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의 시공간, 정태춘의 ‘새벽 북한강’

by 까칠한 서생


“아주 우울한 나날들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 때
우리 이젠 새벽 강을 보러 떠나요
과거로 되돌아가듯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이 있소.”
- 정태춘 작사/작곡, <북한강에서> 중에서 -



1.

우리는 늘 앞을 향해 달린다. 더 나은 미래, 더 넓은 영토, 더 높은 성취라는 이름의 결승선이 저 앞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질주 끝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대개 비옥한 대지가 아니라, 숨 가쁜 피로와 정체 모를 허기뿐이다. 톨스토이가 경고한 ‘3 아르신’의 허무가 삶을 조여올 때, 나는 역설적으로 뒤를 돌아본다. 40여 년 전 정태춘이 나지막이 건넨 권유처럼, ‘과거로 되돌아가듯’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순례를 시작하는 것이다.


2.

<북한강에서>에서 시간은 공간의 형상을 입고 흐른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곳엔 상류의 청정한 물줄기뿐 아니라, 문명에 때 묻지 않은 과거의 시간도 함께 고여 있다. 즉, 그에게 공간을 거슬러 한강의 상류로 향하는 물리적 행위는, 시간을 거슬러 시원의 기억으로 회귀하는 사유의 행위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새벽’은 그 시원의 시간이고 ‘북한강’은 그 시원의 공간이다. 그리하여 새벽 북한강으로 떠난다는 것은 지도 위의 지명을 찾아가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우리가 상실한 영성의 시공간에 닿으려는 고귀한 순례가 된다.


3.

3절로 구성된 이 노래의 각 절은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 거요.”라는 후렴구로 끝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마주하는 ‘안개’의 정체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이나 기형도의 <안개>에서 그러했듯, 이 노래에서도 안개는 존재의 실체를 가리고 사유를 마비시키는 불투명한 장벽이다.

정태춘에게 이 안개는 자본주의가 촘촘하게 설계해 놓은 욕망의 장막이자, 끊임없는 소비와 성공을 종용하며 삶의 본질을 가려버린 세속의 질서로 해석된다. 자본은 늘 1초라도 지난 것은 ‘낡은 것’이라며 폐기 처분하고, 잡히지 않는 미래의 환영을 던져주며 우리를 안갯속으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정태춘은 그 안개가 자욱한 강물에 얼굴을 씻으며, 진짜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과거의 순수함 속에 있음을 일깨운다. 안개를 걷어내는 힘은 더 빨리 달리는 가속도가 아니라, 강물의 시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회귀의 용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4.

이러한 통찰은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의 역사철학과 맞닿아 있다. 베냐민은 희망이란 미래를 향한 진보가 아니라, 잊힌 과거를 구원하는 데서 온다고 보았다. 그는 과거가 우리에게 ‘구원의 힘’을 요청할 권리가 있고, 우리에게는 그 요청을 실현할 ‘메시아적 힘’이 주어져 있다며 이렇게 말한다.


“과거의 이미지를 포착한다는 건 위기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의 이미지를 꼭 붙잡는 일이다. 이는 지배 계급의 도구가 되어버린 전통으로부터 새로운 전통을 빼앗아내는 일이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중에서)


정태춘이 노래하는 ‘새벽 북한강’ 역시 흘러간 시간에 대한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회복해야 할 삶의 원형을 과거로부터 다시 길어 올려, 오늘을 버텨내고 내일을 가늠하는 이정표로 삼으려는 성찰의 몸짓이다.


5.

이전까지 정태춘이 동경해 온 시원의 공간은 ‘시인의 마을’, ‘무욕의 땅’, ‘저 하늘 끝 가보고 싶은 땅’처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수식어로 불려왔다. 그러나 이 노래에 이르러 그 유토피아는 비록 은유이기는 하나 비로소 ‘북한강’이라는 구체적인 지명을 입고 우리 곁에 내려앉는다.


강물에 손을 적시며 바야흐로 안개가 걷힐 것이라 말하는 그의 태도는, 그곳이 지배와 소비의 논리가 작동하지 않는 세계임을 암시한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오래된 미래’를 발견한 라다크나, 드라마 <나의 아저씨> 속 후계동이 주는 위안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오직 우정과 환대라는 오래된 질서로 서로를 품어 안는 라다크나 후계동은, 우리가 거슬러 올라가 닿아야 할 새벽 북한강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6.

진정으로 낡은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불안을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 더 새로운 것에만 매달리는 우리의 조급함이다. 정태춘과 베냐민이 건넨 겹따옴표 안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구원은 오지 않은 미래를 선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훼손되지 않은 시원의 기억을 오늘로 불러내어 다시 살아가는 지혜에 닿아 있음을.


우울한 나날들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 때, 우리는 더 빨리 달리기 위해 앞을 보지 말고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보아야 한다. 안개를 헤치고 거슬러 올라간 상류의 끝에,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맨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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