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다큐 드로잉 6
※ 이 글은 수정·보완되어 2025년 11월25일 출간된《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루아크 펴냄)에 수록되었음.
1.
농촌마을에 살 때 연료는 나무장작이었다. 아버지는 그 재래식 연료를 마련하기 위해 노동력을 만만치 않게 투입해야 했고, 어머니는 불을 지펴 방을 덥히거나 끼니를 챙기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매운 연기에 얼굴을 찡그려야 했다. 그러다가 이웃 소도시로 이사를 한 다음 날, 연료는 하루아침에 연탄으로 바뀌었다. 연탄이 제공했던 편리함과 따뜻함은 실로 놀라웠다. 말 한마디로 주문만 하면 언제든 창고까지 배달되었고 약간의 수고만 치르면 훨훨 타올라 방을 데우고 음식을 익혔다. 경제적 부담이 어느 정도였는지 헤아리진 못했으나, 연탄은 부모님을 고된 노동력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처럼 보였다. 호롱불에서 백열등으로의 교체와 함께 나무장작에서 연탄으로의 교체는, 50여 년 전 내가 처음으로 ‘근대’라는 새로운 문명을 만난 사건이었다.
2.
“여보!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놓아드려야겠어요.”라는 카피로 유명한 보일러 광고가 있다. 1990년대 초 방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광고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다른 광고나 예능프로그램 같은 데서 가끔 패러디될 정도로 아직도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칼바람이 부는 한겨울, 도시에 사는 아들 부부가 연탄이라는 재래식 난방 방식으로 불편하게 사는 농촌의 노부모를 떠올리며, 최신식 보일러를 설치해 주겠다는 뜻을 전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고 그 자체로도 성공했지만, 보일러 시장을 전국으로 확산해서 선점하려는 마케팅 전략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광고로도 평가된다.
무릇 수천 년 동안 인류의 몸을 덥히고 음식을 익혀주었던 나무장작이 연탄으로 교체된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 대략 조국 근대화의 구호가 울려 퍼졌던 1960년대 후반부터일 듯하다. 하지만 연탄은 20년 정도 전성기를 누리다가 1980년대 후반 무렵부터 기름이나 가스보일러에 가정용 연료의 안방자리를 내주었다. 앞의 보일러 광고는 그 교체기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물론 연탄은 지금도 여전히 어디선가 애용되고 있다.
3.
문제는 연탄재였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연탄재 처리를 위해 ‘매립’ 외엔 별다른 활용책이 없다. 매립지 용량이 찰수록 후속 대책이 없어 관련 대책이 요구된다. (중략) 연탄재는 영양분이 없어 땅에 묻어도 골치였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개발 공사·슬러지 처리에도 연탄재를 대체할 새 자원들이 쓰였다. 그때부터 연탄재는 ‘매립’ 외엔 별 쓰임새가 없어졌다.” <연탄재 수도권만 5천600t … 태울 수도 없는 ‘골칫거리’>라는 제하의 기사다(경기일보 2024년 12월 26일 자). 이처럼 연탄은 연탄재라는 폐기물이 되면서, 필요와 편리의 아이콘에서 혐오와 기피의 대상으로 변했다. 골목이나 크고 작은 길 주변마다 쌓여서, 미관과 위생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4.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시구를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에 나오는 절창이다. 연탄의 의미도 새롭게 해석되었다. <연탄 한 장>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중략)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이 시구들은 유명한 밈이 되어 다양한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인용되고 소개되고 거론되었다.
이철환의 <연탄길>은 또 이렇게 말한다. “나를 전부라도 태워 님의 시린 손 녹여줄 따스한 사랑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움으로 충혈된 눈 파랗게 비비며, 님의 추운 겨울을 지켜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함박눈 펑펑 내리는 날, 님께서 걸어가실 가파른 길 위에 누워, 눈보다 더 하얀 사랑이 되고 싶었습니다.” ‘우리 이웃들의 가슴 따뜻한 리얼 스토리’를 담은 이 책은 3편까지 발행되며 400만 명이 넘는 독자들의 가슴을 적셨다.
5
생태·환경적 측면에서는 천덕꾸러기였던 연탄재, 그리고 다만 연료로서의 사용가치로만 주목받았던 연탄은 이로써 문화적 측면에서는 ‘희생’과 ‘사랑’이라는 의미를 획득하며 거의 성자의 반열에 오른 셈이다. 하지만 문득 궁금해진다. 내로남불, 남 탓하기, 정적 죽이기... 나열하기 민망할 정도로 세상은 왜 점점 더 각박해지고 있을까? 안도현의 시구를 가슴에 새기고 이철환이 전하는 이야기에 눈물을 흘린 그 많은 ‘뜨거운 사람들’과 ‘하얀 사랑들’은 다 어디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