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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뜰날>은 유신정권의 선전가요였을까?

트로트 가수 송대관 님을 추모하며

by 까칠한 서생

※ 이 글은 수정·보완되어 2025년 11월25일 출간된《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루아크 펴냄)에 수록되었음.


송대관은 오랜 가수 활동 동안 수많은 곡을 발표했고 적지 않은 히트곡을 남겼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언론은 하나같이 그를 ‘<해뜰날>의 가수’로 소개하고 있다. 이는 우선 반세기 전에 나온 이 노래가 그의 출세곡이자 불후의 히트곡이기 때문이겠지만,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과 상징성이 워낙 컸던 탓이기도 할 것이다.


<해뜰날>은 1975년, 그가 29세에 발표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노래다. 표면적으로 이 곡은 힘든 시기를 지나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온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단순한 희망가 이상의 숨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함의를 파악하려면 당시 한국 사회가 박정희 유신 정권의 강력한 통제 아래 있었고 대중문화도 바로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0월 유신 이후 한국의 대중문화는 정권의 독점적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긴급조치가 남발되던 1970년대 중반 이후 사회 분위기가 극도로 경직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는 가운데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날로 확대되던 대중문화에 대한 통제 역시 더욱 강화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 중반에는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중문화에 대한 정권의 강력한 통제가 실시되었다. 이른바 ‘통기타 가수’와 일련의 연예인들에 대한 탄압이 그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우리 역사넷(https://contents.history.go.kr/front)’의 ‘한국문화사’ 중 20권 4장 ‘소비 대중문화의 형성과 광고’에서 인용)


따지고 보면 1970년대 전체가 대중문화의 암흑기라고 볼 수 있겠지만, 특히 1975년은 우리나라 대중문화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해로 기록될 것이다. 당시 대학가에서 인기를 얻고 있던 신중현의 <거짓말이야>, 이장희의 <그건 너>, 김민기의 <아침이슬>, 송창식의 <왜 불러> 등 현실을 비판하거나 풍자하였다고 인식되던 88곡이 금지곡으로 선정된 해가 바로 1975년이었다. 한 대중문화 평론가는 1975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한겨울 <동아일보>의 자유언론투쟁에 대한 탄압에서 시작해 유신헌법 찬반투표, 긴급조치 9호, 총학생회 해체 등으로 숨 가쁘게 치달아온 1975년은 12월에 대마초 사건이라는 요란한 마약류 사건으로 끝이 났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우르르 무너져가는 이 기막힌 흐름 속에 화려하게 배치된 마약류 사건이라니! 그 타격의 방향이나 강도가 정교하게 계산된 ‘쓰리쿠션’을 보는 듯하다.” (이영미, 『동백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중에서)


절묘하게도, 송대관과 <해뜰날>은 바로 그 12월에 등장했다.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이 금지된 가수와 금지곡들과 마치 바통 터치라도 하듯이 말이다.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뛰고 뛰고 뛰는 몸이라 괴로웁지만/ 힘겨운 나의 인생 구름 걷히고/ 산뜻하게 맑은 날 돌아온단다.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해뜰날>의 가사에는 이농현상에 따른 도시집중, 도시빈민의 고된 삶 그리고 출세와 성공에 대한 열망 등 우리나라의 압축적 근대사가 왜곡된 형태로나마 어른거린다.


1976년 말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가수왕에 선정된 후 인사하는 송대관


거듭 말하지만 이 가사에는 현실에 대한 긍정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표면적 의미를 넘어, 체제에 순치된 ‘유신형 한국인’을 생산하려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계몽적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유신 정권 내내 국민들에게 주입되었던 “하면 된다.”라가부장적 군사 문화가 깊이 새겨져 있다는 얘기다.


이렇게 보면 <해뜰날>의 대히트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사회문화적 조건, 입틀막하는 정권의 요구, 그리고 고난극복을 주문하는 가사, 이렇게 삼박자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출시 직후 박정희 대통령이 우연히 라디오에서 이 노래를 듣고는 ‘그래 노래는 이렇게 신이 나야지!’하며 좋아했다는 카더라가 돌았다. 또 실제로 그 시절 군부대에서는 마치 군가처럼 하루 종일 '해 뜰 날'만 부르도록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나무위키(https://namu.wiki/w), ‘해뜰날’ 참조)


위 진술처럼 박정희 정권이 이 노래를 나중에 발견하고 적극 활용했을 수도 있고, 아예 처음부터 문화공보부(문공부)를 통해 기획되었다는 의심도 배제할 수는 없다. 어느 쪽이든, 정권이 <해뜰날>을 선전 도구로 활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당시 정권이 방송국에 직접 압력을 가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송출하도록 강요했을 수도 있고, 체제에 순치된 방송국 측에서 자발적으로 협조했을지도 모른다. 이 노래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유신정권의 선전가요 역할을 하며 대중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는 1976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가수왕과 최고 인기 가요상 수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 됐든, 송대관은 송대관이다. 그는 <해뜰날> 이후에도 <네 박자>, <차표 한 장> 등의 히트곡을 연이어 발표하며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가수로 자리잡았다. 그의 음악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가졌지만, ‘트로트 4대 천왕’으로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위로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시 한번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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