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가 던진 ‘욕망과 선(善)의 방정식’

이혜훈의 욕망을 스피노자로 읽다.

by 까칠한 서생


우리는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향하여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한다.
-바뤼흐 스피노자의 『에티카』 중에서-




1.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을 읽다가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 인용한 대목이 눈길을 확 잡아당겼다. 이것이 바로 카프카가 말한 ‘도끼의 순간’일까. 카프카는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라고 말했으니, 단순히 눈길을 끈 것만으로는 부족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문장은 적어도 내 상식의 빙판에 작지 않은 균열을 냈다.


2.

스피노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선(Good)’이라고 믿어서 그것을 원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것이 선하다고 믿는 것이라고 말이다. 강신주는 이 구절을 두고 “욕망이 먼저이고 의식적인 판단은 그다음”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 있다. 바로 ‘선’이라는 판단이다. 단순히 욕망이 앞선다는 심리학적 분석을 넘어,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선’으로 둔갑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속된 말로 ‘꼴리는 대로 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 믿어버리는 인간의 지독한 자기합리화를 스피노자는 꿰뚫어 본 것이 아닐까 싶다.


3.

『에티카』가 나오기 불과 7년 전, 파스칼 역시 『팡세』에서 비슷한 통찰을 남겼다(『에티카』는 1677년, 『팡세』는 1670년에 출간되었다). “우리의 모든 이성적 사고는 결국 감정에 굴복한다.” 파스칼에 따르면 이성은 고정된 기준이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나 휘는 갈대와 같다고 한다. 기준이 되어야 할 이성이 욕망의 방향으로 휘어버리니, 사람들은 자신의 환상을 진실한 감정이라 믿고, 자신의 욕망을 고결한 이성적 판단이라 우긴다는 것이다. 결국 ‘기준’이 사라진 자리에 ‘욕망’이 왕좌를 차지하게 되는 셈이다.


4.

최근 한 장관 후보자의 행보는 스피노자가 말한 이 위험한 철칙을 떠올리게 한다. 과거 내란을 옹호했던 인물이 정권이 바뀌자 그것을 불법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대중은 그 급격한 변신에 의구심을 갖는다. 스피노자식으로 조심스럽게 해석해 본다면, 그는 과거엔 특정 진영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에 따라 내란 옹호를 ‘선’이라 판단했고, 지금은 공직에 오르고 싶다는 욕망에 따라 사과를 ‘선’이라 판단한 것으로 비칠 수 있다.


물론 그가 지난 시간 동안 진심으로 자기 잘못을 깨닫고 가치관의 전환을 이루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인간은 교육과 경험을 통해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사과가 진심이라면, 그것은 자신의 과거 욕망을 부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려는 고통스러운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명제가 우리에게 주는 진짜 경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설령 그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반성조차 “장관이 되고 싶다”는 현재의 강력한 욕망이 만들어낸 또 다른 형태의 ‘선한 포장’은 아닌지 스스로 뼈저리게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유약해서, 현재의 간절한 욕구에 맞춰 과거의 신념까지도 교묘하게 재구성해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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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결국 스피노자가 이 문장을 쓴 이유는 우리의 욕망을 정당화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선’이라고 믿는 것들이 얼마나 비겁한 욕망의 찌꺼기일 수 있는지 냉철하게 자각하라는 경고였을 것이다. 내가 정의라고 믿는 것이 혹시 나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환상은 아닌지, 내 이성이 욕망의 시녀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끈질기게 의심하라는 ‘도끼질’이 아니었을까.


인간의 품격은 욕망을 선으로 포장하는 기술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이 뿜어내는 ‘가짜 선’을 구별해내는 능력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후보자의 변신이 진심인지 아니면 욕망의 세탁인지는 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욕망의 정당화가 아니라, 내 욕망이 가리키는 방향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겸손한 성찰’과 그 간극을 메우려는 ‘정직한 부끄러움’일 것이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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