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다큐드로잉 12
※ 이 글은 수정·보완되어 2025년 11월25일 출간된《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루아크 펴냄)에 수록되었음.
*2024년 7월 21일 서거한 위대한 아티스트 김민기 님을 추모하며
1.
열 살 무렵 내가 좋아하는 가수는 김정구와 이미자였다. 김정구를 좋아하는 아버지와 이미자를 좋아하는 어머니의 취향이 고스란히 나의 취향이 되었던 탓이다. 부모와 자식이 똑같은 대중가수를 좋아했다는 게 잘 믿기지 않겠지만 그건 사실이다. 이 사정을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 내가 살던 소도시의 지정학적 위치와 통신상의 문제를 알아야 한다.
1970년대 중반까지, 태백산맥이라는 높은 장벽에 가로막힌 난시청지역의 소도시에서 접할 수 있던 매체는 KBS TV와 라디오 그리고 MBC 라디오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KBS TV는 극소수 부잣집에서나 볼 수 있었고 MBC 라디오는 수신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여기에 다이얼 선점권이 있던 어른들의 보수적 성향까지 겹쳐서 대다수는 KBS 라디오를 애청했다. MBC TV는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돈을 지불한 극히 일부 가정에서만 유선으로 볼 수 있었다.
그 의미는 이렇다. 서울시민들이 MBC(문화방송)와 TBC(동양방송)와 DBS(동아방송)에서, 라디오와 TV 그리고 AM과 FM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다채롭고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접하며 문화적 허기를 한껏 채우던 그때, 그 소도시 시민들은 군사정권의 정책을 홍보하고 전통가요와 건전가요를 주로 내보내던 KBS 라디오를 통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띤’ 국민으로 충실히 ‘계몽’되고 있었던 것이다. 가끔 잘 사는 친구 집에 가서 KBS TV로 만화영화나 레슬링 시합을 보기도 했지만, 내가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는 매체는 어른들과 함께 듣던 KBS 라디오가 거의 유일했다. 날마다 어른들과 거의 똑같은 매체로 거의 똑같은 콘텐츠를 접했으니 어른들과 거의 똑같은 가수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김정구와 이미자를 좋아하는 환경은 그렇게 조성되었다. 물론 당시 한창 떠오르던 남진과 나훈아도 즐겨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김정구와 이미자의 우거진 숲을 헤치고 내 마음속에 들어온 이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민기’였다.
2.
아직 사춘기에 접어들기 전 어느 날, KBS 라디오를 통해 나오는 노래에 귀를 쫑긋 세웠다. 양희은이 낭랑한 목소리로 부르던 <아침이슬>이었다. (1971년 9월에는 양희은이, 10월에는 김민기가 각각 음반에 실어 발표했다.) 막연하게나마 가사나 창법에서 이미자나 김정구와는 전혀 다른 감성을 느꼈다. 포켓사이즈 노래책을 구해서 가사 하나하나를 음미해 가며 혼자 틈나는 대로 불렀다. 근엄하면서도 비장한 음조와 가사가 주는 묘한 매력에 점점 빠져들었다. 건전가요로 지정된 이 노래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을 때는 오래 아끼던 물건을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을 느꼈다. (1973년 건전가요로 지정되었다가 1975년 금지곡이 되었다.) 노래책을 통해 그때 그 노래의 작사자와 작곡가 이름이 김민기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것이 나와 김민기의 첫 번째 만남이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독재자가 살해당했으나 다시 그 후계자가 총칼로 정권을 잡은 그해 겨울이었다. 나는 대학 신입생으로서, 지상과 지하를 오르내리다가 나중엔 결국 지하로 내려간 동아리의 MT에 참가했다. 강원도 북쪽에 있는 어느 마을의 농가를 빌려 일주일간 합숙하며 진행되는 이른바 ‘의식화 교육’의 일환이었다. 우리는 수돗물이 미지근하게 느껴질 만큼 매서운 추위 속에서 아랫목에 모여 몸을 덥히며, 역사니 민중이니 혁명이니 하는 설익은 거대담론을 주고받았다.
선배들이 작성해 나눠준 자료에는 함께 읽을 논문 등 문서와 함께 틈틈이 함께 부를 노래들의 가사가 들어있었다. 그때 그 노래들의 작사자와 작곡자는 거의 모두 김민기였다. <임을 위한 행진곡>, <광주 출정가>, <농민가> 등 행진곡풍의 투쟁가가 나오기 전까지는 김민기의 통기타 풍 노래들이 운동가요의 핵심을 차지했다. <친구>, <상록수>, <강변에서>, <꽃 피우는 아이>, <두리번거린다> 등 김민기의 서정적이고 은유적인 노래들과 투쟁적인 운동 사이에 묘한 불균형이 있음을 느꼈다.
3.
“그는 한사코 사회성이 있는 음악, 저항적인 음악, 운동적인 음악은 만든 적이 없다고 부인한다. 적어도 자신의 사고체계 내에서는 그의 말이 사실일 것이다. 유신치하의 70년대에 들어 자신들의 문화적 지분을 획득하면서 유신체제 반대운동과 더불어 사회적 정치적 각성을 해나갔던 70년대의 대학생들은 비록 은유적이고 암시적이었지만 김민기의 통기타 음악을 자신들의 세계관을 담은 음악으로 채택한다.”
대중음악 평론가 김형찬의 말이다. 음악평론가 최경식은 “김민기의 노래는 가두시위 때 불리면 운동가가 되고, 운동경기장에서 불리면 응원가가 되고, 장례식 때 불리면 장송곡이 될 뿐만 아니라, 예배당에서 불리면 찬송가가 돼버리는 것을 오래전에 여러 번 그 현장에서 나는 목격하고 체험했다.”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대중음악 평론가 강헌은 “결코 혁명을 서술하지 않았지만 모든 혁명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고, 한 번도 영어의 몸이 되지 않았지만 가장 오랫동안 저항의 깃발이 되었다”라며 김민기와 그의 노래들을 상찬했다.
혁명을 말하지 않으면서 혁명을 꿈꾸게 하고, 저항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저항을 실천하게 하는 힘. 이것이 김민기 노래가 주는 기묘한 매력이 아닐까?
4.
나는 노래에 담긴 그의 생각을 ‘극단에 대한 거부와 내적 성찰’로 요약하고 싶다. 이를 입증하는 몇 가지 사례를 보자.
<길>에서 그는 “여러 갈래 길 누가 말하나/ 이 길뿐이라고/ 여러 갈래 길 누가 말하나/ 저 길 뿐이라고”라고 노래했다. 다양한 가능성을 부정하는 독선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또 어느 인터뷰에서 <두리번거린다>의 창작 배경에 대해, “70년대 교련반대 데모가 처음 시작되는 언저리였는데 나는 교련반대 데모하는 애들에 대해서 크게 동조를 안 했어. 뭔가 미심쩍었다고, 나한테는. 모든 게 혼돈스러웠던 거야. 그 혼돈 때문에 그런 걸 만들었던 거야. 저들이 옳을 수도 있고, 저들이 반대하는 사람들이 옳을 수도 있고. 나는 모르겠다 이거지. 그러니까 나는 물으면 맨날 회색분자라는 대답을 하지.”라고 말한 부분이다. 여기서도 성급한 주장과 판단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 담겨있다.
이 두 가지 사례보다 그의 생각이 더 잘 드러난 노래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그 사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1절) 해 저무는 들녘 밤과 낮 그 사이로/ 하늘은 하늘 따라 펼쳐 널리고/ 이만치 떨어져 바라볼 그 사이로/ 바람은 갈대 잎을 살 불어 가는데/ (후렴) 이리로 또 저리로 비켜가는 그 사이에/ 열릴 듯 스쳐가는 그 사이 따라 /(2절) 해 저무는 들녘 하늘가 외딴곳에/ 호롱불 밝히어둔 오두막 있어/ 노을 저 건너의 별들의 노랫소리/ 밤새도록 들리는 그곳에 가려네.”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밤 : 낮’, ‘이리로 : 저리로’, ‘열리다 : 닫히다’, ‘빛 : 어둠’ 등 여러 대립항이 들어있는데, 궁극적으로 이 모두를 아우르는 ‘그 사이’로 가겠다는 화자의 의지가 담겨 있다.
5.
‘극단에 대한 거부와 내적 성찰’은 유교의 중용(中庸) 사상과도 통한다. 유교에서 중용이란 인간관계에 있어서 내가 남에게 베푸는 말과 행동 또는 감정 표현에 부족함이나 지나침이 없도록 살펴서 상황에 맞는 적절함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를 더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은 구조주의 기호학의 ‘매개항(mediator)’이다. 존 피스크의 『커뮤니케이선학이란 무엇인가』에 따르면 매개항이란, “이항대립의 경계 영역이 너무 강하고 위협적일 때 이항 대립된 범주 사이를 매개하기 위해 문화 자체에 의해 구성된 범주”로 규정된다. 여기서 매개한다는 건 갈등과 대립을 중재하거나 해소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예컨대 천사는 신과 인간의 매개항이고 뻘(혹은 늪)은 땅과 물의 매개항이다. 매개항은 이항으로 대립되는 두 범주에 모두 해당되므로 한 문화의 기본적인 이해구조를 뒤흔들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신성시’되거나 ‘금기시’된다고 한다. 뻘(혹은 늪)의 경우, 땅과 물에 모두 해당되면서 그 둘의 대립을 중재하고 갈등을 해소한다. 이로써 환경적으로는 신성시되어 보존의 대상이지만 개발논리로는 금기시되어 매립의 대상이 된다.
‘그 사이’는 바로 매개항이었다. 김민기는 ‘그 사이’라는 매개항을 통해 갈등을 중재하고 대립을 해소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목표를 방해하는 사람들로부터 금기시되어 오랫동안 고문과 감시와 검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목표에 동의하고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로부터는 신성시되어, 가요에서 공연예술까지 경계를 뛰어넘는 지존의 아티스트로 추앙받고 있다. 김민기 스스로가 바로 매개항이었던 것이다.
*김민기에 관한 글과 노래 가사는 김창남이 엮은 『김민기』(한울, 2004)에서 인용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