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다큐드로잉 14
※ 이 글은 수정·보완되어 2025년 11월25일 출간된《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루아크 펴냄)에 수록되었음.
1.
방영 시간을 정확히 알고 기다렸다가 꼭 챙겨보는 TV 프로그램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런 행복이 바로 '소확행', 곧 작지만 확실한 행복일 것이다. 나에게 오랫동안 이 ‘소확행’을 누리게 한 프로그램이 있었으니, 바로 <TV는 사랑을 싣고>다. TV에서 사라진 지 3년이 넘었지만, 요즘도 가끔 유튜브로 재생해 다시 볼 만큼 나의 애호품이다. 다시 봐도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다.
2.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본방을 사수한 드라마는 1995년 방송된 <모래시계>가 마지막이다. 방송되는 동안에도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방송 이후에도 여운이 길게 남아서 그렇지, 알고 보면 이 드라마의 실제 방영기간은 두 달도 채 안 된다. 본방이 한참 지난 다음에 OTT로 몰아서 본 드라마로 <미생>과 <나의 아저씨> 그리고 최근의 <폭삭 속았수다>가 있으나, 그래봐야 고작 며칠 동안이었다. 시사 · 교양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에도 관심이 있지만, 대개는 화제가 된 다음에 ‘다시 보기’로 살펴보는 정도다.
그런데 <TV는 사랑을 싣고>의 경우 10년 이상 거의 빠짐없이 본방을 사수했고 드물게 본방을 놓쳐도 이삼일 안에 바로 챙겨봤다. 나의 TV시청 역사에서 이만큼 오랫동안 거의 매번 기대와 설렘 그리고 감동까지 선사해 준 프로그램은 <TV는 사랑을 싣고>가 유일하다.
3.
<TV는 사랑을 싣고>는 원래 KBS에서 1994년 5월 3일부터 2010년 5월 8일까지 약 16년 동안 총 805회 방송된 시사교양이자 예능 프로그램이다. 이때를 ‘시즌1’이라고 한다면 이후에도 ‘시즌2’(2018년 9월~ 2020년 6월)와 ‘시즌3’(2020년 9월~2021년 6월)가 새로운 포맷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의 원형은 뭐니 뭐니 해도 ‘시즌1’에서 찾을 수 있다. ‘시즌1’의 남성 진행자는 한진희-이상벽-이계진-손범수를 거쳐 갔다. 이 가운데 이상벽이 가장 오랫동안 가장 인상적인 활약을 했다. 물론 특유의 너스레가 지나쳐서 불편할 때도 더러 있기는 했다. 아무튼 <TV는 사랑을 싣고>의 전형적인 포맷과 성격은 이상벽이 몇 번 바뀐 여성 진행자와 함께 진행한 ‘시즌1’의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에 형성되었다고 봐야 한다.
4.
<TV는 사랑을 싣고>에는 네 겹의 시간이 존재한다. 우선 영상 내부에 과거-현재-미래라는 세 겹의 시간이 있다. 먼저 현재의 시간. 출연자(의뢰인)가 소개되고 나서 그가 누구를 왜 찾는지 등 ‘찾을 사람’에 관한 정보와 출연자의 심정을 밝히는 것으로 이 프로그램은 시작된다. 그다음은 과거의 시간. 출연자와 ‘찾을 사람’이 함께 했던 과거의 아름다운 기억이 대역 배우들에 의해 재연된다. 다시 현재의 시간. 남녀 ‘추적자’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찾을 사람’을 찾게 되는데, 대개는 초중고교의 생활기록부에 적힌 주소지를 단서로 우여곡절 끝에 추적에 성공한다.
그다음엔 과거와 현재가 합쳐지는 시간. ‘찾을 사람’이 스튜디오에 나와 출연자와 감동의 상봉을 한다. ‘찾을 사람’을 처음 확인하는 순간의 출연자 표정은 그때 흐르는 배경음악(<the power of love>)과 함께 이 프로그램의 백미다.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과거를 회상하며 고맙거나 안타깝거나 아쉽거나 미안한 감정을 나눈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은 대개 손을 잡고 박수를 받으며 스튜디오 밖으로 걸어 나간다. 이 장면이 바로 미래의 시간이다. 기껏 1~2분밖에 안 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시청자들은 그들이 오래오래 펼쳐갈 아름다운 미래를 상상하며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까지 긴 여운을 즐기게 된다. 언제 끝날지 모를 그 여백의 시간 속에 시청자들은 온갖 상상의 서사를 채워 넣을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을 프로그램 진행 순으로 요약하면, ‘현재->과거->현재->과거&현재->미래’가 되겠다.
4.
‘찾을 사람’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정신적 조력자이거나 애정의 대상이다. 정신적 조력자의 대표적인 사례는 선생님이지만 그 밖에도 이웃집 어른이나 하숙집 주인인 경우도 있다. 애정의 대상은 주로 짝사랑했던 동창생이지만 선생님이나 동네 및 학원 친구일 때도 있다. 선생님의 경우 노령이나 지병으로 사망한 경우도 몇 번 방송되었다. 탤런트 강부자는 당시 100세였던 은사를 감격적으로 상봉하기도 했다(1996년 5월 3일 방송, 그림 참조).
젊은 시절 친자식같이 보살펴주었던 분을 찾은 출연자도 있었는데, 나는 그 정도로 큰 은혜를 입었으면서 그제야 찾아 나선 출연자를 속으로 책망한 적도 있다. 아무리 공영방송에서 진행하는 공식 만남이라고 해도 엄연히 배우자가 있는 출연자가 첫사랑의 대상을 저렇게 반갑게 만나도 될까 하며, 공연한 죄책감을 느낀 기억도 있다. 미혼인 출연자가 짝사랑하던 상대를 만났을 경우에 두 사람이 너무나 잘 어울린다 싶은 경우도 있었지만 그 반대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내가 가슴 졸이며 지켜봤던 영상은,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출연자가 자신의 숨은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격려하거나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보살펴준 조력자를 만난 경우다. 성악가 조수미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그녀의 남다른 목소리에 주목한 선생님의 성원으로 세계적인 소프라노가 되었고(1997년 7월 4일 방송), 성우 배한성은 “넌 분명히 훌륭한 성우가 될 거야”라는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용기를 내서 독보적인 ‘천의 목소리’가 되었으며(1997년 5월 9일 방송), 가수 윤복희는 선생님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고교 졸업장을 받고 노래에 더욱 정진할 수 있었다(1996년 11월 29일 방송). 권투선수 홍수환은 뜻밖의 패배로 좌절에 빠졌으나 우연히 만난 팬의 따뜻한 위로로 4전 5기의 신화를 이룰 수 있었다(1995년 5월 2일 방송). 그 조력자가 없었다면 그 출연자의 현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출연자들이 몇십 년 만에 그 조력자들을 만나 진심 어린 고마움을 전하는 순간, TV를 지켜보는 내 가슴도 먹먹해지곤 했다.
5.
<TV는 사랑을 싣고>의 영상 내부에 ‘세 겹의 시간’이 있다면, 영상 외부에는 ‘영상을 보는 현재’라는 또 한 겹의 시간이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프로그램의 원형인 ‘시즌1’은 1994년 5월 3일부터 2010년 5월 8일까지 방송되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2025년 현재로부터 짧게는 15년 전에, 길게는 31년 전에 방송된 프로그램이다. 따라서 ‘영상 속 현재’와 ‘영상을 보는 현재’ 사이에 15년에서 31년까지의 시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영상을 보는 현재’의 관점에서 ‘영상 속 현재’를 바라볼 때, 그동안 우리 사회에 나타난 몇 가지 의미 있는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먼저, <TV는 사랑을 싣고>가 방송되던 시기에는 부모와 아들 부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 적지 않다는 점과 아무리 미혼이라도 대부분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결혼하면 당연히 분가하고 결혼 전이라도 독립 세대를 이루는 요즘 문화와 많이 다르다. 또한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인식이 매우 적다는 점, 아파트보다 단독주택이 더 많이 등장한다는 점, 손님에게 쉽게 문을 열어준다는 점 등 지금과는 많이 다른 세태를 보며, 그 세월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 개인 간 장벽이 매우 높아졌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6.
<TV는 사랑을 싣고>는 지금은 유명인이 된 그들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결국에는 나의 이야기로 돌아오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이 프로그램의 마법 같은 힘이다. 나는 앞으로도 틈나는 대로 이들 영상을 재생하며 나만의 추억을 소환할 작정이다. 최백호가 부른 <낭만에 대하여>의 가사처럼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초등학교 때 전학을 가며 집주소를 알려달라던 그 친구는 떨떠름했던 내 반응에 얼마나 섭섭했을까? 초중고교 12년 동안 만난 열두 분의 담임선생님 중 나를 가장 따뜻하게 대해준 중학교 때 그 선생님은 아직 살아계실까? 대학 때 하숙비가 몇 달 밀려도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던 그 아주머니는 아직도 조기를 ‘조구’라고 발음하실까? 만약 이 프로그램이 다시 방송되고 내가 출연할 기회를 얻는다면, 나는 반드시 이들 중 한 분을 찾아달라고 의뢰할 것이다(물론 그럴 가능성은 없겠지만).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내 머리를 맴도는 궁극의 질문은 따로 있다. 나에게는 왜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고 말한 만한 조력자가 없었을까? 그런 분이 없었기에 ‘현재의 나’가 변변치 못한 것일까? 아니, 그런 분이 실은 있었는데 나의 불찰로 알아보지 못했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