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시간은 유한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느라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지 마세요.
1.
자신의 인생을 산다는 것. 언뜻 명쾌해 보이지만, 파고들수록 미궁에 빠져들게 만드는 화두다. 평생을 인도의 빈민가에서 보낸 테레사 수녀의 삶은 과연 타인을 위한 삶이었을까, 아니면 철저히 자신의 소명을 따른 삶이었을까. 부모의 기대와 시대적 선망을 자기 욕망으로 착각해 의사가 된 이는 과연 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순도 100퍼센트 ‘단독자’로서의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을 터인데,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타인의 개입을 용인해야 그것을 ‘나의 삶’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2.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2005년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의 시간은 유한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느라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이 문장은 “항상 갈망하라, 어리석을 만큼 용감하라(Stay hungry, stay foolish)”와 함께 그를 상징하는 가장 강력한 기호가 되었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통해 현대인의 삶을 유비쿼터스의 시대로 이끈 잡스가 정작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라고 조언하는 대목은 묘한 형용모순처럼 들린다. 어쩌면 잡스야말로 전 세계 수십억 명의 편의와 욕망을 충족시키느라 자신의 시간을 가장 많이 소진한 인물이 아니었나. 물론 그는 타인의 삶을 개선하는 일을 자신의 내면적 소명과 일치시키며, 그 치열한 몰입 자체를 자기 인생의 본질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3.
그런데 이 영웅적 서사에 기묘한 ‘가짜 기호’ 하나가 끼어든다. 잡스가 임종 직전 병실에서 썼다고 알려졌으나 결국 위작으로 판명된 <마지막 편지>라는 글이다.
“(...)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생을 유지할 적당한 부를 쌓았다면 그 이후 우리는 부와 무관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기억들뿐이다. 그 기억들이야말로 당신을 따라다니고, 지속할 힘과 빛을 주는 진정한 부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가짜 유언’이 마치 진짜인 양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수많은 사람이 이 문장에 위로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이 현상은 대중이 잡스라는 존재에 투사하고 싶었던 ‘결핍된 욕망’이 무엇이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람들은 세상을 설계하고 호령하던 인물조차 죽음 앞에서는 ‘성취’보다 ‘관계’와 ‘사랑’을 갈구했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4.
이 위작 소동을 통해 역설적으로 우리는 잡스의 스탠퍼드대 연설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그의 외침은, 단순한 성공 처세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타인이 규정한 성공의 잣대나 사회가 떠받드는 성취의 트로피에 매몰되어 정작 자신의 내면이 갈구하는 본질을 놓치지 말라는 경고였다.
비록 편지는 가짜였을지언정, 그 가짜 기호가 일으킨 파장은 진짜였다. 디지털 문명의 설계자조차 결국 한 명의 자연인으로서 사랑받고 싶어 했을 것이라는 대중의 집단적 믿음.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타인의 박수를 받기 위해 얼마나 우리 자신의 시간을 타인의 인생에 저당 잡히고 있는지를 반증한다.
5.
개인적으로는 고독할지언정 역사적 업적을 남길 것인가, 아니면 범부로서 소박한 행복을 누릴 것인가. 이 실존적 양자택일 앞에서 대부분은 후자를 소망하겠지만, 한편으론 모두가 제 앞가림에만 몰두하는 공동체의 미래는 황폐할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나다운 행복’과 ‘공동체의 진보’가 서로의 꼬리를 무는 공진화(共進化)의 길을 고민해야 한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이 반드시 공동체의 이익과 충돌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나 자신이 온전히 행복하고 충만할 때, 그 에너지가 공동체를 향한 진정한 헌신으로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공진화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잡스가 아이폰을 통해 세상을 바꾼 동력이 자신만을 위한 차가운 야망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한 뜨거운 열정이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각자의 ‘나다운 삶’을 치열하게 살아낼 때 비로소 공동체의 풍경도 다채로워질 것이다.
6.
“시간은 유한하니 자신의 인생을 살아라.” 결국 잡스가 우리에게 던진 화두는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삶이 아니라, 내면의 열정이 세상과 공명하는 삶이다.
오늘 우리의 시간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혹시 우리는 잡스의 ‘가짜 편지’에 감동하면서도, 정작 현실에서는 여전히 남들이 그려놓은 성공의 코스를 관성적으로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