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다큐 드로잉 5
※ 이 글은 수정·보완되어 2025년 11월25일 출간된《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루아크 펴냄)에 수록되었음.
1.
많은 사람이 3.1 운동,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6년 촛불항쟁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여긴다. “우리 국민은 불의가 있을 때마다 분연히 일어나...” 하는 말을 누구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것이다. 헌법 전문에도 “3ㆍ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 문장에 5.18 민주화운동 정신과 6월 민주항쟁 정신을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은 힘을 얻고 있다. 다음 개헌 시에는 이번 12.3 내란사태에 항거한 ‘응원봉 항쟁’을 넣자는 주장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역사의 고비고비를 그렇게 민중항쟁으로 넘어왔다.
2.
하지만 나는 우리의 그런 근현대사를 생각하면 자랑스럽기 전에 먼저 서글퍼진다. 민중항쟁이 없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틀림없이 무척 초라해졌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과연 자랑스러운 일일까? 문단속을 잘 못해서 집에 강도가 들었고 치안시스템이 부실해서 어쩔 수 없이 온 가족이 합심해서 피를 흘려가며 그 강도를 잡았다면, 자랑스럽다고 우쭐해하기 전에 허탈하거나 서글픈 감정이 들어야 자연스럽다. 경찰이 뒤늦게 나타나 ‘자랑스러운 시민상’을 주겠다면 얼떨결에 받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3.
내가 보기에 우리 역사가 꼭 그렇다. 어리석거나 사악한 위정자의 폭정을 민초들이 나서서 엄청난 희생을 치러 가며 바로잡았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사리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수행한 다음엔 그 성과 위에서 다음 역사를 이어가면 좋은데, 이전 성과는 온데간데없이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해결될 장벽이 도돌이표처럼 언제나 다시 또 가로막았고,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어 왔다. 영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그 점을 궁금히 여기며 이렇게 말한다. “조선이란 나라는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이 지배해 온 나라지만 저 나라 백성들이 제일 골칫거리야. 받은 것도 없으면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단 말이지.” 내 귀에는 우리 역사에 대한 조롱으로 들린다. 그래서 더 서글프다.
4.
시민혁명의 주역인 부르주아와 그들을 대변하는 사상가들은 민주주의를 두려워했다. 그 이유는 ‘다수의 폭정’ 때문이었다고 한다. 무산자 혹은 인민들이 나라의 주인이 되면 자신들의 재산권을 부정할 수 있다는 공포가 그들을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그들은 민주주의의 조류를 막기 어렵다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민주주의의 조류에 한편으로는 저항하면서 한편으로는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유재산권의 유지라는 최후의 보루를 지켜내는 선에서 타협을 시도했다. 민주라는 말 앞에 그럴듯한 수식어를 붙여 민주주의를 거세하고 길들이기로 했다. ‘자유 민주’, ‘헌정 민주’, ‘대의 민주’, ‘절차적 민주’ 등이 바로 그 타협의 산물이다.
5.
전 예일대 정치학과 왕사오광(王紹光) 교수는 『민주사강(民主四講)』에서, “그 모든 수식어는 민주주의를 제한하는 것이다”라고 단언하면서, “유산자와 그들의 대변자가 민주주의를 끌어안기 시작할 때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해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한 모든 이야기는 수식어가 딸린 민주주의였고, 수식어가 민주주의라는 말보다 더 중요했다.”라고 설명한다. 왕 교수는 가령 ‘자유 민주’는 ‘자유’를 ‘민주’ 위에 올려놓은 것으로, 그것은 민주를 바로 새장 속에 가두는 것과 같다며, ‘자유 민주’를 ‘새장 민주주의’라고 깎아내린다.
6.
토마스 페인, 제러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등이 제시한 타협책은 ‘대의’ 민주제였다고 한다. 하지만 왕 교수에 따르면, 대의제 민주주의는 더 이상 참여가 핵심인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한다. 인민이 직접적이고 광범위하게 국가의 관리에 참여한다는 이념은 희미하게 잊히고, 참여는 일종의 간헐적인 행위 즉 4년 혹은 5년마다 한 번씩 투표하는 행위로 바뀌었으며, 그 이외의 시간에는 묵묵히 순종하는 사람으로 지낸다는 이유에서다. 왕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대의 민주주의를 간접 민주주의라고 부르면서 직접민주주의와 그저 유형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강조한다. 민주주의가 일단 ‘간접’적이 되고 민중의 참여를 배척하는 순간, 민주정체의 실질을 잃어버리고 다른 하나의 정치체제로 바뀌어 비민주적일 뿐 아니라 반민주적인 것으로 전락하게 된다고 단언한다.
7.
우리의 근현대사는 그렇게 부실하기 짝이 없는 사이비민주주의(대의민주주의)의 폐해를 제대로 된 민주주의(직접민주주의)가 바로잡아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속되게 말하면 대의민주주의가 싸질러놓은 똥을 직접민주주의가 치워온 역사였다. 이번에도 그 더럽고 냄새나는 배설물을 민초들이 나서서 치워야 한다. 우리는 각자의 자원과 노력을 동원해 가며, 나라를 잘 이끌어달라고 권력과 자원을 몰아준 자들이 저지른 패악질의 뒤처리를 언제까지 맡아야 하나.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그림에 나타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처럼 말이다. 그게 왜 꼭 자랑스러운 일인가. 서글픈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