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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 뒤에 어른거리는 전체주의의 망령들

이야기가 있는 다큐 드로잉 9

by 까칠한 서생

※ 이 글은 수정·보완되어 2025년 11월25일 출간된《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루아크 펴냄)에 수록되었음.


1.

내가 기억하기로 어릴 적 부잣집을 판별하는 유력한 기준은 텔레비전의 소유 여부였다. 주택과 함께 전화, 냉장고, 전축도 부의 중요한 증거였지만 텔레비전이 있으면 대개 나머지는 무슨 패키지처럼 따라왔다. 그런데 부잣집을 판별하는 나만의 기준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의 소유 여부였다. 같은 반 친구 가운데 바로 그 기준에 부합하는 ‘부잣집 아이’가 딱 한 명 있었다. 한때 나는 그 친구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전집 속 책들을 빌려보았다. <보물섬>, <왕자와 거지>, <사랑의 집>, <알프스의 소녀>는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도 또렷이 남아있는 제목들이다.


이들과 함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되는 단어는 계몽사의 ‘계몽’이었다. 한자로 ‘啓蒙’이라 쓰고 영어로는 ‘Enlightenment’이라 표현하는 그 단어, 무지몽매함을 깨우친다거나 미개한 어둠 속에 이성과 과학적 합리성으로 밝은 빛을 비춘다는 그 거창한 뜻, 그리고 1789년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의 기반이 되었을 만큼 근대 세계를 연 핵심 사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그때 어찌 알았겠는가. 다만 ‘계’에서는 당시 고급 반찬의 대명사인 ‘계란 후라이’를 연상했고, ‘몽’에서는 희망 같은 것이 구름처럼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듯한 기분을 떠올렸다. 그래서 늘 재밌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상한 할머니나 착한 삼촌을 생각하며 ‘느낌적인 느낌’ 차원에서 아름다운 뜻으로만 받아들였다.


2.

불법적인 계엄령을 ‘계몽령’이라 부르고 “나는 계몽되었다”라며 내란 수괴를 옹호한 어느 변호인의 말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생뚱맞고 억지스러운 조어(造語)이자 얼토당토않은 항변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비판이 계몽이라는 멋진 말을 왜 나쁜 짓과 그 짓을 벌인 주범을 옹호하는 데 사용하느냐는 의미라면, 잠시 생각해 볼 지점이 있다. 계몽은 결코 역사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만을 끼친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인물이 바로 독일 출신 유태인 사상가인 아도르노(Adorno)와 호르크하이머(Horkheimer)다. 그들의 생각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집필된 다음 종전 직후에 출판된 『계몽의 변증법』에 잘 담겨 있다.


1965년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나 악수하는 호르크하이머(왼쪽)와 아도르노(오른쪽)


나는 『우리를 배반한 근대』에서 신화와 계몽을 대비하며 그들의 논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1) 신화의 세계가 교환과 측정이 불가능한 질(質)의 세계라면 계몽의 세계는 교환과 측정이 가능한 양(量)의 세계이다. (2) 계몽화는 혼란스러운 신화의 세계에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이며, 계몽의 전개 과정은 계산 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들어맞지 않는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는 과정이다. (3) 계몽의 세계는 인간이 자연에 부속된 존재인 신화 세계와는 반대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세계이다.


계몽과 관련된 몇 가지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그 개념을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먼저, 합리성/합리주의를 영어로 ‘rationality/rationalism’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어원은 비율이라는 뜻의 라틴어 ‘ratio’이다. 어떤 기준을 정해놓고 그 비율을 따지는 일, 즉 계산 가능성이나 측정 가능성이 합리성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측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자[尺]를 영어로 ‘ruler’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지배자’를 뜻하기도 한다. 또한 질서를 영어로 ‘order’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명령’을 뜻하기도 한다. 질서를 부여하고 수치로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선 주체/지배자의 명령이 필요하다는 계몽의 원리가 그 단어들 속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3.

18, 19세기를 지나 20세기에도 계몽의 정신은 이성과 과학적 합리성을 통해 진보와 행복을 가져다주어야 옳은데, 인류는 왜 나치즘, 파시즘, 스탈린주의 등 전체주의 체제와 두 차례의 참혹한 세계대전, 그리고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야만의 길로 접어들었을까? 이것이 바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지닌 최초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원인을 계몽 그 자체에서 찾았다. 즉 계몽이 실패해서가 아니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계몽의 원리 속에 야만의 원리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임을 꿰뚫어 보았다. 야만은 신화적 가치에 속하는 것으로, 그 핵심 원리는 가부장적인 억압과 지배이다. 따라서 계몽의 원리 속에 야만의 원리가 스며들어 있다는 것은, 억압과 지배가 야만의 원리이면서 동시에 계몽의 원리라는 말이다.


그들의 생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전근대적인 신화의 세계와 근대를 열었다는 계몽의 세계는 똑같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계몽과 신화는 방향만 바뀌었을 뿐 지배와 억압의 관계가 존재하는 야만의 정신이라는 점에서 도긴개긴이라는 얘기다. 이렇게 보면 그 변호인의 의도나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의도와는 달리, 12.3 계엄령을 ‘계몽령’이라 부르고 스스로 “계몽되었다”라고 말한 것은 어쩌면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다. 12.3 계엄령이야말로 지배와 억압의 명령이었고 그 변호인은 그 명령에 납작 엎드려 복종했을 테니 말이다.


4.

우리나라에서 ‘계몽’은 농촌계몽 운동을 통해 소개되었다. 동아일보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문맹 퇴치를 중심으로 한 농촌계몽 운동을 펼쳤는데, 1회부터 3회까지는 ‘브나로드 운동’으로 부르다가 4회 때는 ‘계몽운동’이라고 하였다. ‘브나로드(v narod)’는 러시아 말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며, 심훈의 『상록수』는 바로 이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1932년 동아일보에 실린 브나로드 운동 선전 포스터


농촌 계몽운동은 해방 후에도 관 주도로 이어졌는데, 해방 직후에는 미군정에 의해 문맹퇴치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림에는 1946년 여름 12세 이상 50세 미만의 남녀문맹자를 대상으로 개설된 성인학교에서 한글을 배우는 주민들의 진지한 표정이 담겨있다. 1970년대에는 ‘새마을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유신정권에 의해 소득증대운동 등으로 확장되어 정권홍보용으로 대대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마을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울려 퍼진 ‘새마을 운동’ 노래를 많은 사람이 기억할 것이다. ‘새마을 운동’ 노래 가사는 계몽의 세계를 엿보게 해주는 매우 흥미로운 텍스트다. 이 노래의 1절과 2절 가사에는 앞에서 말한 계몽의 원리(지배와 억압, 계산 가능성/측정 가능성/유용성)가 오롯이 담겨 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1절)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2절)


1절에서는 새벽종을 울리는 주체가 일찍 일어나 가꾸어야 할 대상들을 통제하는 상황이 펼쳐져있다. 주체가 객체를 지배/통제/억압하는 태도는 바로 계몽의 세계에 스며있는 원리다. 2절에서는 가난의 상징인 초가집과 좁고 제멋대로인 마을길을 넓히고 정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혼란스러운 세계에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과 계산 가능성 및 유용성의 척도에 들어맞지 않는 것을 제거하는 과정이 모두 담겨 있다. 작사가로 알려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과연 철저한 계몽주의자일 수밖에 없었다. 일제하 사범학교와 사관학교에서 받은 제국주의 교육이야말로 지배와 억압, 계산 가능성과 측정 가능성, 그리고 유용성의 가치를 추구했을 테니까.




5.

계몽이라는 말속에는 칸트와 볼테르 그리고 루소 같은 18세기 사상가들의 근엄한 모습도 숨어 있지만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히로히토, 그리고 스탈린과 박정희 같은 전체주의자들의 망령도 어른거린다. 계몽의 가치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 시점에서 계몽을 주장하는 태도는 분명히 시대착오적이다. 간절히 바라건대, 계몽이라는 단어가 누가 누구에게 뭔가를 일방적으로 강제하는 지배와 억압의 의미로 더는 소환되지 않으면 좋겠다. 다만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처럼 자상한 할머니나 착한 삼촌이 들려주는 재밌고 감동적인 이야기와 함께 언제나 아름다운 기억으로만 남아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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