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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란 Aug 10. 2018

질문이 부른 생각들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



“오늘은 나의 열여덟 번째 생일이었다. 이제 드디어 그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언젠가 내가 되어야 할 존재는 아직도 멀게만 느껴진다. 오늘부터 주제가 무엇이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관심을 집중해 열심히 공부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그리고 하늘의 뜻이라면, 여왕에 걸맞은 존재가 되도록 게으름 피우지 않고 날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다!”


_ 빅토리아 여왕 Victoria의 일기 중에







  런던 London. 단어를 들었을 때, 누구나 떠오르는 것이 있을 것이다. 빅벤, 버킹엄 궁전, 셜록홈스, 런던 아이, 타워브리지, 런던탑, 영국 박물관, 신사. 이중의 하나 혹은 또 다른  것들이 머릿속을 채울 것이다. 그게 런던이란 도시가 가진 힘일 것이다. 다르게 생각해보자. 그런 상징적인 것 말고, 거리로 시야를 옮겨보면 매력 넘치는 거리를 만날 수 있다.      





  19세기에 중산층을 위해서 세워진 건축물들이 밀집된 지역이 있다. 지금은 고급 주택가로 보이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에 그곳은 산업혁명으로 부를 쌓은 중산층을 위해 런던 외곽에 주택지로 개발된 구역이었다. 우리나라의 강남과 같은 곳, 바로 켄징턴(Kensington)이다. 19세기. 영국의 역사가 곧 세계의 역사였던 시절이었다. “영국은 1850년 유일한 산업국가로서 세계의 공장이었고 세계의 은행”이었다. 동시에 전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세우며 “2,600만㎢의 영토와 4억의 인구가 대영 제국이라는 이름하에 들어갔다. 물론 이건 공식적인 대영 제국의 영토와 인구를 말한다. 실제로 대영 제국의 영향에 있었던 지역은 이보다 더 더 넓었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던 영국은 폭발적인 영토 확대와 함께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인구였다. 영국의 인구는 18세기 중반부터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1821년에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의 총인구가 1410만 명이었는데, 1851년에 무려 2080만 명으로 늘어났다. 수많은 사람들은 도시로 모여들었다. 19세기 중반(1851년)에 런던은 이미 240만 명이 거주하는 대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240만을 수용하기에 런던은 너무 작았다. 도시가 품을 수 있는 사람 수의 임계점을 넘어선 상태가 된 것이다.


   런던 중신부에는 기존의 귀족층들의 주거지가 있었고, 주거비용이 매우 높았다. 새롭게 성장한 신흥 중산층은 자신들이 런던에 거주할 집이 필요했고, 이를 위한 주택지 개발이 필요했다. 개발을 했던 지역 중 하나가 바로 켄징턴이었다. 아쉽게도 내가 산책한 켄징턴에서 19세기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던 영국의 모습이나, 새롭게 성장한 중산층의 모습을 발견하리란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21세기고 내가 서있는 곳은 도시의 주택단지이지 박물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쉽지 않은 것이지,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걸으며 켄징턴에 있는 주택들을 살펴보았다. 붉은 벽돌을 사용해 붉은 건물인 점과 흰 페인트를 발라 하얀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건물의 구조가 비슷했다. 건물과 건물이 틈 없이 연이어 붙어있어 통일성 있는 우아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건축사로 보면 신고전주의 범주 안에 들어가며 비례, 균형과 같은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영국의 신고전주의 양식인 빅토리안 양식 그 자체였다. 긴 시간과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뀌었음에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서두에, 건축물은 그 나라와 그 시대의 단면을 보여 주는 그림이라는 말이 나온다. 왜냐하면 과거나 오늘이나 건축물을 만드는 것은 상당한 돈과 많은 기술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건축물은 굉장히 많은 돈과 노동력이 들어갈 뿐만 아니라, 건축 기술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건축물은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반영되는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중산층의 어떤 생각이 빅토리안 양식 건축물에 담겨 있을까?     


 내가 빅토리안 양식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던 건, 바로 돌출된 창문(bay window) 때문이었다. 보통 창문이 한 면으로 되어있는 데, 3면 창문인 돌출된 창문이 있으니. 그 외관만 보아도 ‘내가 바로, 빅토리안 하우스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실제로 돌출 창은 빅토리안 하우스에서 찾을 수 있는 독특한 특징 중 하나다. 그럼, 19세기 중산층은 왜 돌출 창이 있는 집에서 살았을까?     



 돌출 창이 유행한 이유는 유리 가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판유리는 19세기 초반만 해도 매우 비쌌으며, 이에 따로 붙이는 세금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850년대에는 유리와 벽에 부과하던 세금이 사라지게 된다. 그 이전에는 창의 개수에 따라 세금을 매겼기 때문에 창을 일부러 벽으로 매우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리에 부과한 높은 세금이 사라지자 유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게다가 산업혁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철도를 통해 유리를 운송이 간편해지면서, 수요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판유리 공급도 가능했다. 가렸던 창을 다시 드러내기에 적절한 때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답변만으론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왜 판유리가 중산층의 집에 놓고 싶었을까? 단지 판유리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늘어났기 때문에 돌출 창이 유행했다고 할 수 있을까? 스스로 2% 정도 아쉬운 답이었다. 난 아쉬운 2%를 빅토리안 건물들을 지나서 만날 수 있는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에서 한 내 상상으로 채워나갔다.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은 영국 자연사 박물관 맞은편에 있다. 고딕 성당의 출입문 같고, 마치 바로크 건축의 지붕을 얹어놓은 것 같은 외관은 내부에 유리공예, 은제품, 가구, 보석, 조각품, 도자기, 세라믹, 철제품 등 모든 장르의 미술, 공예품들을 다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 자체를 외관에서부터 보여주는 듯싶었다.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은 역사적으로 중산층의 발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곳이다.      


  1853년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의 모태가 되는 제조업 박물관(he Museum of Manufactures)이 탄생할 수 있었던 계기는 세계 최초의 만국 공산품 박람회(The Exhibition of Works of Industry of All Nation)였다. 1851년 5월 1일 열린 만국박람회는 성공리에 개최되었지만, 그날의 맑은 날씨만큼 영국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지 못했다. 유럽에서 가장 발전된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은 이곳에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을 마음껏 알리고자 했으나, 대부분의 메달은 프랑스 제품이 수상하였고 인도와 중국의 상품이 영국의 상품보다 미적으로 더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영국은 아직 제조업에 있어서 기술적으로나 미적 취향이 부족한 점을 채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교육의 장으로 선택한 곳이 바로 박물관이었다. 

 빅토리아 여왕과 알버트 공 ©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그 결과 "schoolroom for everyone", 모두를 위한 교실이라는 철학 하에 제조업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이때 교육의 대상은 주로 중산층이었다. 헨리 브루엄은 기존의 귀족이 아닌, 중간 계급을 가리켜 “이 나라의 부와 지성, 영광을 대변한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이들의 중요성을 높이 샀다. 이때 영국은 탄탄한 중산층이 국가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짓는 계층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후 수장품이 계속 늘어나자 보다 넓은 전시 공간이 필요해진 켄싱턴 박물관은 신관을 짓는데, 1899년 빅토리아 여왕이 초석을 올리며 알버트 공을 기려 그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딴 이름으로 바꾼다. 


 만국박람회로 인해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이 세워졌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열렸던 건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국박람회는 외벽이 유리로 된 수정궁이었다. 당시 유리와 강철과 콘크리트는 당대 최신 건축 재료였다. 교회나 왕실, 귀족들만 사용하던 유리로 만든 수정궁은 고도의 기술 그 자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물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유럽 인상기에 런던을 가리켜 “전 세계의 교역을 담당하고 있는 이 수정궁 같은 도시”라고 표현했으니, 수정궁이 19세기 유럽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유리는 수요와 공급 외에 당대 달라진 사회와 그것이 지향해야 할 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고, 그 변화의 흐름에 중심에 놓여있던 영국의 중산층이 선호하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일종의 트렌드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유리창을 왜 1면으로 채우지 않고 3면으로 돌출 창을 만들었을까.

이 질문을 던지며 건물을 보다가 떠오른 것이 있었다. 아파트 베란다 확장 공사다. 그렇다면, 아파트의 실내공간을 더 확보하고자 했던 것처럼 내부에서 실내공간이 커 보이는 효과를 얻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닐까. 돌출 창은 전 층 모두 하거나, 1층에만 한 경우가 있다. 돌출 창이 1층의 응접실 공간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실내 공간을 더 넓어 보이게 하는 효과를 위해 한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과거와 달리 중산층 사람들도 귀족들이 사용했던 가구들을 본격적으로 사용했던 시기와 맞물린다. 특히, 기술의 발달로 과거의 아름다운 가구를 하나씩 장인이 만들었던 반면에, 이제는 복제를 통해 보다 많이 생산할 수 있었던 시기가 빅토리아 시대였다. 넓게 보이는 실내에 아름다운 나만의 방식으로 가구를 배치해 '나의 집(My House)'을 꾸민 건 아닐까.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에 가면 당대에 사용했던 가구를 볼 수 있다. 그중에 눈길을 끄는 가구가 있는데 바로 빠뻬 머쉐papier mache다. 물에 종이, 아교, 모래를 불려 걸쭉하게 만든 것을 나무나 금속 틀에 발라 형태를 입힌 가구를 말한다. 새로운 기술을 이용해 독특하고 예쁜 가구를 만들고, 철제가구를 만드는 등 이전보다 중산층 집안 내부 공간에 두는 가구들의 수준이 높아진다. 다양한 가구의 생산은 집안 내부 공간을 어떻게 채우는지에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때부터 도심 내 My House 개념이 생겨 같은 크기의 집이라도 더 그 내부 공간을 더 잘 보일 수 있을지 그 방법을 모색한 결과가 돌출 창이란 생각을 했다. 돌출 창은 단순히 유리의 공급이 많아져서 생긴 주택의 특징이 아니라, 당시 그 주택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달라진 생각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기 딱 100여 년 전 1762년에 러시아의 마지막 여왕이 즉위했다. 독일의 공주로 러시아 황태자와 15살에 결혼해, 왕비가 되었고 스스로 왕이 되었던, 예카테리나 여제다.      



“군주정치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들에게서 천부적인 자유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선을 얻기 위해서 그들의 행동을 교정하는 것이다.”     



  러시아의 계몽을 위해 노력했던 왕이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소장품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데 인색했다. 이미 17세기 중반부터 트라데스칸트 박물관(1656년), 애쉬 몰리 안 박물관(1683년)과 같은 공공박물관이 유럽 대륙 내에 등장하고 있었다. 18세기에 이미 영국박물관(1753년), 루브르 박물관(1793년)과 같이 국민들과 대중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고,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는 계몽주의적 철학 하에 국가나 왕실이 대규모 소장품을 공개하던 시기였다.      


  독일의 공주였던 예카테리나 대제가 이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자신의 소장품은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물건이 자신의 외로움을 해소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764년 독일의 그림 수집상으로부터 225점의 명화를 구매한 것과 기존의 로마노프 왕가의 진귀한 미술품을 보관한 러시아의 겨울 궁전은 16살 로마노프 왕가의 일원이 된 예카테리나가 마주했을 외로움을 해소하는 곳이었다. 타국의 공주로 러시아 왕이 되기까지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던 그녀도 사람인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안타깝게 러시아 왕이 되었을 때 자신의 토로할 수 있는 상대가 그녀 곁에 없었던 것 같다. 대신 그녀는 겨울 궁전에 프랑스어로 은자의 집이라는 뜻의 에르미타주라는 애칭을 붙이고 혼자 겨울 궁전에서 시간을 보냈다. “보물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쥐와 나뿐”이라고 말하며, 모든 사람의 출입을 엄격히 금하기까지 했다고 하니, 그녀가 수집품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에 서서 다시 생각해보았다. 이 박물관의 시작은 알버트 공이 추진했던 만국박람회였다. 역사에 IF는 무의미하지만, 만약 만국박람회가 열리지 않았다면, 혹은 박람회 전시 물품과 왕실 수집품을 전시한 물건을 위한 박물관을 세우는 일에 빅토리아 여왕이 무관심했다면, 지금의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빅토리아 여왕은 스스로 “나는 불쌍하고 무력한 아이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또 힘든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어렸을 때 그 누구도 그녀가 영국의 왕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스스로도. 빅토리아는 조지 4세의 남동생이자 다음 왕 윌리엄 4세의 형이었던 에드워드 켄트 공작의 외동딸이었다. 두 왕의 조카였던 셈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큰아버지인 조지 4세의 사이는 좋지 않아, 아버지가 임종을 맞이했을 때 왕은 찾아가지 않고, “깊은 애도를 전하노라”라는 짧은 전언을 보냈다고 한다. 조지 4세가 자녀를 남기지 못해 그의 동생이었던 윌리엄 4세가 이어 왕이 되었다. 하지만 윌리엄 4세 역시 자녀가 없어 생을 마감했고 왕들의 조카였던 빅토리아가 왕으로 즉위하게 된 것이다. 두 왕 모두 자녀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부터 왕재로 키워지지 않았고, 결국 준비되지 않은 채 왕이 되었다.



  즉위하기 전, 빅토리아는 낡고 누추했던 어느 시골의 붉은 벽돌로 지은 낡은 궁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살았던 그 낡은 붉은 벽돌집이 지금의 켄싱턴 궁전이다. 하지만 켄싱턴 궁전에서 빅토리아 여왕이 태어나, 유년시절 대부분과 왕의 서거 소식을 전해 듣고 버킹엄 궁전으로 옮기기 전까지 머문 곳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사실을 알고 궁전을 등지고 앞뜰에 놓인 어린 여왕의 조각상의 구도가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소녀 시절의 기억이 담긴 곳을 뒤로하고, 영국의 왕으로 즉위하기 직전인 18살 생일날 일기에 쓴 다짐을 이루어 영국의 성군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하늘의 뜻은 그녀가 Pax Britannica, 영국의 군주로 역사에 남을 것을 허락했다. 해가 지지 않는, 찬란하게 빛나는 시기의 왕으로 준비된 사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준비된 왕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선택한 좋은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조언가가 그녀 곁에 많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그녀의 남편 알버트 공이었던 것 같다.



"남몰래 외로움을 삭여야 하는 그 기분을 나도 잘 알아요."     



  영화 《영 빅토리아(The Young Victoria)》에서 작센 코부르크 고타가의 왕자였던 그가 처음 만난 빅토리아와 하루의 시간을 보내고 그녀를 침실로 데려다 주기 위해 계단을 오르며 한 말이다. 단순히 영국의 여왕이 될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꾸민 말이 아니라 빅토리아가 가지고 있었던 공허한 마음을 감싸주는 말로,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이었다. 실제로 알버트 공이 얼마나 따뜻한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빅토리아 여왕이 그를 많이 사랑했다는 건 그녀의 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The Young Victoria, 2009 / 네이버 영화 .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이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만국박람회를 열어야 할 필요성을 정확하게 파악했던 알버트 공의 혜안도 있었지만, 그가 하고자 했던 바를 신뢰하고 추진해준 빅토리아 여왕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왕실이나 국가가 가지고 있는 진귀한 물건을 모두가 볼 수 있게 하는 결단에 합리적인 판단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을 마음의 여유도 꽤 중요하단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여유를 함께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는지 여부도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참고문헌>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도시를 보는 열다섯 가지 인문적 시선),유현준, 을유문화사 (2015)

내가 여왕이다 : 대영제국의 황금기를 만든 빅토리아의 일생, 캐럴리 에릭슨, 역사의 아침 (2011)

러시아 역사 상, 니콜라스 V. 랴자놉스키, 마크 D. 스타인버그 지음, 까치 (2011)

런던 이야기, 미셸 리, 추수밭 (2015)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 홈페이지 https://www.vam.ac.uk/

영국사, 박치향, 까치 (2007)

인류에게 박물관이 왜 필요 했을까?, 한국박물관학회, 민속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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