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와 ‘3 아르신’의 경고

이재명 대통령의 부동산 안정화 발언을 떠올리며

by 까칠한 서생

하인은 괭이를 집어 들고, 바흠의 무덤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의 치수대로 정확하게 3 아르신을 팠다.
그것이 그가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의 전부였다.”
- 레프 톨스토이,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중에서 -


1.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140여 년 전 던진 이 질문은 2026년을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서늘한 칼날이다. 소설 속 주인공 바흠은 해가 지기 전까지 자기 발로 밟고 돌아온 땅을 모두 주겠다는 제안에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린다. 더 넓은 영토를 향한 갈증은 공포와 피로마저 압도한다. 그러나 해넘이 직전, 목표점에 도달한 그를 기다린 것은 비옥한 토지가 아니라 입에서 터져 나온 선혈과 죽음이었다.


결국 그가 차지한 땅은 자신의 키에 맞춘 정확히 ‘3 아르신(약 2.1미터)’의 구덩이뿐이었다. 이 마지막 장면은 욕망의 확장이 곧 죽음의 재촉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흥미로운 점은 바흠의 미친 듯한 질주를 부추긴 외부의 강요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자본가가 노동자의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구조로 보았고, 케인즈는 그 모순을 수정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현대 사회의 더 교묘한 풍경을 간과했다. 바로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시대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자기 착취’를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았다. 시키는 사람도 없는데 우리는 자유의지로 죽도록 일하고, 죽을 만큼 피로해진다. 스스로 ‘고용가능성’이라는 이름의 무한 잠재력을 증명하려 끝없는 자기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다.


3.

바흠의 비극은 이렇듯 현대인의 삶과 소름 돋게 닮아있다. 우리 주변에는 죽음이 문턱까지 와 있음에도 손에 쥔 ‘성과’와 ‘영토’를 놓지 못해 스스로를 고통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이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평생을 부동산 지도 위에 점을 찍으며 살다가 자식들에게 분쟁의 불씨만 남긴 채 쓸쓸히 떠나는 이들, 혹은 자신의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 영혼을 소진하는 이들이다. 그들에게 물욕은 채워야 할 바구니가 아니라, 채울수록 바닥이 깊어지는 무덤과 같다.


4.

반면, 일찌감치 이 ‘3 아르신’의 진리를 깨닫고 욕망의 속도를 줄인 이들도 있다. 70년대 청년 문화의 아이콘이었던 가수 이장희의 삶이 대표적이다. 그는 화려한 무대와 성공한 사업가의 길을 뒤로하고 돌연 울릉도라는 평온한 섬으로 떠났다. 그는 말한다.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은 더 많은 통장 잔고가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 마주하는 울릉도의 안개”라고. 마흠이 해넘이의 시간에 쫓기며 죽음을 맞이할 때, 이장희는 지는 해를 바라보며 차 한 잔의 여유를 선택했다. 물욕과 성과주의를 버린 자리에 들어선 것은 ‘나답게 살 권리’와 ‘현재를 누리는 환희’였다.


물론 누군가는 비판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성공한 자산가나 누리는 ‘배부른 소리’가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물욕을 걷어낸 자리에 삶을 채우는 일은 자본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는다. 「나는 자연인이다」에 열광하는 현대인들의 심리가 이를 증명한다. 그곳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사회에서 실패했거나 가진 것을 모두 잃은 뒤 산으로 들어간 이들이다. 하지만 흙집 한 칸에 만족하며 짓는 그들의 미소는 수백억 자산가보다 평온해 보인다. 그들은 돈이 많아서 떠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자기 착취’의 전쟁터에서 소모되기를 거부했기에 자유를 얻은 것이다.



5.

결국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은 더 넓은 땅을 소유하는 기술이 아니라, 적은 소유로도 충분히 풍요로울 수 있는 ‘삶의 양식’을 발명하는 용기에 있다. 『일하지 않을 용기』에서 말하듯, 수입을 늘리기 위해 영혼을 파는 대신 지출을 줄여 내 시간을 사는 행위는 현대적 노예제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저항이다.

톨스토이가 바흠의 시신 위에 판 그 3 아르신의 구덩이는 우리에게 경고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가진’ 땅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낸’ 시간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6.

물욕은 필요를 넘어서는 순간부터 우리를 소유하기 시작한다. 이제 우리는 바흠의 광기 어린 질주를 멈추고 자문해야 한다. 나를 증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영토가 필요한가? 부동산이라는 허상의 지도를 그리느라 정작 내 발밑의 진짜 흙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아름다운 인생은 3 아르신 너머의 무한한 소유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3 아르신의 공간에서도 온전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마음의 근력에서 나온다. 욕망의 끝이 결국 무덤임을 안다면, 우리는 오늘 조금 더 가벼워질 수 있다.


[참고 문헌]

레프 톨스토이(김은경 옮김),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 『톨스토이 단편선』, 인디북(2005)

한병철(김태완 옮김), 『피로사회』, 문학과지성사(2012)

데이비드 프레인(장상미 옮김), 『일하지 않을 용기: 일해야 산다는 강요에 맞서는 사람들』, 끌리는책(2025)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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