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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란 Aug 14. 2018

스코틀랜드의 ‘벨 에포크’를 만나다

'글레스 고(Glasgow)'에서




“몰랐어요. 모든 게 그렇게 지나가는데, 그걸 몰랐던 거예요. 데려다주세요. 산마루 제 무덤으로요. 아, 잠깐만요. 한 번만 더 보고요.


안녕, 이승이여, 안녕. 우리 읍내도 잘 있어. 엄마, 아빠, 안녕히 계세요. 째깍거리는 시계도, 해바라기도 잘 있어. 맛있는 음식도, 커피도, 새 옷도, 따뜻한 목욕탕도, 잠자고 깨는 것도. 아, 너무나 아름다워 그 진가를 몰랐던 이승이여, 안녕.     


살면서 자기 삶을 제대로 깨닫는 인간이 있을까요? 매 순간 마다요?” 


_ 『우리 읍내』, 손톤 와일더               







  1999년 12월 31일에서 2000년 1월 1일로 넘어가는 순간. 그 순간을 난 기억 하지 못한다. 기억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세기에서 또 다른 세기로 넘어가던 그 순간을 특별하게 여긴다. 한 세기가 끝나고 다른 세기가 시작된다는 건 사실 인간이 부여한 개념일 뿐인데도 말이다. 사실, 물리적인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닌데. 세기에서 세기가 변화하던 그때는 2017년 12월 31일에서 2018년 1월 1일이 되는 순간과 다르게 생각한다.  어느덧 밀레니엄 시대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시간이 흘러 2000년 1월 1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싶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도 19세기에서 20세기로 세기의 앞자리가 바뀌는 때는 특별한 순간이었다. “유럽의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세기말, 세기 전환기, 또는 좋은 시절이라는 뜻의 벨 에포크 la bell époque”라고 정의한다. 근대에서 현대로 변하는 시기였고 그 시기에 유럽에는 희망이 넘쳐흘렀다. 예술은 꽃을 피웠고, 시민들의 삶의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소수만이 향유했던 고급문화와 다른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중문화가 태어났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대중이 예술의 소비자로 부흥했던 시기가 바로 20세기였다. 


  20세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가 많이 있겠지만, 내가 영국에서 20세기를 가장 강렬하게 느낀 곳은 바로 클래스고였다.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는 20세기의 애칭 ‘벨 에포크’와 참 잘 어울리는 도시다. 세기 전환기에 영국의 어느 도시보다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고, 예술이 꽃피웠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큰 존재감을 남겼지만, 21세기로 시간이 흘러갔듯이 그 존재감도 조금 뒤로 물러난 듯싶다. 글래스고의 정체성이 분명하지만, 1896년에 개통한 글래스고 지하철(Glasgow Subway)이 영국에서 두 번째로, 세계에서 네 번째로 지하철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듯이 글래스고는 21세기를 관찰하기보다, 영국의 ‘벨 에포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도시였다. 


글래스고 모던 아트 갤러리 Gallery of Modern Art


 

 오전 10시쯤, 스코틀랜드의 또 다른 도시 글래스고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캐리어를 재빠르게 버스 정류장에 있는 가방 보관소에 맡겼다. 제법 큰 테러가 있었기 때문에 가방 보관소 앞에는 수화물 검사 기계가 있었고, 직원 2명이 상주하고 있었다. 짐을 맡기고 주황색 토끈을 받고 본격적인 글래스고 여행을 시작했다. 글래스고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많은 터라 1박을 할지 말지를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 버스 정류장에 영국에선 보기 드문 가방 보관소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망설이지 않고 1박 계획을 철회했다. 실제로 내가 글래스고에서 둘러볼 곳은 하루 만에 다 둘러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지 광장 George Square의 월터스콧 동상

  여행을 시작하기 위해 글래스고 시대 한복판에 위치한 조지 광장 George Square으로 내려갔다.  조지 3세의 이름을 따 1781년 완성된 조지 광장은 크리스마스 축재, 새해맞이 카운트다운 이벤트가 열리는 글래스고를 대표하는 광장 중 하나다. 어쩐지 영국을 대표하는 경관인 런던의 트래펄가 광장과 비슷한 것 같았다. 물론 조지 광장을 스코틀랜드의 트래펄가 광장이라고 부르기에 작은 규모다. 하지만 조지 광장의 중심에 우뚝 솟아 있는 동상의 상징성은 트래펄가 광장의 넬슨 동상 못지않다. 바로 월터 스콧 경의 동상이기 때문이다.


 사각형 공간의 중심에 있는 월터 스콧 경 동상은 올려다보아도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월터 스콧 경은 스코틀랜드의 상징 그 자체인 것 같다. 월터 스콧은 스코틀랜드의 자랑이자 역사이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그의 자취는 오늘날 스코틀랜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계속해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조지 광장 주변에는 글래스고 시의회 본부가 있고, 조금만 걸어가면 글래스고 모던 아트 갤러리 Gallery of Modern Art가 있다. 글래스고 모던 아트 갤러리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이지만 중앙의 박공 내부를 색유리로 장식하여 과거의 권위로부터 조금 떨어져 미래지향적인 자신의 결을 나타내는 것 같다. 조지 광장에 세워진 동상과 달리 모던 아트 갤러리에 앞을 지키는 웰링턴 공작 Arthur Wellesley이 있다. 그렇다면, 왜 글래스고 모던 아트 캘러리는 웰링턴 경의 동상을 선택했을까. 



  웰링턴 경은 글래스고 사람들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닌 인물이다. 잉글랜드 역사에서 웰링턴 경은 넬슨과 함께 나폴레옹 군대를 무찌른 인물로 유명하다. 특히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였던 워털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장군으로 공작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이후 웰링턴 경은 영국 수상될 수 있었는데, 그가 영국 수상이 되었던 1820년대는 과거와 달리 낡은 헌정 질서에 대한 개선이 요구되던 때였다. 당시 영국 성공회 신자만이 정부 관직을 맡을 수 있었는데, 성공회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의회 진출을 보장해주는 등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성공회 국가였던 잉글랜드는 가톨릭교도에게만큼은 의회 진출을 보장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몇 차례나 유혈사태까지 갔던 가톨릭교도에게 동등한 권리를 인정한다는 건 잉글랜드 정서상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1829년 아일랜드 민족주의 지도자인 대니얼 오코넬이 선거에서 당선이 된 것이다. 그는 가톨릭교도였고, 이미 종교에 의한 차별에 대한 반발심이 누적되어 있던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지역에선 오코넬을 인정하지 않으면 전쟁도 불사할 기세였다. 이때 수상이었던 웰링턴 경에겐 대니얼 오코넬의 당선을 무효화하여 근대 종교전쟁을 벌이거나, 가톨릭교도에게만 제한했던 피선거권을 인정하는 선택지만 있었다. 웰링턴 경은 가톨릭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를 국교도에 대한 배반으로 보았던 사람들에게 큰 반발을 야기했고, 이후 그의 정치 인생은 힘겨워졌지만 아일랜드 사람들이 살았던 글래스고 사람들에게 웰링턴은 배신자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동상으로 그를 기억하는 걸 보면. 


웰링턴 경 동상은 재기 발랄한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추운 겨울에 위안부 소녀상에 목도리와 모자를 씌운 경우는 있지만, 보통 엄숙한 동상에 고깔을 씌우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보통 동상은 세운 사람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인물을 바라볼 때 떠오르는 역사, 감정, 교훈은 상상의 공동체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기억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 광장에 동상을 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물론 동상을 의식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지만 동상으로 만들어진 인물은 교과서나 책과 같이 역사서에서 보다 더 깊이 자리하게 된다. 하지만 모던 아트 갤러리 앞에 웰링턴 공작의 동상은 조금 다른 느낌이다. 아름답게 조각한 동상을 예술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과거가 아닌 현재에 예술적 원천을 둔 모던 예술의 특징을 입구에서부터 보여주고 있다. 



  글래스고 모던 아트 박물관의 외관만 ‘모던’을 표상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도시 곳곳에서 모던이라는 정체성을 심은 건축가가 글래스고에 있었다. 바로 영국 아르누보 건축의 대가 매킨토시 Mackintosh다. 


  그는 글래스고에서 태어나, 글래스고에서 후학을 양성했던 그에게 글래스고는 고향 이상의 의미가 담긴 곳이었다. 1896년 런던 수공예협회 전시회에서 전시한 것이 크게 호평을 받았다. 대량생산으로 만들어진 가구가 아닌,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드는 아르누보의 경향 중 직선적이고 추상적인 기하학을 사용한 가구 디자인이나 건축물을 만들었다. 또 많은 아르누보 건축가들과 달리 기능을 강조한 합리주의적 건축을 시도하였으며, 명실상부 영국 아르누보 건축의 지도자였다. 하지만 건축에 있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만들었던 그는, 말년에는 그의 작품성에 대해 회의적인 평가도 많았다. 



글래스고 모던 아트 박물관 근처에 있는 라이트 하우스 The Lighthouse에 가면 매킨토시의 가구와 건축 모형도를 살펴볼 수 있다. 특히 그의 작품에 그가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시그니처와 다름없는 ‘장미’ 장식이 있는데, 가구나 건물 내부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장미 장식은 에밀 갈래의 가구에서 볼 수 있는 자연물 표식과 조금 닮아 있다. 주로 기하학적이고, 직선과 격자가 주는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던 그의 작품 중간중간에 표식처럼 들어간 장미는 그가 사랑했던 아내에 대한 애정 표현이라고 한다. 





라이트 하우스의 맨 꼭대기 층에 올라가면 글래스고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데, 전망대를 한 바퀴 돌면, 글래스고 곳곳에 매킨토시가 세운 건축물들이 어디에 있는지 먼발치에서나마 확인할 수 있다. 조지 광장 주변에 밀집되어 있는 고전주의 건물과 빌딩이 줄지어져 있는 시가지 중간중간에 놓여있는 그의 건축물은 더 이상 돋보이지 않는다. 세기말에 자신의 얼굴을 각인시켰던 매킨토시의 건축물은 이젠 글래스고 도시와 함께 녹아져 그 모습을 단번에 찾기 힘들다. 한 때는 그의 건축이 유행처럼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이제 그의 작품은 20세기에 또 다른 유행에 그 모습은 사라져 가는 듯싶었다. 하지만 10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의 작품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변하는 세기 전환기에 진짜 다리 역할을 했던 작품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고, 고아한 그의 존재감이 나타난다. 그의 가구나 건축물을 보고 있으면, 벨 에포크 시기보다 더 빠르게 바뀌는 트렌드 속에서 자기다움을 지켜낸 그의 비결이 궁금해진다.




  20세기 초 글래스고에 세워진 건물이, 2006년에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바로, 켈빈 그로브 미술관 및 박물관 Kelvingrove Art Gallery and Museum이다. 수직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인 매킨토시의 작품과 전혀 다른 느낌의 건축물이다. 처음 외관을 보고 난, 타지마할을 둘러싼 붉은 성채 중 하나인 줄 알았다. 붉은 벽돌을 이용한 것도 독특했지만, 19세기 말부터 지어진 건축물이라고 하기엔 모던적인 느낌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물은 하나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여 그 지역의 랜드마크가 될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주변 건축물과 조화를 고려한다. 켈빈 그로브 미술관 및 박물관 근처엔 세계적인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가 공부한 글래스고 대학교가 있다. 1451년에 세워진 글래스고 대학교 건물들 중에 켈빈 그로브 미술관 및 박물관 주변에 있는 건물들이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켈빈 그로브 건물을 세울 때 과감한 변화를 시도하기보다 조화로운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을까. 


  켈빈 그로브 미술관 및 박물관은 2006년에 개관했지만, 현대에 개관한 박물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작품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 기증을 받은 작품들인데, 이미 많은 수집품들을 기증했기 때문에 전시품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회화와 박제된 동물, 파이프 오르간까지 다양한 전시품들을 확보해 방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안겨주고 있다.




  다른 미술관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작품이 바로, 글래스고 소년들 Glasgow Boys의 작품이다. 벨 에포크 시기에 글래스고에서 활동했던 이들은 다리파나 청기사파와 같이 뜻과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모임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들은 글래스고 시의 지원을 받아 예술 교육을 함께 받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비슷한 듯 자신만의 개성 있는 화풍을 완성해나갔다. 189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 활약했던 글래스고 소년들의 그림을 따로 모아서 전시를 하고 있다. 다른 미술관에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작품들이다. 물론 르네상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다룬 곳을 가면 익숙한 그림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오로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글래스고 소년들의 그림을 보았다. 


  1층 전시실에 글래스고 소년들 작품은 화가들 대부분의 나이가 비슷했고, 20대부터 40대까지 그렸던 작품만을 모아두었다. 정교한 작품도 있지만 이제 막 화가의 세계에 입문한 젊은 화가의 투박한 붓터치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 어떤 작품에서도 ‘안이함’은 보이지 않았다. 20대가 된 이후 난 때때로 “아직 어리니까, 아직 경험이 없으니까, 어쩌면 연습일 수 있어”라는 생각으로 적당히 최선을 다한 것에 대한 변명을 만들곤 했었다. 하지만 글래스고 소년들의 그림을 보며 나에게 미흡하다거나,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은 있었어도 적당히 타협한 결과물은 없었다. 



  화가들 저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책임감이 있기도 했지만, 함께 모였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굉장히 나약한 존재. 스스로에게 의무를 부과하고 완벽하게 완수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많은 예술가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만, 약해지는 순간이 올 수 있다. 이때 자신에게 자극을 주고, 다시금 동기부여를 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동료는 큰 힘이 된다. 혹은 같은 시대에 같은 공간을 바라보면서 다른 문제의식을 발견해 화화로 표현할 때 또 다른 상상의 지평이 열릴 수도 있다. 글래스고 소년들은 혼자가 아닌 함께 모여서 세기말에서 새로운 세기 사이의 변곡선을 긋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의 그림이 급속도로 바뀌지 않았다. 서서히 그들은 그 순간순간에 몰두해 자신의 작품을 완성했다. 벨 에포크 시대의 예술은 산업화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유행하는 속도가 참 빨랐다. 저마다 자신의 개성을 들고 세상에 나와 누군가는 큰 주목을 받았고, 누군가는 잊혀갔다. 이들의 그림이 벨 에포크 시대를 풍미했던 작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나에게 큰 충격을 주거나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것을 보면 새로운 것을 추구하던 그때에 많은 사랑을 받지는 못했을 것 같다. 물론 그들의 작품이 미국과 프랑스의 화가에게 영향을 주었고, 높이 평가를 받은 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양미술사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다. 아마 글래스고 소년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작품을 성장시키는 소년들이기보다 자기 마음속에 소년의 마음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던 이들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빠르게 변화하는 유행을 흡수했지만, 자신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놓치지 않았던 것 같다.


 


 켈빈 그로브 미술관 및 박물관의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을 뒤로하고 내 마지막 여정지인 글래스고 대성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영국 도시들 가운데 모던적인 도시 분위기를 가진 글래스고는 산업도시로 얼마나 큰 대도시였는지 건물을 보면 가늠할 수 있다. 영국의 도시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줄지어진 높은 빌딩과 순환하는 지하철이 있는 글래스고는 20세기 초 인구 100만을 넘는 대도시였다. “19세기 중반에 런던에서는 30만 가구의 주택이 상수도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글래스고의 중산층 주택에는 층마다 수세식 화장실, 샤워시설, 온수가 나오는 욕조가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런던 다음으로 큰 도시였고 성장하는 도시였다. 하지만 지금의 글래스고는 그때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 지금 글래스고에 살고 있는 사람 수는 때 그 절반을 살짝 웃도는 수준이고, 100년 전 중계무역을 통해 성장했던 도시는 좀처럼 새로운 성장 동력을 얻지 못했다. 



글래스고 대성당

 켈빈 그로브 미술관 및 박물관에서 동쪽으로 한참을 걷자 수리 중인 글래스고 대성당이 나왔다. 출발했을 때 이미 문을 닫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천천히 걸어서 갔는데, 관광객이 사라진 대성당은 고요했다. 로마네스트와 고딕 양식의 중간 기점의 건축물로 보이는 글래스고 대성당은 영국에서 보았던 대성당들에 비해 크기가 작았지만, 보통 성당을 생각했을 때 가장 보편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형태 그 자체였다.


 수리 중인 성당을 뒤로하고, 더 니크로 폴리스 The Necropolis, 공동묘지로 향했다. 더는 사용하지 않는 무덤가를 오르는 데 이상했다. 지금까지 내가 갔던 대성당들은 지하에 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성당 바로 튀에 묘지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색적이었고, 그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이 벨 에포크의 도시 글래스고였기 때문에 더 신기했다. 


 공동묘지로 향했다. 해질 무렵이었지만 몇몇 사람들이 오르고 있었다. 낮은 언덕을 천천히 오르면서 보이는 글래스고 대성당이 오묘하게 보인다. 


  성당 뒤에 묻힌 수많은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우리는 어떻게 신을 사랑할 수 있나요?"
"인간들을 사랑함으로써."
"인간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나요?"
"온정적으로든 강압적으로든 그들을 정도로 이끌고자 분투함으로써."
"정도는 어디에 있나요?"
"오르막길."



카잔차키스는 영국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며 위와 같이 이야기했다. 오르막길이라는 짧은 말로 그 답을 끝낸 카잔차키스의 글의 의미를 알 듯 말 듯했다. 제법 높은 곳에 올라 글래스고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옅은 바람이 살짝 뺨을 스쳤다. 산등성이에 있어서 바람이 세차게 불던 우리 읍내의 공동묘지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손톤 와일더의 <우리 읍내>가 떠올랐다. 내가 글래스고에서 찾아다녔던 그 시대의 이야기를 담은 희곡이다. 특히 연극의 마지막 부분 3부의 시간은 1913년, 장소는 공동묘지다. 우리 읍내가 달라졌듯이 글래스고도 달라졌다. 마차의 자리를 자동차가 들어섰다. 밤이면 집집마다 꼭꼭 문을 잠글 만큼 상막해진 도시의 모습을 덤덤하게 말하는 무대 감독의 어조에 음울한 빛도, 감정도 없이 덤덤하게 이야기하고 있어서 ‘좋은 시절’이었던 벨 에포크의 그림자가 선명히 보인다.


  글래스고는 벨 에포크라고 불리는 시기를 말 그대로 좋은 시절로 보냈다. 어느 영국 도시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성장했던 곳이었다. 도시가 빠른 속도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할수록 그 속도를 쫓아간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안을 키웠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이야기 앞에 불안을 느끼는 우리의 기분을 100년 전 이 도시에 살았던 사람들도 느꼈을 것이다. 빠른 속도로 변한 “사회가 정해놓은 성공에 이르지 못할 위험에 처했으며, 그 결과 존중받지 못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걱정을 우리가 보기에 좋은 시절을 보냈던 그들도 했을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말한다.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야말로 불안의 원천”이라고. 예전에 많은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변화를 통찰하지 못했다. 어제와 오늘은 별반 다르지 않았고, 내일도 그럴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빠른 변화 속에 고거는 점점 사라져 갔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희망 속에 ‘지금’은 점점 사라져 간다. 불안을 느끼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다 알면서도 좀체 안 꺼내보는 게 있습니다. 바로 영원한 무엇이 있다는 사실이죠. 그건 집도, 이름도, 지구도, 별도 아닙니다. 하지만 다들 뼛속 깊이 알고 있죠. 뭔가 인간과 함께하는 영원한 게 있다는 걸. 과거 위대한 인간들 모두가 말합니다. 우리 인류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까맣게 그것을 잊고 살았는가를. 네, 인간 누구에게나 영원한 무엇이 있답니다.”     



  손톤 와일더는 세기말에 불안을 느낀 사람들이 느낀 공허감을 정확하게 포착해 자신의 글에 담아냈다. 과거나 미래에 치우쳐 현재를 잃은 사람들에게 시간 감각을 상기해준다. 


  벨 에포크 도시, 글래스고의 화려함을 보고 난 뒤, 예전의 추억에 젖어 현재를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미래를 위해 지금을 감내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건 아닌지. 나는 과연 지금 ‘벨 에포크’를 느끼고 있는지 생각할 수 있었다.


 그 순간에 느낄 수 있는 행복이야 말로, 더없이 소중한 것이 아닐까. 






<참고문헌>

불안, 알랭 드 보통, 은행나무 (2011)

영국 기행, 카잔차키스, 열린책들 (2008)

우리 읍내, 손톤 와일더, 예니 (1999)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 이주은, 이봄 (2013)

클래식 영국사, 박지향, 김영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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