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다큐 드로잉 10
※ 이 글은 수정·보완되어 2025년 11월25일 출간된《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루아크 펴냄)에 수록되었음.
1.
몇 해 전 초등학교 졸업 40주년 행사에 참석했었다. 대부분 그 초등학교가 있는 지방 소도시에서 자리 잡고 사는 동창들 틈에서, 서울에서 살다 내려간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행사 내내 뻘쭘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던 차에 졸업 후 처음 보는 한 친구가 다가와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자신은 원래 공부를 잘했는데 3학년 때 아버지가 장사하다가 말아먹는 바람에 집안일을 돕느라 공부를 하지 못해서 성적이 나빴다는 내용이었다. 펼쳐놓고 회포를 풀 수 있는 공통의 경험들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 왜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할까. 여러 정황으로 짐작컨대, 제대로 공부했으면 나보다 훨씬 잘했을 거라는 점을 그는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환갑이 다 돼 가는 나이에도 성적이라는 프레임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가 여전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무척 우울했다.
2.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정치적인 문제를 거론할 때 즐겨 인용되는 소설이다. 1950년대 말 지방 소도시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민주주의와 권력과 자유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주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대개, 한 절대 권력자의 처참한 몰락이나 추종자들의 비겁한 행태를 말할 때 한 편의 우화처럼 비유적으로 소환된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 엄석대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핵심 요인이 바로 우수한 성적이었다는 사실을 놓치기 쉽다.
그는 시험을 볼 때 과목별로 공부 잘하는 급우에게 시험지를 자신의 이름으로 제출하도록 미리 손을 써놓았다. 그는 이런 식의 부정을 통해 항상 전 과목에서 거의 만점을 받고 줄곧 1등을 차지했다. 1등이라는 타이틀로 급장이 되었으며, 급장이라는 자격으로 담임교사의 위임과 묵인 아래 교실 안팎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새로 부임한 담임교사에 의해 그 부정한 짓이 밝혀지면서 엄석대는 학교를 떠난다. 요컨대 권력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요인은 부동의 1등이라는 빼어난 성적이었다. 1등이 유지되는 동안엔 그의 권력도 유지되었고, 1등이 거짓으로 확인되는 순간 그의 권력은 처참하게 무너진 것이다. 시험성적과 권력이 그만큼 강하게 밀착되었음을 이 소설은 말해준다.
3.
1949년의 토지개혁과 1950년부터 3년간 벌어진 한국전쟁으로 대한민국은 기득권과 특권이 없는 사회가 될 수 있었다. 그 이후 대략 1980년대 초반까지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평등사회가 어느 정도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족도 귀족도 대지주도 사라진 무주공산에서, 시험성적은 새로운 특권을 차지하게 해주는 새로운 표준 즉 당대의 뉴노멀(new normal)이었다. 많은 사람은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향하는 대신,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서 새로운 특권층이 되려고 했다. 치열한 경쟁을 거쳐 우수한 시험 성적으로 명문 중고등학교를 거쳐 명문대로 가는 길을 추구했고, 그중 일부는 가장 어려운 시험인 고등고시에 합격하는 길을 선택했다. (여기서 고등고시는 행정고시, 사법고시, 외무고시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4.
한국인들에게 고등고시는 과거급제의 후신이었다. 과거급제는 이도령이 탐관오리 변학도의 부당한 형벌로 갇혀있던 춘향이를 구출하고 재회할 수 있게 만든 힘이었다. 전근대적 출세와 권력 획득의 상징인 과거급제가 근현대사에도 똑같은 의미로 작동하고 있다는 건 대한민국이 여전히 전근대적 사고와 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닐까.
한국영화 최초로 베를린영화제 본상(심사위원 특별 은곰상)을 받은 영화 『마부』(1961년)와 극장 관객들이 영화 상영을 멈추게 하고 복도에 나와 텔레비전으로 보았다는 드라마 『여로』(1971년)에서도 아들의 고등고시 합격은 그 이전의 고난과 갈등을 일거에 해소하는,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였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란 그리스 연극에서 사용된 무대 기법의 하나로,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하여 극의 긴박한 국면을 타개하고 결말로 이끌어가는 기법을 말한다.
5. 그림에는 1967년 7월, 어느 초등학교(당시 초등학교)에서 ‘일제고사’를 치르는 학생들이 나타나있다. 일제고사(一齊考査)란 전국의 학교 또는 특정 지역 내의 모든 학교에서 모든 학생들이 동시에(일제히) 치르는 형태의 시험을 뜻한다. 일제고사라는 공식 명칭의 시험은 1998년에 폐지되었지만, 2008년부터 시행되는 전국 단위의 각종 진단평가와 학업성취도평가를 지금도 일제고사라고 칭한다고 한다.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에 그림처럼 책가방을 책상 가운데 낑낑대며 올려놓던 기억이 생생하다. 책가방은 책과 공책 등 학용품을 넣고 다니던 학습의 도구였을 뿐만 아니라, 학생 상호 간의 부정행위를 막고 경쟁을 지켜주는 감시의 도구이기도 했던 것이다. 함께 뛰놀던 짝도 책상 위에 가방을 세우는 순간 경쟁 상대나 감시 대상이 되어버리는 그 아이러니한 상황이 지난 세월 우리 교육의 질곡과 한계를 잘 말해준다.
6.
인문학자 김누리는 『경쟁교육은 야만이다』에서, “우리 아이들의 세상에는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신념화한 결과, 다시 말해 시험의 정답을 물신화함으로써 깊은 사유의 공간을 결여한 무사유의 인간, 지배 이데올로기를 무비판적으로 내면화한 노예적 인간으로 길러진다.”라고 말한다. 또한 한국인은 경쟁이데올로기, 능력주의이데올로기, 공정이데올로기라는 3중의 감옥에 갇힌 수인이라고 진단하면서, “경쟁교육은 한국인을 잠재적 파시스트로 만들었고, 능력주의는 한국을 헬조선으로 전락시켰으며, 공정주의는 한국사회를 불평등과 차별의 사회로 고착시켰다.”라고 강조한다.
사회학자 오찬호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 우리 사회가 대학을 서열화한 학력위계주의 사회임을 지적하면서, “모두가 누군가를 멸시하고 누군가에게 멸시받는다. 그래서 ‘보란 듯이 갚아주겠다’는 자기 계발에 몰두한다. 그러나 이건 늘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순환고리에 갇힌다. (중략) 이것으로 악전고투의 현실을 탈출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이십 대의 자기 긍정은 결국 ‘덫’이요 ‘늪’ 일뿐이다.”라고 단정한다.
7.
40여 년 전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옆 짝과 나를 구분하는 순간 전쟁터가 되어버린 교실에서, 나는 승자의 오만함과 패자의 열등감을 동시에 내면화하지 않았을까? 그 결과 나보다 더 공부 잘했고 더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 앞에서는 패자가 되어 작아졌고, 나보다 공부 못하고 더 나쁜 대학을 나온 사람 앞에서는 승자가 되어 오만해졌던 게 아닐까?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성적과 경쟁이라는 교육의 틀 속에서 자라는 동안, 우열을 나누고 우월한 존재가 열등한 존재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를 내면화해 왔다. 그런데 그런 사고방식이 바로 파시즘이나 전체주의와 통한다는 사실을 이제는 깨달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어느 시대착오적 파시스트 또는 전체주의자는 바로 그런 인식이 극단에 이르렀을 때 나온 결과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