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다큐 드로잉 7
※ 이 글은 수정·보완되어 2025년 11월25일 출간된《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루아크 펴냄)에 수록되었음.
1.
장면 1. 우리 집에는 전화가 없었지만 우리 가족이 ‘안집’이라고 불렀던 그 적산가옥에는 전화가 있었다. 우리 가족을 포함한 세입자들은 그 전화를 눈치껏 이용했는데, 특히 당시 열애 중이던 큰 누나가 한때 그 전화의 주된 이용자였다. “00(내 이름) 누나, 전화 왔어” 대개 안집의 아주머니가 우리 집 쪽으로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치면 누나는 반가움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얼굴로 달려가서 짧은 통화를 마치고는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둘러 외출을 준비하곤 했다.
장면 2. 재수를 하고 원래 희망하는 대학보다 한 단계 낮춰 지망했는데도 본고사를 망쳤다. 삼수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 2차 대학을 알아보고 있던 차에 합격자 발표 일을 맞았다. 당시엔 방송국에서 전화로 합격자를 알려주었다. 돌아올 답이 불 보듯 뻔해 미적거리다가 해가 중천에 떠오른 다음에야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지망 학과와 수험번호를 말씀해주세요” “00 학과 000번요” “000 씨 맞아요?” “네...” “축하합니다. 합격입니다.” 나는 너무 놀라서 고맙다는 인사도 못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전화가 내 삶 속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두 장면이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을 틈이 없는 요즘처럼은 아니더라도, 근대 이후 전화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수시로 관여해 왔다.
2.
기록상 우리나라 최초의 전화개통은 1896년 10월 2일 궁중(덕수궁)과 인천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처음엔 텔레폰이란 말을 발음으로 옮겨서 덕률풍(德律風)이라고도 했고 뜻으로 풀어서 전어기(傳語機)라고도 했다. 전화라는 이름은 나중에 붙여졌다. 당시 일반인들은 “하늘의 전기바람은 비구름을 말리고 땅의 덕률풍은 땅 위의 물을 말린다”며 전기와 전화를 싸잡아 경원시했을 만큼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었다.
당시 전화를 거는 예절은 대단히 까다로웠다고 한다. 수화기를 들기 전에, 상투를 단정히 고쳐 세우고 두 손을 맞잡아 머리 위에 쳐드는 읍(揖)을 하고서 손잡이를 돌렸다. 상대방이 나오면 자신의 직함-품계-본관-성명을 순서대로 말하고 상대부서의 판서-참판-참의의 안부를 물은 다음 전화받는 당사자의 부모들 안부까지 묻고서 안건을 말했다고 한다. 만약 임금이 사는 궁내부에서 전화가 오면 절차는 더 복잡해진다. 편한 복장으로 있었더라도 관복과 관모와 관대로 정장을 하고 전화를 향해 큰절을 네 번 하고 무릎을 꿇고 나서, 엎드려서 수화기를 대했다고 한다. 이때 전화기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의 분신인 셈이다.
3.
1960년대에는 전화 값이 집값의 약 3분의 1이나 되었을 만큼 고가품이었다. <조선일보> 1970년 6월 28일에 ‘전화를 사치품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그런데 이 글은 오히려 당시 전화가 얼마나 귀한 물건인지를 방증하는 자료가 된다. “(...) 그러나 선진국의 보유대수에 비하면 우리의 그것은 아직 요원한 상태에 있다. 미국의 인구대비 50퍼센트는 말할 필요가 없지만 영국(22퍼센트), 독일(18퍼센트), 프랑스(14퍼센트)에 비해 봐도 우리의 전화보유율(서울 4.5퍼센트, 전국 1.8퍼센트)은 까마득한 것이다.” 전화기 보유대수가 미국인은 100명 중 50명이라면, 한국인은 100명 중 두 명도 안 되었으니 두 말할 것도 없이 사치품이었다.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1 가구 1 전화시대에 접어든 것은 전국 전화시설이 1,000만 회선을 돌파한 1987년 9월 30일 이후였다. 6월 항쟁으로 형식적으로나마 문민시대가 열린 시점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전화와 민주주의의의 묘한 동질감이 느껴진다.
4.
“오늘처럼 따사로운 아침엔/ 너의 목소리 들려오는 전화기에 대고/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얘기하고 싶어” 가수 이상은은 1989년 발표된 <사랑해, 사랑해>라는 노래에서 전화가 이렇게 감미롭게 사랑을 속삭이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큰 성! 큰 성, 생각나? 빨간 다리… 빨간색 철교. 우리 어렸을 때 빨간 다리 밑으로 물고기 잡으러 많이 다녔었잖아. 내가 저 언젠가 초록색 나는 물고기 잡는다고 그러다가 쓰레빠 잃어버려 가지구, 큰 성이랑 형들이랑은 하루 종일 놀지도 못하고 쓰레빠 찾으러 다녔었잖아. (...) (울먹이며) 큰 성, 그때 생각나? 그때 생각나?” 1997년 개봉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초록물고기>에서 주인공 막둥이(한석규 분)는 죽기 직전에 전화기에 대고 이렇게 자신의 잃어버린 순수한 꿈을 슬프게 전한다.
전화가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지 수탈과 착취의 도구이기도 했고,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부와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화시대의 전화는 이렇듯 사랑과 공감의 메신저로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5.
1990년대 후반부터 휴대전화가 대중화되고 스마트폰이 일상이 된 지금, 많은 사람들은 거의 24시간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않고 살아간다. 강준만 교수는 『전화의 역사』에서 휴대전화가 신흥종교가 되었다면서, 그 이유로 ①고독으로부터의 탈출 욕구, ②스트레스로부터의 탈출 욕구, ③공사(公私) 구분 없는 ‘뫼비우스 효과’, ④인맥사회에서의 생존술, ⑤초강력 1극 구조 사회에 대한 저항, ⑥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구별짓기 문화, ⑦휴대전화 산업의 정치·경제학 등 일곱 가지를 들었다. 이중 ⑤와 ⑦에 대해서는 약간의 보충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초강력 1극 체제’란 중심이 존재하고 상하 위계가 분명한 사회 구조를 뜻하는데, 전화는 무수한 1대 1의 관계를 만들어주는 평등한 미디어로 선호되고 있다고 강 교수는 설명한다. 또한 휴대전화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수출품목으로 이를테면 강력한 ‘국뽕’이 작용했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종교는 맹신하면 독이 되지만 신실한 믿음으로 다가가면 삶에 희망을 준다. 휴대전화가 어느 쪽일지는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다.
6.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김용택 시인의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중 한 대목이다. 물이 부서지는 소리까지 들렸다니 그 전화는 필시 휴대전화였을 것이다. 누군가 시인에게 달이 떴다고 전화를 한 이유는 고독이나 스트레스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도, 공사를 구분 못한 까닭도, 인맥을 쌓으려고 수를 쓰기 위해서도, 시인의 인정을 바라서도, 국뽕이 작동해서도 아니었을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이상은이나 막둥이(한석규)처럼 감정의 고양이나 과잉도 없이, 달빛처럼 고요하고 그윽하게, 순수한 꿈과 사랑을 전하고 나누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휴대전화가 신흥종교라 치더라도 그렇게 얼마든지 긍정적인 의미의 신흥종교가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