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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말살의 기원, “아구창을 갈겨라”

이야기가 있는 다큐드로잉 13

by 까칠한 서생

※ 이 글은 수정·보완되어 2025년 11월25일 출간된《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루아크 펴냄)에 수록되었음.


1.

‘○○시민 체육대회’라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 내가 다닌 초등학교가 있던 지방 소도시에서는 봄마다 체육행사가 열렸다. 그 기간이 되면 학교마다 운동부가 출전했고 열띤 응원전이 벌어졌다. 대중매체가 많이 보급되지 않아 특별한 볼거리가 없던 당시엔 온 주민의 관심이 대회가 치러지는 공설운동장으로 쏠렸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에서는 조촐하게 송구부(당시에는 핸드볼을 송구라고 했다)와 야구부 그리고 육상부 정도가 대회에 참가했다. 응원은 단순해서 대개 기존의 여러 노래들을 개사해서 박수를 치며 부르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주로 불리던 응원가는 맹호부대,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 베트남에 파병된 군부대를 위해 만들어진 군가의 가사를 바꾼 노래들이었다.


그런데 앞부분 가사만 얼핏 기억나는 이들 노래와 달리, 가끔 불렀음에도 토씨까지 선명하게 기억되는 응원가가 있다. “보아라 이 넓은 운동장에/ ○○와 △△가 싸운다/ ○○와 △△가 싸우면은/ 보나 마나 ○○가 이기지/ 힘차게 싸운 ○○의 선수/ △△의 아구창을 갈겨라/ 뻗었다 뻗었다/ 뻗었다 뻗었다/ 보기 좋고 신기하게/ 뻗었다.” 승자의 기운에 한껏 취해서 이 노래를 악을 쓰며 따라 불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베트남에 파병되는 맹호부대 장병들


2.

실로 반세기 만에 그 가사를 살펴보니 오싹하고 섬뜩하다. 운동경기를 싸운다고 표현하는 것부터 걸리지만 그건 애교로 넘어가자. 운동경기에서 규정에 따라 승리하는 행위를 “아구창을 갈긴다.”라고 표현하고(“아구창을 갈긴다”는 “주먹으로 얼굴이나 턱을 때린다”라는 뜻의 비속어다), 승부에서 진 상대를 뻗었다고 말하며 희희낙락 좋아하는 내용이 아닌가. 세상에, 운동경기에서 승리한다는 것을 이렇게 무시무시한 용어로 잔인하게 표현하다니.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문제는 전쟁터로 나가는 군대의 사기를 북돋우려는 군가나 그보다도 더 폭력적인 노래를 응원가로 선정해서, 교육 현장에서 부르게 한 교사와 학교 측에 있을 것이다. 일부 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따라 부르기도 했을 테고, 아무리 그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교사라도 그런 노래가 불리도록 방조한 잘못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교사는 인간의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본성을 다스려 지식과 도덕으로 따뜻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도록 학생들을 이끌어야 할 사명을 지닌 존재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들은 건전한 겨룸의 마당이어야 할 운동 경기장을 전쟁터로, 스포츠를 전투로 바꿔서 상대에게 생명을 위태롭게 할 만큼의 위해를 가하도록 부추긴 역할을 한 셈이 아닌가.


3.

이승만 정권에서 초대 문교부(현재 교육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1902~1999)의 사상을 살펴보면, 이러한 사건이 벌어진 배경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주먹은 주먹으로, 총칼은 총칼로, 사상은 사상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 우리는 일민주의를 위하여 일하며 싸우며 또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여기서 일민주의(一民主義)란 이승만을 중심으로 뭉치자는 주장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이다. 박노자 교수는 『우승열패의 신화』에서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사람들이 학교나 라디오 방송에서 늘 ‘박멸’, ‘싸움’, ‘인생의 전투’, ‘단결’, ‘결사 투쟁’과 같은 용어를 듣게 되었는데, 이는 그 당시의 상식 형성에 나름대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안호상의 전투적 이념은 한국전쟁을 거친 후 박정희 군사정권 시기에도 이어졌다. 박노자 교수에 따르면 박정희 시대의 개막은 ‘싸움의 일상화’에 새 지평을 열었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은 거의 모든 비장애인 남성들에게 교련과 예비군, 민방위 훈련 등에 참여시켜 ‘평생 전사(戰士)’로서의 삶을 강요했다고 요약한다. 또한 그는 박정희가 택한 조국 근대화의 구체적인 방안은 실제로는 조국의 병영화(兵營化)였다고 평가하면서 이렇게 강조한다.


“개인을 ‘국가 생존과 경쟁’이라는 지상 과제에 완전히 예속시키는 박정희의 파시스트적 인간 철학은 (...) 자조, 총화단결, 근면, 협동, 애국적인 화랑정신의 설교에서 충분히 표현됐다. 현실적으로 ‘박정희 휘하 사단의 졸병’ 격인 노동자들에게는 이 주문들이 과로나 사고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입 닥치고 아무 요구도 하지 말고 일만 시키는 대로 하라는 명령일 뿐이었다.”


이제야 실마리가 조금 풀린다. ‘싸움의 일상화’, ‘전사로서의 삶’, 그리고 ‘조국의 병영화’ 따위의 박정희 식 저급한 경쟁 이데올로기가 초등학생끼리 벌이는 운동경기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 것이다. 상대의 ‘아구창을 갈겨서’ 뻗었다고 좋아하는 가학적인 응원가는 그런 배경 속에서 그때 그 소도시의 공설운동장에서, 아무런 제재나 거리낌이 없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4.

우리는 언제부터 ‘남’과의 경쟁에 죽기 살기로 목을 맸을까? 박노자 교수는 한국 지배층이 내세운 경쟁 이데올로기의 핵심부품은 사실 수입품이라고 파악한다. 예컨대 일제강점기에 독일에서 공부한 안호상의 경우 독일 파시즘이라는 원조 극우 이데올로기를 직수입하여 한국화 한 것이며, 박정희와 국민교육헌장을 만든 박종홍 등 1960~70년대의 군사정권의 이데올로그들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일제 말기의 총동원 사회를 핵심 준거 틀로 삼았다고 강조한다.


경쟁 이데올로기라는 강의 상류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춘원 이광수의 힘 숭배 사상에 도달한다. 이광수는 이미 1900년대부터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바로 우주와 사회의 법칙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힘의 찬미>라는 시에서 “힘!/ 오늘의 영광은 힘에 있다/ 기도 올리는 탑을 무너뜨리고/ 대포를 거는 포대를 쌓아라!/ 평화의 흰옷은 다 무엇이냐, 병대의 붉은 복장을 입고/ 몸과 맘을 모다 무장하여라./ 사람아 오늘은 힘을 찾는다.”라며 노골적으로 힘과 군대와 살인의 숭배를 외쳤다. 20세기 초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1960~70년대 개발독재 시대에 이르기까지, ‘힘’에 대한 흠모와 찬양은 이광수를 비롯한 많은 우파진영 논객들의 일관된 논조였다고 한다.


5.

박노자 교수는 힘 숭배의 뿌리를 ‘사회진화론’에서 찾는다.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이란 일반적으로 찰스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사회에 적용하여, 사회에도 약육강식과 최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의 원리가 작동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라는 사회학자가 그 창시자로 꼽힌다.



『유전의 정치학, 우생학 : 강제불임에서 나치의 대학살까지』(김호연 지음)에 따르면, 스펜서는 게으르고 나약한 존재들의 소멸은 자연의 법칙이며 사회적 약자를 도와주는 복지 정책은 최적자 생존의 법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생존경쟁과 최적자생존 테제를 기초로 인간을 서열화하는 사회 진화론을 발전시켰다.

사회진화론을 기반으로 탄생한 학문이 바로 프란시스 골튼(Francis Galton, 1822~1911)이 창시한 ‘우생학(eugenics)’이다. 우생학은 생물학을 근거로 사회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운명에 있는 다양한 부적격자들, 이를테면 빈곤자들이나 신체적 불구자들의 운명은 유전에 의한 결과임을 입증하는 학문 분야다. 사회진화론과 우생학은 제국주의 침략과 착취 그리고 민족과 인종 간 차별을 합리화하는 과학적 근거가 되었다. 히틀러의 나치가 600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할 때도 이 해괴한 학문을 명분으로 삼았음은 너무나 잘 알려졌다(그림 참조). 박 교수는 이렇게 정리한다.


“식민지 조선의 우파적 지식인들은 일제말기까지 ‘골수’ 사회진화론적 ‘힘의 찬양’에 힘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들의 1945년 계승자들도 근본적으로 같은 노선을 걸어가고 있었다. 사회진화론이 대중화된 1900년대부터 일제 말기까지, ‘약육강식이 곧 우주와 사회의 도리’. ‘적자생존은 우주의 불변의 법칙’이라는 등식으로 집약되는 노골적인 사회진화론의 철학은 우파적 ‘신지식인’들에게 유교의 성리설을 대체해 주는, 만물 전체의 선험적 진리로 인식되고 있었다.”


여기서 우파적 신지식인에 해당하는 인물은 이광수를 비롯해 유길준, 이승만, 서재필, 윤치호 등이다.


6.

다시 50여 년 전 어느 지방 소도시로 찾아가 본다. “힘차게 싸운 ○○의 선수/ △△의 아구창을 갈겨라/ 뻗었다 뻗었다/ 뻗었다 뻗었다/ 보기 좋고 신기하게/ 뻗었다.”라는 응원가가 높이 울려 퍼지는 그 공설운동장으로 말이다. 그냥 승리의 기운에 취해서였든 군중심리에 휩싸였든 나도 그 응원가를 소리 높여 불렀었다.


그때 열 살을 갓 넘긴 내가 그 가사 속에서, 다윈/골튼/스펜서/히틀러 같은 생소한 외국인들의 이름을 어찌 연상할 수 있었겠으며, 이광수/유길준/이승만/서재필/윤치호/박정희/안호상 같은 고명한 우파 엘리트들을 어찌 떠올릴 수 있었겠는가. 또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휘둘린 착취의 채찍과 유태인을 살육한 가스실, 그리고 남영동이나 남산의 음습한 고문실을 어찌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이제 돌이켜보니 50여 년 전 내가 불렀던 "아구창을 갈겨라"라는 응원가 속에 담겨있는, 힘에 의한 무한경쟁의 이데올로기는 갈수록 증폭되어 마침내 최근 몇 년간의 정적말살 정치와 얼마 전의 내란사태로 이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잘 알고 있다. 힘에 의한 무한경쟁, 그 끝에는 친일(이광수, 유길준, 윤치호의 경우)과 독재(이승만과 박정희의 경우)와 독재정권 부역(안호상, 박종홍의 경우), 그리고 전쟁과 살육(히틀러의 경우) 같은 역사의 파탄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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