만들어진지 100년도 채 안되었을 때 출판된 여행안내서는 트라팔가 광장을 위와 같이 설명했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위험한 설명이지만, 당대의 시각에서 볼 때 해가 지지 않는 영국의 자신감이 묻어난 대목이었다. 트라팔가 광장이 제국의 중심이라고 한 이유는 주변의 캐나다 하우스, 사우스 아프리카 하우스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이름이 '대영제국'의 찬란한 역사의 초석과 같은 사건과 동일한 이유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트라팔가 광장은 원래 '킹스 스퀘어'란 이름을 가질 뻔했다. 광장은 1830년 6월 윌리엄 4세를 기념하여 ‘킹스 스퀘어’를 만들 계획으로 조성될 광장이었다. 하지만 해군 건축가 조지 리드웰 테일러는 광장을 ‘트래펄가 해전’의 승리와 연관시킨 공간을 만들 것을 제안했고, 그 결과 트래펄가 광장이 된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어떤 전투이기에, 왕을 기념해 만들려던 의도까지 바꾸었을까. 무려, 동쪽으로는 영국 금융의 중심지 시티, 서쪽으론 피카딜리 서커스, 남쪽으로는 다우닝 가 10번지 총리 관저와 국회의사당, 북쪽에는 영국박물관과 연결되는 런던의 심장부와 같은 광장의 이름을 바꾼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트래펄가 해전은 누가 정했는지 알 수 없지만, 살라미르 해전, 칼레 해전, 한산도 대첩과 함께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다. 살라미르 해전과 칼레 해전, 한산도 대첩과 마찬가지로 트래펄가 해전은 영국의 국운이 걸린 전투였다. 1804년 프랑스 제국의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대관식 후 1803년 프랑스 제국에 선전 포고한 영국을 응징하기로 결정했다. 의회민주주의란 독자적 국가 체제를 가지고 있던 영국을 프랑스 제국의 영향력 하에 굴복시키기로 마음먹자, 해야할 일은 명확해진 것이다. 망설임 없이 그는 영국을 침공을 선언했다. 파죽지세로 유럽 대륙을 장악한 나폴레옹 군대가 도버 해협을 건너온다는 소식에 최강 해군을 가지고 있던 영국이라 해도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한 나라가 아니라 사실상 유럽 대륙 전체였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해도 200여 년 전, 칼레 해전에서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친 것과 같은 일이 반복되리라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영국 해군과 전면전을 치루기보다 육지 전투에 자신이 있는 자신의 군대를 영국 본토에 상륙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그에게 필요한 건 자신의 군대를 상륙시킬 수 있는 여섯 시간 동안의 도버 해협 재해권이었다. 여섯 시간 동안 재해권을 가진다면 군대를 영국 본토에 보내 승리를 얻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영국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고 믿었던 나폴레옹은 과거 일을 떠올렸다. 1789년 나일강 하구 알렉산드리아 앞바다에서 영국 해군에게 전멸당했던 나일강 해전이었다. 그는 프랑스 해군만으로 도버 해협 재해권 여섯 시간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과거 영국의 기세에 꺾였지만 여전히 유럽 내에서 위상이 높았던 스페인 함대와 함께 도버 해협으로 향했다. 영국 해군과의 설욕전을 예상하며 진격한 나폴레옹 앞에 선 영국의 수문장은 1789년 나일강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을 처참하게 무너뜨린 영국 해군의 사령관 넬슨 제독 (Horatio Nelson)이었다.
국운을 내건 전투에 영국이 보낸 사령관은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 군대가 상륙할 수 없도록 도버 해협의 재해권을 철두철미하게 지켜낸 넬슨 제독은 연합 함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묘책을 세운다. 연합 함대를 유인하여 섬멸시키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그 작전이 자신의 마지막 전투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1805년 10월 21일 스페인 남부 트래펄가 해협에서 넬슨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 전투의 신호 깃발이 올렸다. 33척의 프랑스 스페인 연합 함대에 나아갈 27척 영국 함대를 향하여 보내는 깃발 속 메시지는 아래와 같았다.
"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 (영국은 그대들이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할 것을 기대한다.)"
영국과 넬슨의 기대는 현실로 실현되었다. 수적으로 열세했지만 영국 해군은 승기를 잡았지만, 격렬한 적의 저항이 계속되었다. 선봉에 섰던 넬슨은 한창 전투가 진행되던 오후 1시 15분에 저격수의 총을 맞았다. 총알은 그의 왼쪽 폐와 척추가 다치는 치명상응 남겼다. 그는 자신의 부상을 숨긴 채 지휘를 계속했다고 전해진다. 오후 4시 반부터 연합 함대의 공격은 잦아들었고, 오후 5시경 영국 함대의 승리로 트라팔가 해전은 끝났다. 넬슨은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이후 영국이 유럽의 섬나라가 아닌 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대영 제국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승리를 확인한 후 넬슨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신에게 감사한다. 나는 내 의무를 다했다.(Thank God, I have done my duty.)"
그는 27척의 영국 함대에게 내린 명령의 대상에 자신도 포함시켰다는 걸 알 수 있는 유언이다. 앞선 전쟁에서 한쪽 눈과 한쪽 팔을 잃은 넬슨의 시신이 런던에 도착했을 때, 영국은 명장을 잃었다는 슬픔에 빠졌다. 국가의 위기를 완벽한 승리로 전환시킨 그에 대한 국민들의 마음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순신'을 생각하는 마음과 조금 닮지 않았을까. 1806년 1월 9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에 왕세자와 왕족, 귀족, 정치가뿐만 아니라 3만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 이후로 공식적으로 이렇게 많은 조문객이 찾아온 장례식은 처음이었다고 하니 오후 2시에 시작한 장례식은 오후 6시가 다 돼서야 끝난 이유도 알 듯싶다.
1840년대 광장이 세워졌을 때는 트래펄가 해전에서 승리하고 한 세대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지금이나 그때나 넬슨 제독은 영국인들의 자부심 그 자체였다. 당시 영국은 유럽의 변방이 아니라 세계의 제국으로 우뚝 섰으며 그 핵심엔 유럽을 재패한 막강한 해군이 있었다. 1800년대 영국 해군의 명성을 가장 널리 알렸던 사람, 트라팔가 해전의 사령관 넬슨의 기념비가 서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려 52미터의 기둥 위에 약 6미터 정도의 동상은 올려다보아도 잘 보이지 않지만 기둥 위에 선 그는 트라팔가 해협에 선 듯 비장한 자세처럼 보인다. 그가 바라보는 방향이 워털루 역인지 실눈을 뜬 채 올려다보았다. 워털루 역보다 조금 더 왼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My my, At Waterloo Napoleon did surrender. (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은 항복했어요.)
_ABBA, Waterloo 첫 소절
내가 조각가라면 죽음으로 보지 못했던 나폴레옹의 항복을 바라보는 구도를 완성했을 텐데. 1848년 문을 연 워털루역 이름과 맞추어서 말이다. 하지만 그의 동상을 만든 사람은 그가 런던 정치의 중심지 버킹엄 궁전과 그 너머 국회의사당을 바라보는 모습을 택했다. 이에 대하여 작가 송동훈은 넬슨 제독이 "나는 목숨을 바쳐 우리를 침략하고자 하는 나폴레옹으로부터 사랑하는 조국과 자랑스러운 우리의 의회 민주주의를 지켰다. 이제 그 역할은 그대들 몫이다."라는 해설을 붙였다. 그의 해설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로 인해 자존심을 번번히 구긴 나폴레옹이 "그림 한 장에 천 마디 말의 가치가 있다"라고 말했는데, 영국인들에게 넬슨 동상 하나는 천 마디 말 이상의 가치가 담긴 것이 아닐까.
넬슨의 또 다른 활약을 간단하게 알고 싶다면, 그의 동상 가까이 가면 된다. 기단부에 부조로 트라팔가 해전, 나일강 해전에서 덴마크, 러시아, 스페인 연합함대와 전투했던 장면을 새겨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곁에 선 윤이 나는 사자상은 전투에서 쟁탈한 프랑스 대포를 녹여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사자상 하나의 무게가 7톤이 넘는다는데, 4개의 사자상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프랑스 대포를 노획한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설마 사자상을 프랑스 대포만을 가지고 만든 건 아니겠지만. 여담이지만, 사자상을 만들기 위해 조각가 랜드 시어는 2년 동안 런던 동물원에서 계속해서 관찰을 반복했다고 한다. 심지어 죽은 사자를 자신의 작업실을 가져와 만들 만큼 고심 끝에 사자상을 완성했고 한다. 그의 열정 덕분인지 사자상을 만져보고, 같이 셀카 찍을 뿐만 아니라 올라타는 사람들의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넬슨 동상 곁에 숨은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해보자면, 넬슨 기념비 양 앞에 두 개의 연못과 분수대 역시 원래 계획 의도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원래 “내셔널 갤러리가 있는 테라스에서부터 광장 아래로 대형 계단식 연못”을 만들 계획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840년대 런던의 상수도는 유럽 어느 나라보다 앞선 수준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정도 규모의 물을 공급하는 것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계획을 수정해 오늘날의 모습으로 바꾼 것이다. 만약 원래 계획대로 만들어졌다면 어땠을까? 러시아의 여름궁전처럼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모습이 되었을 수도 있고, 하이클래어 성의 계단식 연못처럼 계단 높낮이를 다르게 만들어 어디에서 듣느냐에 따라 다른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음악적인 광장이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광화문 광장 양쪽에 흐르는 작은 시내와는 또 다른 물 흐름을 볼 수 있는 광장이었을 텐데 아쉽다.
내셔널 갤러리를 바라보는 방향에서 시계방향 순으로 원래 앙실의 마구간 뜰로 사용했던 부지를 ‘시민들을 위한 문화적 공공장소’를 만드는 공간으로 제공했던 국왕 조지 4세 기마상,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에서 영국을 위해 헌신했고 1857년 인도에서 일어난 세포이 항쟁을 진압하던 중 전사한 헨리 해블록 장군과 인도의 식민지 개척에 있어서 공헌을 한 찰스 네이피어 장군 동상이 놓여 있다. 인도 사람들이 바라본다면 만감이 교차할 동상들과 달리 내셔널 갤러리 별관과 가장 가까운 마지막 4번째 자리는 주기적으로 그 주인공이 바뀐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커다란 손가락 모양의 상이 올라와 있었다.
다른 동상과 달리 별관에 가까운 좌대는 현대 공공미술 작품을 선정해 ‘네 번째 좌대’ 프로젝트로 1999년부터 전시했다. 원래 이 광장을 설계한 찰스 배리 경의 동상을 세우려고 했지만, 그 당시에 충분한 재정을 확보하지 못해 비워두게 된 것이다. 이후 1995년에 마지막 자리를 어떻게 채울지를 두고 국민 여론조사를 했다. 그 결과, 정치인 마거릿 대처부터, 영국 대중문화의 보고 비틀스, 축구 선수 베컴, 곰돌이 푸 등이 거론되었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트래펄가 광장의 4번째 좌대 주인공은 현대미술작품이었고, 이를 가리켜 ‘4번째 좌대 프로젝트’라고 이름을 붙였다. 광장을 둘러싼 풍경과 비교해 현대미술작품은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에 이 프로젝트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은 비난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트라팔가 광장이란 이름부터, 동상 그리고 그 주변 건물들까지 영국 제국주의 문화로 채워진 곳에 4번째 좌대에 올랐던 현대미술작품이 가진 상징성은 굉장히 크다. 영국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을 때때로 올려서 광장의 다른 기념물들이 보여주는 역사적 서사를 환기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트라팔가 광장은 약 180년 동안 수많은 역사가 담긴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 공간에 오랜 시간 남아 있는 조형물들은 단편적인 역사만을 보여준다. 그 한정적인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4번째 좌대 프로젝트’가 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역사적인 도시 런던의 앞으로의 역사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게 만드는 동상이다.
내가 방문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4번째 좌대'에 올라 있는 작품은 David Shrigley의 'Really Good'이다. 커다란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 모습으로 긍정적인,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상징물인 듯싶은데. 과연 무엇에 대하여 좋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넬슨이 지켜낸 영국이 여전히 좋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 EU를 탈퇴하는 결정을 내리고, 이민자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내비치는 영국을 여행한 난?를 붙일 수밖에 없었다.
Really Good?
트라팔가 광장의 이름과 넬슨 동상, 분수대, 네 번째 좌대까지. 무엇하나 원래 계획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처음의 계획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만들어진 기념물 투성이인 트래팔가 광장을 다시 바라보았다. 역시, 이야기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던 광장은 확실히 커 보였다.
역시 이야기 때문일까. 내셔널 갤러리 관람을 마친 후 광장을 걸으며 생각했다.
"글을 쓰고 지우는 팔림프세스트보다 임파스토(impasto) 기법과 닮았는데?"
캔버스에 물감을 덧발라 실제 질감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은은한 그림자까지 만드는 임파스토 기법처럼 각각의 기념물들이 가진 이야기의 결이 트라팔가 광장을 다층적으로 입체적으로 만든단 생각이 들었다. 방금 내셔널 갤러리에 걸려있었던 수많은 유화 작품들의 영향이 빚어낸 생각이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자, 이젠 트래펄가 광장마저 임파스토 기법처럼 보이게 만든 내셔널 갤러리의 작품을 만날 차례다.
<참고문헌>
도시는 기억이다, 도시사학회, 주경철(대학교수) 외 1명, 서해문집 (2017)
런던 미술관 산책, 전원경, 시공아트 (2010)
송동훈의 그랜드 투어 서유럽 편, 송동훈, 김영사 (2012)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다산 책방 (2012)
트라팔가 광장 앞 그 미술관, 엄미나, 시그니처 북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